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8)화 (18/181)

18화 

“나, 나오나 바요!”

산파 할머니처럼 말한 파타슈가 나를 따라 알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알 안쪽을 예의 주시했다.

알 안에 있는 꼬물꼬물한 무언가가 알 구멍 밖으로 흰 주둥이를 내밀었다.

아기 주먹만 한 그것은 틀림없는 망아지의 주둥이였다.

“브라우니……?”

파각.

작은 파열음과 함께 알 윗부분이 완전히 갈라졌다.

“삐유?”

알껍데기를 모자처럼 쓴 브라우니가 첫마디를 뗐다.

“이게 방금 나온 겁니까?”

“방금 브라우니라고 하지 않았어?”

“이 녀석이 페가수스라고요?”

나와 파타슈를 둘러싸고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정확히는 브라우니 때문에 몰린 사람들이었다.

브라우니는 방금 태어난 녀석답지 않게 촐랑거리며 알껍데기 근처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브라우니가 걷는 모습은 갓 태어난 사슴이나 기린처럼 불안정하지도 않았고, 핏덩이 같은 모습도 아니었다.

막 태어났는데 이렇게 활발한 게 정상인가? 페가수스를 보는 건 처음이니 이게 보통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나는 행여나 녀석이 시야에서 벗어날까 걱정돼 바닥에 엎드려 두 팔로 울타리를 세웠다.

브라우니가 내 팔뚝에 머리를 쿵 박고 도리질을 쳤다.

“쀼!”

“우오옷!”

“울었어!”

주인인 나보다 주변의 반응이 더 격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브라우니의 몸통을 껴안았다.

“삐이…….”

“아이구, 아팠쪄?”

다행히 브라우니는 내 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시무룩해진 브라우니가 귀여워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브라우니의 머리에 가볍게 뺨을 문질렀다.

주둥이와 콧잔등은 하얗고, 갈기와 털은 이름 같은 갈색에 네 발과 배, 등줄기와 꼬리는 다시 하얀색이었다.

소설에 나온 것과 같았지만 거기에서는 성체 모습으로만 묘사됐기 때문에 망아지 버전의 브라우니는 그야말로 인형처럼 귀여웠다. 내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파, 파타슈! 방금…….”

키슈가 뒤늦게 기사들 사이를 헤집고 나타났다.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파타슈가 키슈에게 다가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재, 재송해요. 이렇게 갑자기 태어날 쭐은 몰랐쩌요.”

“태어나? 뭐가? 헉!”

키슈는 그제야 내 품에 안긴 말 주둥이를 발견하고는 숨을 삼켰다. 나는 브라우니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슈는 내게 가까이 오는 대신 파타슈의 양어깨를 잡고 멱살이라도 잡을 듯 격하게 흔들었다.

“죄송하다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응?”

“저, 저눈 그냥…….”

“끄흠.”

내가 헛기침을 하자 키슈가 다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몰려 있던 기사들이 슬쩍 뒤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키슈는 뒤늦게 사정을 설명했다.

“마나가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아서 급하게 왔어요. 무슨 일이 생긴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갑자기 부화했을 줄은 몰랐는데…….”

“제가 파타슈 님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여달라구 부탁드렸써요. 키슈 님이 없어서 저도 댈 줄 몰랐는데, 왠지 부화하더라구요.”

“삐.”

브라우니가 강아지처럼 울며 하얀 꼬리를 살랑거렸다.

“아… 일단 보고부터 드려야겠네요.”

멍하니 있던 키슈가 다시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우리를 포위하듯 있던 기사들이 그녀가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켰다.

키슈의 바쁜 걸음 옆으로 혼자 검을 휘두르고 있던 카눌레가 쯧, 혀를 찼다.

“그깟 망아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흥.”

그깟 망아지라고 하기에는 전설의 동물이었지만, 관심이 고픈 카눌레에게는 안 좋은 소식일 테니 나는 그저 작게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브라우니의 부화 소식은 저택 내부에 파다하게 퍼졌고, 소식을 들은 엄마는 기사와 사용인들을 불러모아 함구령을 내렸다.

물론 목격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그것이 잘 지켜질지는 의문이었다.

“세상에, 그 알이 진짜 페가수스의 알일 줄이야. 주인님의 안목이 한 건 했네요.”

식탁에 호두 파이를 내려놓으며 에이미가 감탄했다.

저 ‘주인님’은 문맥상 아빠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아빠의 선물 고르는 안목이 한 건 했지.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만월까지는 며칠이나 남았죠?”

“사흘이요.”

아빠와 통신을 주고받기까지 사흘이 남았다는 소리였다.

에이미가 대답하며 엄마와 키슈, 카눌레, 나와 파타슈에게 파이를 한 조각씩 덜어주었다.

그러고는 내 옆에 서서 조금 고민하다가 물었다.

“페가수스가 파이도 먹을까요?”

“에이미의 파이는 맛있으니까 한번 줘보께요.”

내가 방긋 웃자 에이미도 마주 웃으며 내 접시에 작은 파이 조각을 추가로 올려놓았다.

에이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후, 나는 품에 아기처럼 안고 있던 브라우니의 입가에 그 부스러기를 가져다 댔다.

그러나 브라우니는 아까부터 계속 잠에 빠져 있었다.

작게 푸릉, 하는 소리를 내고 브라우니가 눈을 감은 채 입맛을 다셨다. 꼭 파이를 먹는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작은 파이 조각을 내 입으로 가져갔다.

