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5)화 (15/181)
  • 15화 

    평민 출신의 마법 천재.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문득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내가 혹시나 싶어 물었다.

    “근데 아들 이름이 뭐예요?”

    “파타슈라고 하는데요.”

    대답을 들은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제가 후원하게 해주쎄요.”

    잭팟!

    미래에 황태자의 심복이 될 대마법사의 이름이었다.

    “야, 크레페. 네가 뭔데 사람을 후원한다 만다야? 쪼그만 게.”

    “오빠는 쫌 가만있어 바!”

    카눌레에게 한 손을 내젓고 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키슈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카눌레와 마찬가지 생각인 듯했다. 어색한 표정을 보니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저… 크레페?”

    엄마가 내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호위기사가 내 옆에 있어서 알아채는 게 늦었는데, 조금 뒤처져 있던 엄마가 이제 막 나를 따라잡은 모양이었다.

    내가 엄마를 돌아보자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갈레트가…….”

    “흐윽, 사랑이 식었어! 크레페가 날 버리고 갔다구!”

    엄마 뒤에 숨어서 훌쩍이고 있던 갈레트가 갑자기 내 목에 매달렸다.

    이제 행사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키슈는 이 웃기지도 않은 홈드라마를 보며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내가 갈레트를 토닥이며 키슈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서 얘기할 수 있쓸까요?”

    * * *

    파타슈. 평민 출신의 마법사.

    그는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소설 내에서 큰 분량은 없었지만 언제나 아펠 황태자와 함께 움직이는 황자의 심복이었다.

    설마 파타슈가 브라우니를 부화시키기 위한 핵심 열쇠였을 줄이야.

    그러고 보니 키슈는 파이의 일종이었다. 나는 먹어본 적 없었지만.

    이제 왜 그녀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한 내가 왜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는지도 수수께끼가 풀린 셈이었다.

    아무리 디저트 이름이라고는 해도, 원작에서 조연으로 나오는 인물의 엄마 이름까지 내가 외우고 있을 리가 없잖아.

    “쉬제트 백작가 분들이시라고요?”

    “네. 여긴 갈레트, 카눌레, 크레페라고 해요.”

    엄마가 우리를 차례로 소개했다.

    내가 키슈를 초대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다행히 엄마와 키슈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쉬제트가의 크레페? 아, 혹시…….”

    키슈가 내 이름을 듣더니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다음 말을 예상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몽블랑한테 고백했다는?”

    “…….”

    아니, 여기서 후작님 이름이 왜 나와!

    “그 아저씨 알아요?”

    나보다 먼저 갈레트가 흉흉한 눈빛으로 물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티 테이블을 뒤집기라도 할 기세였다.

    하지만 키슈는 눈치가 없는 건지 겁이 없는 건지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제 마탑 동기예요. 페가수스 논문도 같이 썼는걸요. 몽블랑은 그때 된통 당하고 연구에서 손 뗐지만, 아직도 종종 연락해요. 참고로,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니 질투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조숙한 아가씨.”

    세상 말세로고. 띠 동갑도 넘는 나이 차에 앞으로 그놈이 우리 가족한테 저지를 일이 있는데.

    나는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를 삼켰다.

    일단 내 목표는 몽블랑이랑 친하게 지내서 우리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었으니, 이제 와서 그를 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갈레트에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조숙한 아가씨 어쩌고 하는 부분을 참지 못하고 갈레트가 벌떡 일어났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참 나, 나이 차가 몇인데 우리 동생을 그딴 아저씨한테!”

    “갈레트.”

    엄마가 차분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낯 뜨거워진 내가 갈레트의 옷자락을 잡고 끌어내렸다. 그가 툴툴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키슈가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파타슈를 후원해 주시겠다고요?”

    “뭐? 크레페, 너 그런 말을 했어?”

    갈레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갈레트를 데려오느라 대화를 듣지 못했던 엄마도 덩달아 놀랐다. 유일하게 카눌레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크레페는 겨우 여섯 살이에요. 아줌마도 정말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요. 여섯 살짜리 말을 믿고 집까지 따라오다니.”

    “카눌레! 죄송합니다, 제가 교육을 잘못 시켜서…….”

    엄마가 재빨리 다그쳤다. 오빠들의 버릇없는 태도 때문에 연신 사과하는 모습이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백작보다 높은 후작위에 있는 몽블랑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갈레트와 마탑의 권위 있는 연구원을 아줌마라고 부르는 카눌레.

    그리고 갑자기 나서서 모르는 아이의 후원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나까지 말이지.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나도 내 제안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건지 알고 있었다.

    키슈조차 진심으로 기대한 건 아니었다는 듯 맥 빠진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우리 가족의 안위가 걸려있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탁자를 탕, 치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키가 작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파에서 내려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서 나는 테이블 앞으로 나가 섰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남자 주인공의 믿을 만한 부하를 빼앗아간다는 죄책감 같은 것도 없었다.

