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0)화 (10/181)

10화 

“하실 말씀이란 건 뭔가요?”

“드, 드러가서 얘기해또 대요?”

나도 쫄기 싫은데 자꾸 말을 더듬게 되니 죽을 맛이었다. 아빠를 처음 볼 때도 이렇게 무섭진 않았는데.

나는 긴장한 채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빠가 봄이라면 이 남자는 꼭 겨울 같았다.

그가 자신의 뒤에 선 기사와 뭐라 이야기를 나누더니 곧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들어오시죠.”

어떻게 사람이 웃는 모습까지 저렇게 차가워 보일 수가.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그의 방에 조심스런 걸음을 내디뎠다.

기사와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내가 들어간 것과 동시에 몽블랑의 호위기사가 자리를 비웠다.

이제 이 방에는 나와 몽블랑, 그리고 마르크뿐이었다.

마르크, 가랏! 저 남자를 없애버려!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고생 좀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르크랑 미리 암살 모의라도 하고 들어올 걸 그랬다. 물론 마르크가 날 미친 사람 취급 안 하면 다행이었겠지만.

“참 귀여운 드레스를 입으셨네요.”

“…감짜합니다.”

칭찬인 것 같아 인사를 하긴 했지만 나는 입맛이 썼다.

아빠는 변방에 토벌을 나가 있는 기사였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 가족은 이번 파티에서도 모두 드레스 대신 제복을 입었다.

그러니까, 맞는 옷을 못 찾은 나만 빼고.

파티 마지막 날에는 화가를 데려와 그림까지 남겼으니 앞으로 그걸 볼 때마다 이번 일이 생각나겠지.

“아뇨, 진심으로요. 쉬제트 백작가는 기사 집안이라는 사실에 너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이제 마법의 시대가 올 텐데 말이죠.”

이건 떡밥인가?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몽블랑은 원작에서도 메인 악역치고는 등장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주인공은 철저히 크레페 한 명이었고, 심리 서술도 모조리 크레페를 기준으로 나왔다.

그래서 카눌레가 왜 가족을 배신했는지, 몽블랑의 최종 목적이 뭐였는지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

어쩌면 이건 그의 속내를 알기 위한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다행히 그와 나는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기에 키 차이가 있어도 눈을 마주 보는 게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몽블랑의 다음 말을 듣고 나는 맥이 풀렸다.

“그러고 보니, 첫날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고 하던데.”

뭐야, 그냥 마탑 소동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뿐인가.

나는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느껴져 한숨을 내쉬었다.

“퓨우, 별거 아니에요. 가족끼리 소똥에 부짱짜가 있쪘다고나 할까요.”

“소통에 불상사요? 하하, 어려운 말을 쓰시네요.”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다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패기 있게 쳐들어온 건 좋았는데,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 오빠들 끌어들이지 마세요!’라고 해야 하나? ‘엄마한테 해코지할 생각 마세요!’라고 해야 하나?

“그럼, 무슨 일로 절 찾으셨나요?”

피하려고 했던 질문이 훅 들어왔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입술을 뗐다.

“후작님은 결혼했쩌요?”

“아뇨. 저는 정식 마법사거든요.”

마법사랑 결혼 안 한 게 무슨 상관이지?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법사는 신의 권능을 빌려 요술을 부린다고 합니다. 삶을 신에게 바쳤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건 금지되어 있어요. 성직자와 같죠. 양자나 양녀를 들일 수는 있지만요.”

그렇구나.

뒤늦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나온 정보만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주인공 크레페는 마법을 쓸 줄도 몰랐고, 그 때문에 마법에 대한 설명이 필요 이상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는 몽블랑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작의 주요 인물치고는 그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마법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뇨, 후작님한테 관심 있쩌요.”

고개를 젓고 그렇게 대답하자 몽블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뒤늦게 내 대답이 어떻게 들렸을지 깨달았다. 그래서 더 수상해 보이기 전에 말했다.

“잘생기쪘네요.”

그래, 암살하러 왔다고 하기보단 금사빠가 되는 게 낫지.

【 프로 날치기가 될 거야 】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지.

어느덧 1년이 지나 나의 여섯 살 생일 파티도 끝났다.

이번에는 아빠도 안 올라왔고, 가까운 곳에 사는 귀족들만 초대해서 간단히 치렀다.

참고로 이번에는 몽블랑 후작도 안 왔다.

…나 같아도 그러겠다.

“어떡하냐? 네 첫사랑 안 와서.”

카눌레가 속 터지는 말을 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나도 그날 그 발언이 일 년 동안 놀림거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몽블랑 이 치사한 놈이 돌아가기 전에 엄마한테 내 얘기를 이르고 간 게 분명했다.

카눌레는 이때다 싶었는지 날 놀려먹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도 내 첫사랑 운운하는 그 말을 함부로 부정하지는 못했다.

사실 나는 작년부터 몽블랑과 매달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으니까.

참고로 말하자면 진짜 몽블랑이 내 첫사랑이라서가 아니라, 그와 친하게 지내면 날 봐서라도 내게 나쁜 짓 못 하지 않을까 하는 계산 때문이었다.

뭐, 잘생기기도 했다만.

“그런 얘긴 하는 거 아냐. 우리… 우리 막내가 그딴 아저씨한테……!”

갈레트가 카눌레에게 한 소리 하다 말고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구나.

나는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갈레트는 곧 날 껴안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시집가면 평생 남편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혀줄 거라나.

내가 한 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 제발 크지 말아달라며 펑펑 울음을 터뜨렸던 갈레트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아가씨! 첫사랑한테서 선물 도착했어요!”