‘어쩔 수 없이!’였지만 역시 에이미의 파이는 참 맛있었다.

호두 파이는 내가 선호하는 단맛과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쿠키처럼 바삭한 바닥과 쫀득한 필링, 은은한 계피 향과 고소한 호두 맛은 씹을수록 풍미를 더했다.

그야말로 건강해지는 맛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내일은 꼭 초코 파이를 해달라고 해야지.

“크흠.”

엄마가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모으고 말했다.

“키슈 님, 괜찮으시다면 3일 후까지 여기 머물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프랄린… 아니, 쉬제트 백작님께 직접 상황을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페가수스의 사육법에 대해서도 연구할 게 있으실 것 같고요.”

“예, 물론이죠. 제가 먼저 부탁드리고 싶은 건데요.”

키슈가 대번에 승낙하고 빙긋 웃었다.

그 모습에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었다.

“마탑엔 안 가봐도 괜차나요?”

“괜찮아요. 유망한 예비 마법사를 발견해서 설득 중이라고 해놨거든요.”

괜히 물어봤나.

나는 합,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어떤 핑계를 댔나 했더니만 저런 핑계를 대고 있었군.

“페가수스요?!”

그때 갑자기 식당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제 막 학교에서 돌아온 갈레트였다.

얌전히 내 품에서 잠들어 있던 브라우니가 문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아니, 그나저나 브라우니 얘기는 대체 어떻게 들은 거지? 함구령이 내려졌을 텐데.

나는 뒤통수에 민망한 마른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쉬잇. 갠차나.”

내가 작게 속삭이며 브라우니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놀라 일어났던 브라우니가 다시 내 팔에 턱을 올리고 졸린 눈을 끔뻑거렸다.

갈레트가 뒤늦게 내 품에 안긴 망아지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 이거예요?”

“갈레트. 예의를 챙겨야지.”

“아, 죄송합니다!”

이미 예의를 챙기기엔 한참 늦었지만 갈레트는 차렷 자세로 섰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자 갈레트가 눈치껏 게걸음을 걸어 내 옆자리로 왔다. 카눌레의 자리에.

“…하아.”

카눌레가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서 내려 한 자리 옆에 앉았다. 갈레트가 당연하다는 듯 카눌레의 자리를 차지했다.

“아무튼 다들 아시겠지만, 페가수스 얘기는 비밀로 해주세요. 이후 처사에 대해서는 쉬제트 백작님과 상의해 결정하는 걸로 하죠.”

갈레트의 난입으로 잠깐 끊어졌던 화제를 마무리하고, 엄마가 디저트 포크를 들었다.

엄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식당을 떠났다. 키슈와 이후 일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해보려는 모양이었다.

파타슈는 키슈에게 저를 데려가 달라고 열심히 눈빛을 보냈지만 키슈는 가차 없이 엄마를 따라 나갔다.

그리하여 식당에는 우리 삼 남매와 파타슈만 남았다.

에이미가 뒤늦은 식사를 준비해 왔다. 다들 저녁을 먹은 후에 후식으로 호두 파이를 먹은 거였지만 갈레트는 예외였다.

“아이구, 드디어 먹네.”

갈레트가 한숨을 섞어 말하며 스푼을 들었다. 버섯 리조또였다.

카눌레가 그 모습을 한심한 듯 바라보았다.

“그냥 기숙사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아?”

“우리 크레페를 놓고 가긴 어딜 가?”

갈레트는 카눌레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리조또를 한 입 먹었다.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나는 그 모습이 새삼 안쓰러웠다.

“내 생각두 그래. 그냥 다음 학기엔 기숙사 가자.”

“크레페 너까지!”

갈레트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나는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하지만 학교 너무 멀자나. 매일 저녁도 혼자 먹고 아침엔 새벽같이 나가면서. 그러다 건강 해치면 어쩌려구 그래.”

“이럴 수가,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갈레트가 감동받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껴안으려는 게 분명했기에 나는 화들짝 놀라 만류했다.

“안 대! 브라우니 자잖아!”

“…….”

갈레트가 말없이 내 품에 있는 브라우니를 쳐다보곤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쩐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감정 변화였다.

카눌레가 혀를 차고 턱짓으로 식탁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님 있잖아. 자제 좀 해라.”

카눌레가 가리킨 쪽에 혼자 앉아 있던 파타슈가 어깨를 움찔했다.

갈레트가 숟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왜 아직 안 가셨어요? 원래는 지금쯤 일 끝나고 돌아가지 않았나?”

“3일 후에 아빠랑 통신할 때까지 여기 머물기로 했어. 키슈 님이랑 같이.”

카눌레가 파타슈를 대신해 대답했다. 갈레트가 두 번째로 스푼을 떨구듯 내려놓았다.

“뭐? 우리 크레페랑 한집에서 지낼 거라구?”

“징그럽게 말하지 좀 마!”

카눌레가 갈레트에게 핀잔을 놓았다. 나도 격렬히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눌레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카눌레가 식탁에 한쪽 팔꿈치를 올려놓고 파타슈를 향해 삐딱하게 물었다.

“뭐, 그래도 평민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크레페 꼬셔서 출세하겠다거나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죠?”

“오빠!”

실례도 이만저만한 실례가 아니었다. 나는 브라우니도 잊고 놀라 외쳤다.

하지만 카눌레는 여전히 파타슈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갈레트조차 카눌레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내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파타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슈트루델 사람처럼 안 생겼쬬?”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물론이고 갈레트와 카눌레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파타슈는 의자에 앉은 채 양 허벅지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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