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내가 무슨 마음으로 어떤 다짐을 했는지에 관계없이 파티는 계속됐다.
파티 이틀째, 다행히 어제의 소란이 무슨 뜻이었는지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다섯 살배기인 나한테 물어보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고, 부모님은 사정이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카이트 남작가에서 왔어요. 자녀분들이 참 귀여우시네요.”
“세렝기 자작가에서 왔습니다. 제 딸도 곧 입학을 하는데…….”
나는 부모님 곁에서 지루한 자기소개를 듣다가 그만 하품을 해버렸다.
첫날인 어제는 적당히 뒤로 빠져 있었지만, 나와 카눌레의 소개까지 마친 오늘부터는 가능하면 부모님 옆을 지키는 게 예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원작에서 나오지 않는 이름들엔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고 연신 하품을 하자 옆에 서 있던 카눌레가 내게 발길질을 했다.
“멍청아, 하품은 전염된단… 후아암.”
“얘들아?”
엄마가 나와 카눌레의 어깨를 툭 쳤다.
하지만 생리 현상이라 참을 수가 없다고요.
“몽블랑 후작입니다. 백작께서는 여전히 얼굴에서 빛이 나는군요.”
헙.
하품이 쏙 들어갔다.
몽블랑 후작이라는 이름은 분명 원작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 다섯 살 생일에 오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아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책에 나온 그 몽블랑 후작이 맞는지 확인했다.
책에서 말하길, 몽블랑은 마치 겨울의 설산을 사람으로 빚어놓은 것 같은 외모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몽블랑은 밤으로 만든 마론 크림을 주재료로 한 디저트였다.
그러나 이 남자는 밤색은커녕 갈색이 들어간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프릴이 달린 셔츠와 은색 자수가 놓인 감청색 재킷을 입고 있었고 브로치는 파란색이었다.
창백한 피부와 가느다란 손가락, 날카로운 눈매와 날렵한 몸매, 청회색 눈에 흰색 머리카락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조합이었다.
“별말씀을요. 후작님께서도 변함없이 한여름에 서릿발 날리게 생기셨네요.”
아빠가 하하 웃었다. 어딘가 비꼬는 듯한 어투였지만 아빠의 얼굴엔 한 점 거리낌이 없었다.
악의 없이 한 말인지 고의로 시비를 건 건지 헷갈려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전하시군요, 백작.”
몽블랑이 간단히 웃어넘기고 걸음을 옮겨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정확히는 우리 뒤에 선 엄마 앞에.
“소식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다들 굉장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요.”
“아직 어린애들인걸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몽블랑 말고도 우리가 인사를 나누어야 할 사람들은 뒤에 줄지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몽블랑은 엄마와 짧게 고갯짓만 나누고 뒤로 물러났다.
“와, 머리 완전 하얗다. 할아버진가?”
“형 바보야?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었잖아. 원래 머리색이겠지.”
갈레트와 카눌레가 수군거렸다.
나는 내심 마른침을 삼키고 몽블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카눌레의 말이 맞았다. 몽블랑은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빠보다 겨우 대여섯 살 많은 나이였고 흰색 머리카락은 타고난 것이었다.
나는 원작의 몽블랑 후작을 떠올려보았다. 몽블랑 몬테 비안코. 쉬제트 백작가와 아펠 황태자의 정적(政敵)이자, 카눌레와 손을 잡고 엄마와 갈레트를 암살한 범인.
그는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메인 빌런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냥 몽블랑을 암살하면 모든 위협 요소가 제거되는 것 아닐까? 선빵 필승?
다섯 살이 하기에는 영 부적절한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크레페?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갈레트가 도서관까지 나를 찾아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인싸의 면모를 과시하며 모르는 귀족 어른들과 하하호호 하던 갈레트였는데, 내가 없어진 건 또 언제 알았지?
“오빠는 머 하는데?”
“우리 귀여운 동생 찾으러 왔지.”
갈레트가 그렇게 말하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를 흘끗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에 엄마와 오빠를 죽일 살인 교사범을 만났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해.
아냐, 하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오빠, 마법 배우쨔.”
“응?”
“지금 말구 나중에, 오빠 학교 끝난 담에라도 갠차느니까. 응?”
갈레트는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은 얼굴이었지만 나는 간절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갈레트는 크레페의 바로 눈앞에서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갈레트는 열다섯 살이었고, 마법은 할 줄 몰랐지만 기본적인 검술은 배웠던 걸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죽임을 당했던 거다. 검술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갈레트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이 필요했다. 나뿐 아니라, 내가 아끼는 사람 모두에게 자신을 지킬 힘이 있어야 했다.
“무슨 일 있어?”
“…….”
하지만 다섯 살짜리가 그런 말을 해봤자 귓등으로라도 먹힐 리 없지.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갈레트가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굽히고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내 뺨을 쿡 찔렀다.
“킥킥.”
“…맨날 이래.”
“포동포동해서 귀엽단 말야.”
삐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자 갈레트가 나를 부드럽게 껴안고 달랬다.
“우리 막내, 맨날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을까. 겨우 다섯 살이면서. 응?”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은 밤이었다. 어쩌면 이미 잘 시간이 지나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갈레트의 등을 마주 안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의 옷을 꽉 쥐었다.
