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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화 (14/181)
  • 14화 

    나는 엄마의 품에 숨은 채 눈만 빼꼼 내밀어 갈레트를 쳐다보았다.

    구경꾼이 하도 많아서 그의 모습이 선명히 보이진 않았다.

    이 많은 인파 속에서 내 얼굴을 발견한 게 대단하다.

    갈레트의 동생 사랑에 새삼 감탄하며 나는 그의 대전 상대를 살폈다.

    멀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갈레트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컸다. 역시 나이 차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따지자면 초등학교 4학년생과 중학생이 싸우는 거랑 비슷할 텐데, 아무리 1년 동안 연습했다고 해도 상대가 되기나 할까?

    그러나 내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알려주듯 갈레트의 활약은 눈부셨다!

    …라고 진행됐다면 멋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갈레트는 참패했다.

    신은 공평하다고 했던가. 갈레트의 능력치는 인트에 몰빵되어 있어서 스트렝스와 덱스에는 포인트 투자를 못 한 모양이었다.

    음, 이 세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비유는 여기까지만 할까.

    “종료!”

    심판이 외쳤다. 시합 직전까지 긴장감 있는 분위기였던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빠른 결과였다.

    나는 가만히 시합을 복기해 보았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갈레트는 시합이 시작하자마자 상대에게 달려들었고, 상대는 마구잡이로 뻗어오는 갈레트의 검을 힘으로 맞받아친 후 다리를 걸었다.

    무작정 달려들던 갈레트는 거기에 걸려 볼썽사납게 데굴데굴 굴러갔다.

    장외 패였다.

    나는 갈레트가 무대에서 내 이름을 외쳤을 때만큼 부끄러웠다.

    엄마가 속삭였다.

    “오, 오늘 일은 갈레트한테 먼저 말하지 말자. 오빠를 위해서. 알겠지?”

    옆에서 카눌레가 중얼거렸다.

    “형을 이길 방법이 코앞에 있었을 줄이야.”

    아무래도 내가 권하기 전에 카눌레가 먼저 검술을 시작할 것 같군.

    허무할 만큼 짧았던 경기가 끝났지만 우리는 아직 갈레트와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귀족 학교라서 그런지 축제 전후로도 많은 차례와 의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한국의 아침 조회 시간을 상상했던 나는 벌써 몇 명째 이어지는 연설을 들으며 하품을 했다.

    “다음으로, 마탑의 권위 있는 연구자이신 키슈 로렌 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키슈 로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 이것도 디저트였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그리 비중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랬으면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을 테니까.

    키슈는 줄지어 있는 학생들을 지나 앞에 있는 단상에 올라갔다.

    그녀가 단상의 계단을 한 칸 올라갈 때마다 염색한 것처럼 선명한 빨간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마탑의 연구자’라고 소개된 대로 그녀의 옷차림은 마법사라기보다는 연구원 같았다.

    키슈는 흰 가운을 망토처럼 펄럭이며 단상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한 손을 들었다.

    그녀가 허공에 손가락을 긋자 무형의 기운이 일그러졌다.

    키슈의 머리색과 같은 붉은색이 기묘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카눌레가 넋을 잃고 혼잣말했다.

    “마법진이다.”

    그때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

    괴이한 감각이었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여자의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지만 헤드폰이나 이어폰과 달리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텔레파시를 귀로 들으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나 혼자뿐인 듯했다. 엄마나 카눌레는 신기하다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키슈 로렌입니다. 슈트루델국 내 유일한 마탑에서 마법 연구 및 연구생 교육을 맡고 있죠.」

    연구생 교육?

    그 말은 나나 갈레트가 마탑에 들어가면 그녀의 밑에서 공부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여러분, 마법은 재밌습니다. 그리고 쉽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마법사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마탑에 좀 들어오세요. 누구든지 좋습니다. 몬스터보다 못한 지능만 아니면 제가 성심성의껏 가르쳐 드릴 수 있어요. 언제까지 검 들고 설치기만 할 겁니까, 예?」

    “…….”

    마법의 신기함에 빠져 웅성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 역시 입을 다물었다.

    인력난에 시달리는 연구원이라는 건가.

    슈트루델국의 몰랐던 일면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키슈는 이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제 할 말만 계속했다.

    「마탑에서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나 상관없고, 오기 전에 책 한 권만 보고 오시면 됩니다. 제가 쓴 건데 『참 쉬워요. 어린이를 위한 마법 상식』이라고 있어요.」

    엇.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저 책 이름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카눌레와 친해질 절호의 찬스를 저 책 때문에 날렸으니까.

    그리고 뒤늦게 기억해 냈다.

    키슈 로렌. 저 ‘참 쉬워요’의 글쓴이이자 페가수스 어쩌고 논문을 쓴 사람!

    나는 엄마의 팔을 끌고 인파를 가로질러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키슈의 연설은 계속되고 있었다.

    「광고는 아니고 참 잘 쓴 책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마탑 신입 연구생으로 바로 들어올 수 있을 겁니다. 아시겠죠? 그러니까 오세요. 제발 나 좀 도와줘! 우리 아들 클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한세월이라고! 평민 출신이라고 입학도 안 시켜주면서 말이야!」

    아니, 더 이상 연설도 아니군.