“에이미까지…….”

몇 연타로 콤보를 얻어맞으니 정신이 아찔했다.

“뭔데요?”

정신 못 차리는 나를 대신해 카눌레가 물었다.

에이미는 정자까지 트레이를 끌고 왔다.

평소라면 우리에게 디저트를 가져다줄 때 쓰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찻주전자와 함께 웬 종이 상자가 올라가 있었다.

“아가씨가 직접 열어보시겠어요?”

에이미는 여느 때처럼 생글거리는 얼굴이었다.

설마 백작가에 온 선물을 안전 확인도 안 하고 가져왔을 것 같진 않고, 아마 내 반응을 보고 즐기려는 것 같았다.

깜짝 상자 같은 건가?

나는 에이미와 상자를 수상쩍은 눈으로 보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었을 때, 나는 다른 의미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슈, 슈끄림? 이게 후작님한테서 왔다구요?”

“몽블랑 후작령의 특산품이래요. 마론 슈.”

세상에.

냉장 기술이 없는 이 세계에 이런 것을 보낼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이동 마법이나 냉장 마법.

설마 슈크림 같은 과자에 그런 고급 마법을 사용하다니.

나는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로 슈크림을 내려다보았다.

“다행이구나, 크레페. 사랑받고 있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눌레가 담담히 말했다.

“이딴 거 먹지 말라고!”

하지만 갈레트는 화를 내며 내 손을 팍 쳐냈다.

내가 들고 있던 상자 뚜껑이 날아가려던 찰나, 카눌레가 굉장한 반사 신경으로 그것을 잡아챘다.

“이 뚜껑은 내가 가져도 되지?”

이제 보니 뚜껑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 냉장 마법인 것 같았다.

나는 카눌레를 타박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못 말리겠구만.

“차 준비해 드릴까요?”

에이미가 그렇게 물으며 잔을 세팅했다. 당연히 승낙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악역 몽블랑 후작이 직접 보낸 슈크림이라니. 혹시 독이라도 있는 거 아냐?

…하지만 그것도 먹어봐야 아는 법.

“홍차로 부탁할게요.”

나는 새침하게 말했다.

그리고 갈레트의 징징대는 소리는 못 들은 척하고 마론 슈 한 개를 들어 올렸다. 슈가 파우더가 싸라기눈처럼 휘날렸다.

나는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잇새로 바스러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은은한 마론 크림의 향도.

밤을 넣은 버터크림과 커스터드를 섞어 만든 필링 같았다.

몽블랑처럼 무겁지도 않고 커스터드처럼 마냥 달지도 않은 온화한 풍미가 입안에 퍼졌다.

쳇. 고자질쟁이 주제에 맛은 좀 아는 놈이로군.

나는 불만족스럽게 혀를 차고는 손가락에 남은 설탕 가루를 쪽 빨았다.

결국 앉은 자리에서 마론 슈 한 상자를 몽땅 먹어버렸다.

나는 뒤늦은 죄책감을 느끼며 배를 내려다보았다. 작년과 별다를 바 없이 볼록한 배가 안녕 하고 있었다.

이르지만 검술이라도 배우겠다고 할까…….

푹 한숨을 내쉬자 무언가가 내 뺨을 찔렀다. 당연히 갈레트의 손가락이었다.

나는 반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 말래찌.”

“그, 그래도 너무 귀여운걸.”

“…….”

“…미안.”

나는 흥, 콧바람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따라오지 마.”

“나 내일부터 다시 학교 나가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아아?”

갈레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빠가 날 아껴주는 건 좋지만 어쩔 땐 과하다니까.

나는 수풀을 헤치고 열심히 걸음을 뗐다.

이제 옛날처럼 자주 넘어지지도 않고 혀 짧은 소리도 훨씬 덜 내는데, 갈레트는 아직도 나를 한 살도 안 된 갓난애로 보는 것 같았다.

이제 내가 절세미인이 되기까지도 9년밖에 안 남았는데.

“…….”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번 생일 파티 때는 미리 치수를 재고 옷을 맞춘 덕에 제복을 입을 수는 있었지만 똥똥한 뱃살 때문에 옷 핏이 영 안 살았다.

넘어지면 작년처럼 또 단추가 뜯어질 것 같기도.

“…흥.”

콧바람을 내쉬고 다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 혹시 절세미인이 안 되면 뭐 어때서.

어차피 내게 살을 빼라고 잔소리나 독설을 날리는 사람은 이번 생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원작의 크레페는 너무 예쁜 나머지 각종 고난을 겪는 캐릭터였다.

내게 중요한 건 가족의 안녕과 행복이지, 내 외모 같은 게 아니었다.

“흐우, 우욱…….”

하지만 역시 운동은 좀 해야 하려나.

기사 연무장까지의 거리가 좀 멀긴 했지만 나는 입안에서 피 맛을 느끼고 있었다.

이 나이에 무릎이 아픈 게 정상일까? 소싯적에는 술래잡기라도 하면서 뛰어놀았던 것 같은데.

물론 전생 때 얘기지만.

“아가씨?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어요?”

작년에도, 그리고 어제까지도 내 호위기사를 해주고 있던 마르크가 날 발견하고 뛰어왔다.

나는 대답도 못 하고 연신 헥헥거렸다.

“후욱, 자, 자깐만… 헥.”

“무슨 일이야, 마르크?”

마르크의 동료 기사인 듯한 몇몇 사람이 다가왔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현기증에 산소 부족이 생긴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순간 눈앞이 핑 돌더니 곧 정신이 아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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