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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6)화 (16/181)
  • 16화 

    나는 문득 기억을 더듬어 그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엄마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너 그 노래는 어디서…….”

    “아가씨? 여기 계세요?”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에이미가 나타났다.

    나는 깡총 뛰어 소파를 내려갔다.

    “도착했대여?”

    “네, 키슈 님과 파타슈 님이 접대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디저트 준비할까요?”

    “네! 아, 브라우니도 데려와 쭈세요!”

    나는 후다닥 달려 접대실로 향했다.

    접대실 문 앞에 멈춰서 숨을 골랐다. 손님맞이였으니 엄마도 와야 했지만 아무래도 천천히 오시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폴락거리는 치맛자락을 정리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 오셨어요?”

    키슈가 반겨주었다.

    통상적으로 귀족들이 주고받는 예절 따위는 없었지만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녀의 몸 뒤에 가려진 꼬마에게 주의가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 인사.”

    키슈가 짧게 말했다. 파타슈가 소파에서 내려와 날 향해 서서 허리를 굽혔다.

    “키슈 로렌의 양아들 파타슈 로렌임미다. 잘 부탁께요.”

    “아휴, 일일이 양아들이라고 붙일 필요 없다니깐. 그리고 귀족끼리 인사할 땐 허리 안 숙여도 돼. 죄송해요. 아직 데려온 지 얼마 안 돼서.”

    키슈가 파타슈의 등을 살짝 때렸다. 파타슈가 어색한 표정으로 허리를 폈다.

    나는 그제야 파타슈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혀 짧은 목소리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내 또래의 어린아이였다.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몸이 마른 편이라 나보다 커 보였고,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에 피부색은 까무잡잡했다.

    머리카락보다 어두운 피부색과 회색 눈동자, 가늘게 치켜 올라간 눈매까지.

    어린아이에게 이런 말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쩐지 이국적으로 보이는 생김새였다.

    나는 살짝 압도된 느낌을 받으며 치맛자락을 들고 인사했다.

    “미,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입니다. 여섯 쌀이에요.”

    “…….”

    파타슈는 대답하지 않았다. 키슈가 대신 말했다.

    “파타슈는 다섯 살이에요. 아직 어려서 실수할지도 모르지만, 잘 봐주세요.”

    그러고 키슈가 파타슈를 살짝 끌어당겼다. 파타슈가 도로 소파에 앉았다.

    나보다도 어린 나이에 마법의 천재라고?

    파타슈를 신중하게 관찰하며 그 맞은편에 앉았다.

    원작에서도 그랬듯 파타슈는 별로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무뚝뚝해서가 아니라…….

    나는 파타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죄 없는 테이블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느낀 듯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가 나와 눈길이 마주쳤다.

    “끅.”

    괴상한 소리를 내며 파타슈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큰 죄라도 지은 듯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키슈가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로 파타슈를 슬쩍 쳤다.

    “참 나, 누가 너 잡아먹니?”

    나보다 긴장하고 있던 사람이 여기 있었구나.

    나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무뚝뚝한 게 아니라 그냥 낯가림이 엄청 심한 성격인 것 같았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압도당했던 그의 회색 눈동자도 낯설다기보다 순진한 강아지의 그것으로 보였다. 강아지치고는 사나운 눈매긴 했지만.

    나는 이내 긴장을 풀고 웃었다.

    곧 문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왔다.

    “수플레 슈 살레 루아라고 합니다. 인사드렸었죠?”

    그녀의 뒤를 따라 에이미도 들어왔다.

    브라우니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상하게도 에이미는 트레이를 끌고 왔다.

    “브라우니는요?”

    “여기요.”

    하며 에이미는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먹는 브라우니였다.

    “…알을 가져와 달라고 말했떤 건데.”

    “아, 실례했습니다.”

    브라우니를 ‘데려와’ 달라고 한 말에서 이상한 점을 못 느꼈던 걸까? 대체 내가 평소에 어떤 이미지였길래…….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사이, 에이미가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접시를 도로 치우려 했다.

    내가 화들짝 놀라 그녀의 손을 막았다.

    “개, 갠차나요! 이것또 먹을게요.”

    “그러시겠어요? 그럼 전 알을 가지러 다녀올게요.”

    “네!”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에이미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작은 소동이 있었던 접대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다리를 대롱거리며 옆에 앉은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키슈가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먹어도 돼.”

    “와아앙!”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포크를 집어 들었다.

    키슈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킥킥 웃었다. 그리고 아직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파타슈를 어깨로 슬쩍 밀었다.

    그들이 멋쩍어하지 않도록 내가 먼저 환히 웃으며 말했다.

    “두 분도 드쩨요! 에이미의 브라우니는 찐짜 맛있거든요!”

    “…….”

    그러자 파타슈의 눈썹이 움찔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브라우니를 처음 먹는 사람인 것 같았다.

    디저트의 매력을 모르다니, 인생의 팔 할 정도를 손해 보며 살아왔구나.

    나는 난생처음 보는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 측은함을 느끼며 브라우니를 크게 떠서 한입에 넣었다.

    저절로 광대뼈가 올라가는 진한 단맛. 제일 달콤한 행복을 덩어리로 뭉친 듯한 꾸덕함이었다.

