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 쪽지가 뭔데 그래?”
“그래, 무슨 얘기야?”
갈레트가 다시 물어보았다.
나는 카눌레하고만 얘기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제 와서 갈레트를 빼고 얘기하기엔 늦은 것 같았다.
나는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고 말했다.
“잠깐 나가까?”
그렇게 얘기하자 그들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알았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왜냐면 지금 할 얘기는 비밀이었으니까.
내가 카눌레에게 적어준 건, 나중에 남자 주인공인 황태자가 써먹어야 하는 마법 공식의 일종이었다.
간단한 얘기였다. 난 카눌레와 친해지고 싶고 카눌레는 마법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등장했던 마법 공식을 적어 카눌레에게 건넸다.
아빠는 전장에 나가 있는 유능한 지휘관이다. 그가 마법을 못 쓴다고 해도 마법 공식을 이해하는 여덟 살이 얼마나 똑똑한지는 알 것이었다.
그러니 그것을 쓴 게 카눌레라고 밝히면, 카눌레는 분명 마법사 육성 코스로 직행이었다.
“마법 공식? 크레페,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작은오빠가 맨날 보는 책에서 봤찌!”
사실 원작에서는 황태자가 사용한 방법이지만, 나는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그것은 내가 예전에 『내 인생 공략집』에 적어놓은 인수분해 공식이었다.
원작에서 정확히 무슨 공식이라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카눌레가 읽던 마법책을 보니 대충 이해가 가서 공략집에 따로 정리해 놨다.
대충 X나 Y라는 미지수를 이용해 마법진의 지름이나 문자 간 간격 비율을 구하는 계산식이었다.
“그럼 그걸 내가 썼다고 거짓말해서 마법을 배우라는 소리야?”
카눌레가 눈썹을 찡그렸다. 내 예상과 달리 그리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찔끔한 얼굴로 물었다.
“시러……?”
“하아…….”
나이에 걸맞지 않은 한숨이었지만 적어도 싫다는 말은 없었다.
…고 생각한 순간 대답이 돌아왔다.
“싫어, 멍청아. 나는 마법을 배우고 싶은 게 아니라고.”
“크레페한테 멍청이라고 부르지 마! 다섯 살에 마법식을 이해한 천재한테!”
“자, 자깐만, 오빠. 시러? 싫다구?”
이건 내 계산에 큰 차질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러나 마법을 배우고 싶지 않다는 카눌레의 말은 진심인 듯했다.
“난 그냥 마법진이 좋은 거야.”
“머야, 그럼 마법을 배우는 것도…….”
“마법진만. 생긴 게 멋있잖아. 내가 마법을 쓰고 싶은 게 아니라고.”
시방 저눔이 뭔 말을 하는 것이당가?
내가 입을 헤벌린 사이 카눌레의 말이 이어졌다.
“복잡한 공식 같은 거 몰라도 그림은 볼 수 있잖아. 마법진 진짜 멋있게 생기지 않았어? 우리 방에 있는 마법등도 해체해 보면 그런 무늬가 있는데, 그거 따라 그리는 것도 재밌더라. 참고로 동그란 건 원형 마법진이라고 하는 건데, 사실 팔각이나 오각형으로 된 것도 있대! 특히…….”
“…….”
“왜.”
한참 혼자 열변을 토하던 카눌레가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말을 멈췄다.
갈레트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쿡 찌르고 속삭였다.
“크레페, 이번엔 네가 실수한 것 같다. 쟤 그냥 변태였어.”
그렇군.
“모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셋째인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의 다섯 번째 생일 파티인 동시에, 둘째인 카눌레 드 보흐도 쉬제트를 처음 소개해 드리는 날이기도 하죠. 둘 다 정말 인형 같지 않습니까?”
단상에 나란히 선 나랑 카눌레가 몸을 굳혔다.
이렇게 굳어있으니 인형 같아 보일 수밖에.
하지만 아빠는 우리의 고충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왼쪽에 선 우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고, 자신의 오른쪽에 선 갈레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소식을 들으신 분도 있겠지만, 첫째인 갈레트 드 루아 쉬제트는 겨우 열 살에 입학시험에 합격했답니다. 모두 제 아내 수플레 덕분이에요.”
엄마가 한 걸음 나와서 나와 카눌레 사이에 섰다.
그녀 역시 나를 뺀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단정한 제복 차림이었다.
카눌레와 비슷한 검회색 제복 위로 그녀가 내려 묶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희고 검은 제복들 사이에 내 프릴 드레스만 톡 튀었다.
나는 새삼 부끄러워져 뒤로 숨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엄마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아빠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 저는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너무 제 자랑만 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원래 이런 게 파티 호스트의 특권이겠죠?”
손님들 사이에 은은한 웃음이 퍼졌다.
나는 아빠를 돌아보았다. ‘좋은 소식’ 어쩌고 하는 얘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가 아빠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좋은 소식이요?”
“그럼요, 수플레. 우리 카눌레에 대한 얘기랍니다.”