    미래를 바꿔서 얻을 부작용 같은 건 갈레트와 엄마의 목숨을 지키기로 마음먹을 때 이미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실행되진 않았지만 나는 작년에 황태자가 쓴 마법 공식을 이용해 카눌레를 마탑에 들여보내려 한 전적이 있었고, 황태자의 애마인 브라우니를 내 것으로 삼기 위해 페가수스의 알을 가로챘다.

    이제 와서 부하 하나 더 데려온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이왕 할 거면 끝까지 가야지.

    황태자의 알에 황태자의 부하. 이제 다 내 거다.

    나는 눈을 뜨고 키슈에게 말했다.

    “저한테 페가수스 알이 있써요. 파타슈 님이 그걸 부화시켜 준다면, 후원이든 뭐든 할게요.”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거니까, 정의로운 날치기가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 브라우니를 위하여 】

    나는 기사 연무장 근처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멍하니 카눌레를 바라보았다.

    카눌레는 제2기사단 단장의 코치를 받으며 열심히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번 학교 축제에서 갈레트의 검술 시합을 보며 제대로 자극받은 모양이었다.

    뭐, 그것도 시합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결국 그날의 시합은 우리들 사이에서 말하면 안 되는 불문율이 되어 있었다.

    브라우니의 알을 끌어안은 내 팔을 떼어내지 못한 시점에서 갈레트의 저질 체력은 예상되어 있던 게 아닐까…….

    “뭐 하십니까?”

    마르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요즘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내가 연무장까지 나온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대리 만족이요.”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마르크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몸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른다. 운동하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게 대리 만족이 된다는 사실을.

    침대에서 동영상 사이트를 누르고 운동 영상을 찾아보는 것과 비슷한 심리라고나 할까.

    나중에 해야지, 생각하지만 결국 안 하게 되는 그런 거.

    “헉, 구경하지 말고 가~!”

    카눌레가 달리기를 하며 외쳤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산책으로 나온 거였는데 어느덧 해가 중천이었다.

    그러잖아도 가봐야 할 시간이었기에 나는 벤치에서 내려와 엉덩이를 털었다.

    “데려다드릴까요?”

    “갠찮아요.”

    내가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겼다. 곧 키슈 로렌이 파타슈를 데려올 시간이었다.

    지난번 내가 페가수스의 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자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키슈는 크게 놀랐고 엄마는 당황했으며 카눌레는 내가 헛소리를 한다며 면박을 주었다.

    그러나 갈레트가 브라우니의 알을 가져오자 키슈는 눈을 반짝였다.

    마나 파동이 어쩌고 연구가 어쩌고 하는 말이 이어지긴 했는데, 사실 그녀가 너무 흥분해 있었기에 말을 알아듣기가 쉽진 않았다.

    하지만 그게 그 알이 페가수스의 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못했다.

    페가수스가 전설의 동물이 된 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들었다. 키슈도 페가수스의 알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부화는 시켜보자’까지만 양보받았다. 그리고 알은 진짜 몬스터의 알일 수도 있다고 압수당했다.

    키슈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만 알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아니, 자식을 빼앗긴 엄마처럼… 음, 미래의 부하를 빼앗긴 아펠 황태자처럼… 아무튼 상심해 있었다.

    “키슈 님은뇨?”

    “아직 안 오셨어. 어디 갔다 오니?”

    “작은오빠가 운동하눈 거 구경이요.”

    나는 가볍게 말하며 소파에 올라앉았다.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엄마가 픽 웃었다.

    “오빠들이 다들 바빠서 심심한가 보구나?”

    “머…….”

    얼버무리며 다리를 휘휘 저었다.

    갈레트는 학교에, 카눌레는 연무장에.

    원래 요즘 같으면 나도 페가수스에 대한 논문을 읽고 있었을 테지만, 엄마의 말대로 지금은 손님을 기다리는 것 말고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파타슈와의 첫 만남이라는 게 좀 긴장되기도 하고.

    어제 밤늦게까지 내 인생 공략집을 읽다가 잠을 설쳤다.

    기억을 떠올리려고 열심히 낑낑대 봤지만 역시 파타슈의 정보는 별로 없었다.

    그냥 무뚝뚝하고 항상 로브를 쓰고 있어서 표정도 안 보이는 남자 정도?

    원작의 크레페도 파타슈와 몇 마디 섞어본 적이 없어서 내심 그가 불편했다는 묘사가 있었던 게 기억났다.

    엄청난 괴짜면 어떡하지. 아니, 분명 그럴 거야. 그 아펠 황태자의 심복이니까.

    하지만 앞으로 대성할 마법사와 사이가 틀어지면 곤란했다.

    물론 엄마는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편히 쉬다 가렴. 내가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차나요. 혼자 노는 것도 재밌으니까.”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엄마는 싱긋 웃고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이곳은 아빠의 성씨인 쉬제트 가문의 영지였지만, 그는 변방에 나가 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가 실질적인 영주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엄마와 단둘이 있는 시간은 오래간만이었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 떠올랐다.

    따사로운 봄바람과 내 볼을 간질이던 가을 낙엽색의 머리카락, 여름처럼 내리쬐는 햇살 밑에서 엄마가 자장가로 부르던 허밍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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