    내가 먹는 것을 바라만 보던 파타슈도 이내 포크를 쥐었다.

    나는 머뭇거리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첫 행복을 기도해 주었다.

    무엇보다 파타슈는 나보다 연하였다.

    크레페가 된 후 항상 막내 역할만 한 나였기에 파타슈가 나보다 동생이라는 사실이 조금 설렜다.

    걱정했던 것만큼 위압적이지도 않고, 낯가림만 나아진다면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냠.”

    브라우니랑 와플이랑 파이에 머핀에 쿠키까지! 잔뜩 알려줘야지!

    파타슈의 뺨이 살짝 부풀었다.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이 갓난애처럼 사랑스러웠다.

    갈레트가 나를 볼 때 이런 기분인 걸까? 나는 그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파타슈가 브라우니를 꿀꺽 삼키고 중얼거렸다.

    “웩.”

    …아냐, 못 친해질 것 같다.

    빠르게 태세를 전환한 내가 말을 잃고 있던 그때 에이미가 브라우니의 알을 가지고 돌아왔다. 키슈가 눈을 반짝였다.

    “여기에 브라우니라고 이름을 붙여줬어요? 귀엽네요.”

    아유, 별말씀을. 귀여운 건 이름을 붙여준 아펠 황태자 또는 그쪽 아드님이죠.

    “특히 이 마나 파동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군요. 이 깜찍한 것.”

    아, 그쪽이구나.

    “끄흠.”

    속마음으로 끝내서 다행이다.

    나는 혼자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 에이미에게 손짓했다.

    에이미가 브라우니의 알을 쿠션째로 테이블에 올렸다.

    키슈가 파타슈에게 말했다.

    “어때, 아들? 너도 느껴지지?”

    “네에… 이건 정말…….”

    우리 가족들의 눈에는 그냥 프라이 해 먹으면 맛있을 것 같은 거대한 무정란이었지만, 놀랍게도 파타슈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엉덩이를 들썩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먼가 느껴져요?”

    “먼가… 울렁거리고 있네요. 떠는 것 같끼도 하고?”

    “부화시킬 수 이쓸 것 같나요?”

    “우선 마나를 한번 넣어보까요?”

    하며 파타슈가 키슈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덩달아 그녀를 쳐다보자, 키슈는 물론이고 우리 엄마와 에이미까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엄마에게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니, 애기들끼리 진지한 얘기를 하는 모습이 너무…….”

    “너무 귀여워서요.”

    차마 말을 맺지 못하는 엄마를 키슈가 도와주었다. 나는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튼 이 나이 먹고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구만!

    나는 엉덩이를 씰룩여 등받이에 등을 딱 붙이고 앉았다.

    에이미가 웃으며 방을 나간 후, 파타슈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크흠, 키슈 님?”

    “엄마라고 불러야지. 자, 내가 도와줄 테니 마나를 한 번 넣어봐.”

    파타슈가 고개를 끄덕이고 알에 손을 올렸다.

    키슈가 파타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왼손으로 허공에 이상한 문양을 그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색은 없었지만 아지랑이처럼 그 존재를 볼 수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붉은색의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가 귀족 학교의 단상 위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시작해.”

    “네.”

    파타슈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집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아니, 있다.

    “어, 엄마.”

    “왜?”

    “키슈 님의 마법진이 자꾸 흐려찌는데요?”

    “네? 악!”

    키슈가 날 쳐다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순간 눈앞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듯 거대한 풍압이 일었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파타슈, 멈춰!”

    짧은 외침과 거의 동시에 바람이 멈췄다.

    눈을 뜨자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 있었다.

    “크레페, 괜찮아?”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풍압이라는 게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던 듯 소파는 뒤로 밀려나 있었고 초코 브라우니가 있던 접시는 바닥에, 돌로 만들어진 테이블엔 실금이 가 있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멀쩡한 것은 파타슈와 알뿐이었다.

    “위험할 거라는 얘긴 안 하셨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키슈가 급하게 옷차림을 바로 하고 섰다.

    나는 엉망이 된 방을 보고 엄마를 봤다.

    “엄마는 갠차나요?”

    “응.”

    “두 분은뇨?”

    파타슈가 불안한 듯 키슈를 쳐다보았다.

    키슈가 고개를 끄덕이고 파타슈를 품으로 끌어왔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이에요. 마법진이 보인다는 말에 놀라서 그만.”

    마법진이 보인다고 말한 건 나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슈를 쳐다보았다.

    “크레페 님, 이게 보이신다고요?”

    키슈가 허리를 굽히고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내 눈앞에 붉은 마법진이 생겼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크레페 님은 마법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네요.”

    “그거 보여서요? 쩌번에 학교에서는 사람들 다 마법진 봤떤 거 같은데?”

    “그때는 일부러 보이게 했죠. 일종의 영업 전략이랄까, 팬 서비스랄까.”

    아하.

    나는 금세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그 마법진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마탑 지원자를 늘리기 위한 전략이었나 보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키슈 님은 아이들을 위험하게 했습니다.”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슈가 움찔하고 정자세로 섰다.

    “저의 불찰에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주의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엄마가 그 말을 되풀이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이대로 부화 실험이 중지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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