어라, 이거 뭔가 기분이 쎄한데.
어쩐지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빠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 알았는데, 우리 카눌레가 글쎄 여덟 살이라는 나이에 마법 공식을 정리해 낸 천재였더라고요! 저는 방금 마탑에 연락을 넣었고, 몇 달 후에 카눌레의 자리를 만들어놓겠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아빠의 스피치가 끝났다.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껌뻑였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카눌레가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이제 어쩔 거야, 크레페! 어떡할 거냐고!”
카눌레가 뒷일은 생각도 않고 소리쳤다.
“카눌레, 너 지금 동생한테 무슨 짓이야!”
“맞아! 우리 크레페한테 왜 그래!”
갈레트가 끼어들었다. 단상 위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아빠가 당황하며 손님들을 진정시켰다. 나는 아직도 이 상황을 믿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이거 진짜 다 나 때문이야?
내 생일 파티는 5일 동안 이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멀리서 오느라 아직 도착하지 못한 손님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아빠의 환영식을 겸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겨우 하루 만에 이런 사달이 날 줄이야.
메인 홀에서는 아직 파티가 한창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가족 전용 식당에 둘러앉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침울하고, 한편으로는 긴장되는 분위기에서 엄마가 입을 열었다.
“…그럼 카눌레, 네가 거짓말한 거니?”
“크레페가 시켰다고요!”
“쩌는 오빠가 마법 조아하니까……!”
“그래요! 크레페는 잘못 없어요!”
“조용!”
여느 때와 같은 양상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빠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호통친 엄마가 아빠를 돌아보았다.
아빠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럼 마법 공식을 이해하고 정리해 준 게 카눌레가 아니라 크레페였다고?”
“네에…….”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드레스 자락을 쥔 손을 꼬물거렸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않은 다섯 살이 혼자 마법 공식을 깨달았다면 천재로 추앙받아도 모자랐겠지만, 나는 그리 뿌듯한 마음은 없었다.
카눌레한테 거짓말을 시키고 파티에 소란을 일으켰으며 아빠는 카눌레를 데려가라고 마탑에 연락까지 했으니까.
“크레페는 마법을 배우고 싶니?”
아빠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화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마법? 물론 흥미 있었다. 판타지 세계의 꽃 같은 존재 아니던가.
하지만…….
“탑에 드러가면 집에 못 오쬬?”
“올 수는 있지. 거리나 수속이 있으니 편하게 오가긴 힘들겠지만.”
“아빠, 크레페는 겨우 다섯 살이에요.”
“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아빠가 갈레트의 말을 잘랐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그대로 마탑에 들어가게 될 판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 갈래요.”
“걱정돼서 그래? 시종이나 호위기사도 붙여줄 수 있어. 통신구로 가족이랑 연락도 할 수 있고.”
아빠는 나를 계속 설득하려는 듯했다.
마탑에 다시 연락해서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하기엔 체면이 서지 않을 테니 이해는 됐다.
하지만 선택지가 있다면 나는 끝까지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야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2년 후에 엄마가 암살당하니까.
“하지만 크레페, 겨우 다섯 살에 마법을 이해하는 일은 흔치 않아. 그게 네 재능일지도 몰라.”
나는 아무 말 없이 계속 고개만 저었다.
겉으로야 다섯 살 꼬마였지만 사실 나는 십 년 넘게 공부만 하는 생활을 지속해 왔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는 천재도 뭣도 아닌,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재능이라니. 그건 아빠가 몰라서 하는 얘기였다.
“그래, 알았다.”
아빠는 결국 내 쇠고집을 꺾는 데 실패하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곧바로 자리를 뜨는 대신, 아빠는 의자에 앉은 내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얘기하렴. 재능을 썩히면 안 돼. 그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품에서만 빛을 내는 법이란다.”
아빠를 허위 신고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대답 대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빠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바른 자세로 섰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우리가 명예를 지키는 방식이야. 크레페, 너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명예?
그 낯선 단어를 듣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이름이 들어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내게 한 말이라기보다 아빠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엄마를 보고 있던 아빠는 내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피식 웃었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칭찬이 늦었구나. 혼자 마법을 공부하다니 대단해. 앞으로도 기대하마.”
그리고 아빠는 곧 식당을 나가 어딘가로 향했다.
카눌레도 흥, 콧방귀를 뀌고 식당을 나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혼자 마법을 공부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크레페가 된 후에 따로 공부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공식도 전생에 배웠던 내용을 정리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전생에서 나는 한 번도 그런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공부는 내게 결승점 없는 마라톤 같은 것이었다. 계속 달려야 했고 멈출 수 없는.
억지로 레일 위에 올려진 내가 공부에 대해 고찰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크레페, 그만 들어가자. 마탑에는 아빠가 연락하실 거야.”
엄마가 나를 의자에서 내려주었다.
갈레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아빠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갈레트와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그래, 만일 내가 일곱 살에 엄마를 잃지 않는다면. 열 살에 갈레트 오빠를 잃지 않는다면.
마법을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