갈레트가 내 등을 토닥거렸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태어나 줘서 고마워. 생일 축하해, 크레페.”
* * *
만일 일곱 살에 엄마가 죽는 일만 없었다면, 나는 내가 다섯 살이든 세 살이었든 곧바로 마법을 배우러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마탑은 우리 쉬제트 백작령과 그리 가깝지 않았고, 심지어 나는 엄마가 정확히 언제 죽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크레페는 일곱 살에 엄마를 잃었다.’라니, 설정 너무 대충했잖아!
하지만 이제 와서 절규해 봤자 과거가 바뀔 리는 없었다.
결국 내후년부터 1년 동안은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수밖에.
다행히 5일간의 파티는 별 사건 없이 마무리됐다.
그 후 이틀 동안 아빠는 엄마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거나 영지 일을 돕거나 했고, 삼 일째 되는 날엔 다시 성을 떠나 변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그를 배웅하는 동안 내 뒤에 선 호위기사 마르크는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크흑, 백작님이 벌써 떠나신다니…….”
그러고 보니 마르크한테 아빠 얘기를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구나.
“휴, 나도 다시 학교 가야겠네. 크레페, 오빠 얼굴 잊지 말고 있어. 알았지?”
갈레트가 애완동물을 혼자 두고 떠나는 사람처럼 나를 열심히 쓰다듬었다.
이러다 탈모라도 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쓰다듦이었다.
나는 슬쩍 머리를 빼내고 조건을 내걸었다.
“오빠두 공부 열씨미 하고! 미리 마법 공부도 쫌 해! 약쏙이야!”
“마법?”
카눌레가 마법 소리에 반응했다.
마법사가 되고 싶지도 않은 마법진 오타쿠 주제에 이럴 때만 관심 있는 척하긴.
“응. 나랑 크레페랑 둘 다 마법사 하기로 했거든.”
갈레트가 나를 대신해 카눌레에게 답해 주었다. 많은 사정이 생략되어 있긴 했지만 나도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이 정도 선에서라도 그를 설득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갈레트도 머리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했으니, 분명 마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겠지.
“흐응.”
카눌레가 짐짓 무관심한 척 돌아섰다.
음, 오늘 들고 있는 책은 『마법진으로 읽는 대륙의 역사』로군. 물론 역사를 알고 싶어서 보는 건 아니겠지만.
파티는 끝났지만 각 영지의 사정상 손님들이 돌아가기까지는 최대 7일 정도의 여유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떠난 지금도 아직 쉬제트 백작가의 성에 머물고 있는 귀족은 몇 명인가 남아 있었다.
몽블랑 후작도 그중 한 명이었다.
원작에서 몽블랑은 크레페와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다.
갈레트도 이번 파티 때 그를 처음 본 것이라 했으니, 원래 몽블랑이 자신의 영지를 벗어나는 일은 드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직접 얘기해 봐야겠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아가씨?”
“아, 에이미! 몽블랑 후작님을 보러 왔쪄요.”
“어… 주인님은요?”
에이미가 물었다.
여기서 왜 우리 엄마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가 왜 나 대신 마르크에게 질문하는 건지도, 마르크가 왜 어깨를 으쓱하는지도 난 정말 모르겠다.
아니, 모르긴 왜 몰라? 내가 겨우 다섯 살이라 그렇지!
“들어갈래여!”
나는 씩씩거리며 무작정 성으로 들어갔다.
뒤뚱거리는 어린애 걸음이야 그들도 충분히 말릴 수 있었겠지만, 아이의 작은 모험 정도라고 생각했는지 나는 어떤 만류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쉬제트 백작가는 커다란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 안에 요새를 겸한 외성이, 또 그 안에는 내성이 있었다.
외성은 기사나 사용인의 저택이 몰려 있는 곳이었고 내성은 귀족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리고 내성은 몇 개의 성과 몇 개의 저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가족이 머무는 성이었고, 나머지는 도서관, 기사들의 연무장, 객실용 저택 등이었다.
여기서 오 년이나 산 나도 이 내성을 다 돌아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손님용 건물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아, 아저찌.”
“예.”
“내 옆에 좀 서주쩨요.”
마르크가 웃음을 삼키고 두어 걸음 앞으로 왔다.
나는 그의 바지 자락을 꽉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르크가 보기엔 내가 자기 집에서 쫄아 있는 겁쟁이 같겠지만 나는 적진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안 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몽블랑 후작님은 왜 찾아가시려는 겁니까?”
“날 찾고 있습니까?”
“히이이익!”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바로 옆에 있던 문이 열리며 찬바람 쌩쌩 날리는 듯한 외모의 몽블랑이 나타났다.
“제 방문 바로 앞에서 그런 얘길 하시니 다 들리더군요.”
바로 첫 번째 방이 몽블랑 방이었구나.
“아, 아녕하쩨요.”
다급히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크레페 아가씨였죠?”
“네에.”
일부러 느리게 대답하며 슬쩍 눈동자를 굴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처럼 하얀 머리에 청회색 눈동자라니, 금발에 보라색 눈보다 비현실적인 외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