    「악! 이거 놔! 놓으라구우우!」

    키슈는 기사들에게 팔을 잡혀 무대에서 끌어 내려지고 있었다.

    그녀가 몇 걸음 멀어지자 허공에 떠 있던 마법진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내가 계속 끙끙거리며 나아가는 사이에도 행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 줄지어 선 학생들 사이에서 금발의 남자아이 한 명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크레페! 나 보러 내려온 거야? 여기야, 여기!”

    “하하…….”

    엄마가 날 대신해 갈레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쪽에 관심이 없었다.

    기사들은 키슈 로렌의 팔을 놓고 다시 진행 업무를 계속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키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게 손을 흔드는 갈레트를 무시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키슈 님! 자깐만뇨!”

    나는 키슈와 대화하기 위해 그녀를 구석으로 끌어냈다.

    그녀는 날 마법사 지망생이라고 생각한 듯 잔뜩 들떠서 국가의 지원이 어쩌고 마법의 인식이 어쩌고 하는 말을 계속 해댔다.

    “그러니까, 마법사가 되려면 지금이 딱 좋을 나이라니까요? 다들 마법이 어려운 줄 아는데, 사실 마력학 기초만 알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 마력학 기초를 알려면 지금 나이에는 무리일 것 같은데.

    “야, 나는 왜 끌고 온 거야?”

    카눌레가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 내게 눈치를 주었다.

    꼭 그 때문은 아니고, 가만히 있다간 내가 말할 타이밍도 놓칠 것 같아서 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저! 마법 때문이 아니구, 페가수스에 대해 궁금한 게 이써서요.”

    “응? 페가수스요?”

    “네, 네. 우리 가문 상징이거든요.”

    내게 페가수스의 알이 있다는 소릴 함부로 퍼뜨리고 싶진 않았다.

    나는 내가 가슴에 찬 브로치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페가수스 모양으로 주조된 틀 위에 내 눈 색과 같은 보라색 자수정이 박혀 있는 브로치였다.

    키슈는 자신이 헛다리를 짚었다는 걸 깨닫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렇군요.”

    “페가수스는 알을 낳는다면서요?”

    “학회에서 나왔습니까?”

    “네?”

    갑자기 키슈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키슈가 손을 저었다.

    “아유, 아님 됐어요. 옛날에 페가수스가 알을 낳는다고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학회 사람들한테 개같이 까였거든요.”

    “개같이…….”

    카눌레가 그 단어를 놓치지 않고 중얼거렸다.

    키슈가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불타는 듯한 머리색에 걸맞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물었다.

    “알은 어떻게 부화시켜요?”

    “부화? 아, 그래. 내가 쓴 논문도 그런 내용이었죠. 근데 가설이라 확실하진 않아요. 인공적으로 부화에 성공한 전례도 없고.”

    “괜차나요. 말해 주세요.”

    “으음… 우리 아들이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의미 모를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들이 페가수스 육아의 달인이라도 된다는 뜻인가?

    다행히 그런 낯부끄러운 질문을 꺼내기 전에 키슈가 먼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페가수스는 하늘을 날잖아요. 전설에서는 날개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 날개 같은 건 없고, 우리는 페가수스가 마법을 사용하는 신수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마법이요!”

    “네에.”

    “그러니까 알을 부화시키려면 그 부모, 페가수스 성체와 맞먹는 고순도, 고강도의 마나를 주입해야 할 거라는 거죠.”

    그럴싸한 가설이긴 했다. 원작에서도 브라우니한텐 날개가 없었고, 꼭 비행 마법을 쓰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는 묘사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브라우니를 부화시킨 게 아펠 황태자와 그 심복이라는 것도 근거가 될 만했다.

    그 두 명은 원작에서 마법사라는 사실이 확실히 나온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마법을 배우기 전에는 브라우니를 부화시킬 수 없는 건가. 안 돼, 그럼 너무 늦는단 말이야.

    나는 순간 침울해져 어깨를 늘어뜨렸다가 다시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키슈 님 아들이 할 수 있다구요?”

    “네, 그럴 거예요. 제가 원래는 아이를 키울 생각이 없었는데, 우리 애 재능이 너무 뛰어나서 데려온 거거든요. 아, 저는 마법 서약을 했어요. 뭔지 아세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아라요.”

    내가 재빨리 손을 내저어 그녀의 대답을 막았다.

    몽블랑 후작도 마법사라 결혼 예정이 없다는 말은 이미 1년 전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굳이 알고 있는 사실을 또 들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자 키슈는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게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마법에 관심 없는 거 맞아요?”

    “아들 얘기나 계속해 주쎄요.”

    “크흠.”

    키슈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키슈도 말이 많은 스타일인 것 같은데, 마르크를 붙여놓으면 볼만하겠군.

    “그래요. 제가 우리 아들을 데려온 게 그 재능 때문이에요. 아직 어리지만 마나를 운용할 줄도 알고, 공부 머리는 평범해서 아직 마탑에 들여보낼 순 없지만, 일단 후원자만 찾으면 바로 여기에 입학시키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민 출신이라면 양자라고 해도 귀족 학교에 입학시키는 게 어려울 만도 했다.

    들어보니 추천인이나 후원자가 있다면 입학이 가능한 모양이었지만.

    아니, 잠깐.

    그렇게 뛰어난 마법 재능을 가졌는데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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