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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7)화 (7/181)

7화 

나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가 한쪽 무릎을 꿇어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나 갈레트와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날 향해 있었다.

밝은 금색의 수염이 햇빛에 반사되어 화사하게 반짝거렸다. 수염 사이로 그의 웃는 입매가 보였다.

“반갑구나. 내가 네 아빠란다.”

“아… 아빠.”

입속에서 그 단어를 웅얼거렸다. 그러자 그가 나를 안아 들고 목말을 태웠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의 머리를 꽉 붙잡았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이렇게 높이 올라온 건 처음이었다.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갈레트가 생긋 웃었다.

“수플레, 집을 좀 안내해 줄래요? 오랜만에 오니 기억이 안 나서.”

“아하하, 욕실부터 알려줄게요.”

엄마가 웃으며 앞장섰다.

나는 조금 진정한 후 내 팔을 잡은 아빠의 머리카락을 슬슬 만져보았다. 태양과 닮은 백금발이 사락거렸다.

엄마한테서 나던 햇빛의 향기는 어쩌면 처음부터 아빠 것이었을지도.

뒤늦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살포시 웃었다.

【 다섯 살의 사교계 데뷔 】

아빠는 여독을 풀기 위해 종일 잠에 들었고, 내가 다시 그를 만난 것은 다음 날 내 생일 파티에서였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아빠에게 욕실부터 안내한 이유를 깨달았다.

씻고 수염을 자르고 격식에 맞는 옷을 입은 아빠는 미남이었으니까.

“여전히 미남이시네요.”

“별말씀을요.”

“변방은 아직 위험한가요?”

“저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슈트루델국은 안전할 거예요.”

“몬스터들은 어때요?”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아닌 척하며 나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유가 궁금하진 않았다. 실내 파티장에서 목말을 타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당연히 시선이 몰릴 테니까.

“아, 아빠… 나 이쩨 내려주쩨요…….”

“괜찮겠니? 여기 사람들이 많아서 위험할 텐데.”

지금은 너무 부끄러워서 내 멘탈이 위험해요.

나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다행히 아빠가 금방 나를 내려주었다.

“마르크라고 했나? 우리 크레페 잘 부탁하네.”

“네, 네! 물론이죠! 영광입니다, 백작님.”

마르크가 있는 피낭시에 기사단은 물론 쉬제트 백작가 소속이었다. 막내 기사인 그에게 우리 아빠는 까마득한 상사일 테니 저런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허억, 백작님이랑 얘기했어!”

…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역시 이상하군.

“갠차나요?”

가쁜 숨을 들이마시는 마르크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마르크는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다시 근엄한 척 똑바로 섰다.

대체 아빠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러지?

나는 마르크에게 아빠에 대한 일을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와 대화하기 그리 좋은 때가 아닌 것 같았기에 그만두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가 크레페 0살 때부터의 일대기였다면 좋았을 텐데.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던 나는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기 위해 파티장 구석으로 슬슬 움직였다.

키가 작아서 몇 번 인파에 휩쓸릴 뻔하긴 했지만, 그때마다 마르크가 몸으로 길을 터주었다.

“휴우…….”

벽에 등을 기대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서 봐도 단상에 올라 있는 아빠의 화려한 머리색은 눈에 확 띄었다. 군인의 것 같은 흰 제복과 목 위까지 채운 단추도.

비쩍 마른 산적 같던 꼴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산적이라도 상관없다. 저런 미남이 산적이라면 나라도 따라갔…….

크흠, 실례.

“뭐 하냐?”

카눌레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의 옷도 아빠 것과 똑같은 제복이었지만 색깔은 그와 반대로 검은색이었다. 머리색과 맞춘 것 같았다.

쉬제트 가문을 상징하는 페가수스가 양각된 단추와 어깨에 달린 술, 부츠까지.

나름 갖출 것은 다 갖춰져 있었지만 그는 아직 여덟 살이었다.

아빠랑 커플 룩을 맞춰 입고 할로윈 파티라도 하는 것 같은 어색한 귀여움에 나는 당장이라도 웃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웃으면 카눌레는 분명 삐칠 거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대답했다.

“잠깐이나마 엄마의 심미안을 의심했떤 걸 반성하고 있었찌.”

“뭐라는 거야? 오늘 너 사교계 첫 데뷔 어쩌고 하지 않았어?”

“머…….”

나는 말을 흐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직 정식으로 소개되진 않았지만 아마 사람들도 내가 누구인지는 다들 알 거다. 사교계 데뷔를 아빠 목말을 타고 하다니, 크레페도 참.

음, 남 일처럼 말해도 민망함이 사라지진 않는군.

나는 헛기침을 하고 카눌레를 곁눈질했다.

모르긴 몰라도 카눌레 역시 내가 적잖이 부끄러웠을 거다. 그도 방금 전까지 파티장 구석에서 날 모르는 사람인 양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카눌레와 친하게 지내야 하는 내가 그런 사소한 걸 지적하고 있을 순 없지.

“갠차나. 이따 내 생일 발표 따로 한다 그랬쪄. 그리구 아빠 오랜만에 와쓰니까 인사하라고 해야지.”

“…잘났다.”

다섯 살짜리가 하기엔 너무 어른스러운 말이었을까?

카눌레가 입술을 비죽이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랬지만 카눌레도 이런 파티는 처음일 것이다.

나는 며칠 전 엄마가 한 말을 떠올렸다.

‘카눌레, 네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계속 피하기만 할 순 없다는 거, 알지?’

나와 카눌레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눌레는 내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지만 내 옆에서 떨어지지도 않았다. 역시 낯선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니까 싫어하던 나라도 의지하게 된 것 같았다.

후후, 뭔진 모르겠지만 이긴 기분이군.

말 안 듣는 고양이를 길들인 듯 때아닌 성취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대놓고 웃기엔 역시 카눌레가 삐칠까 걱정됐기에,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빠한테 그건 보여줘써?”

아빠는 아직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대답을 재촉하며 카눌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카눌레가 ‘그게’ 뭐냐 묻지도 않고 옷 주머니를 뒤적여 내가 며칠 전에 건네준 쪽지를 꺼냈다.

“이게 뭔데?”

“아빠한테 보여쭈라니깐.”

“이런 낙서를 내가 왜…….”

카눌레는 불만스러운 듯했으나, 그 쪽지를 버리지 않은 것만 봐도 그것이 카눌레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만은 분명했다.

“무슨 얘기 해?”

갈레트가 우리 사이에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카눌레가 깜짝 놀라 쪽지를 떨어뜨렸다.

갈레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그가 아빠를 꼭 닮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감탄했다.

머리색이랑 눈색 때문인가? 어쩌면 아빠랑 비슷한 제복을 입고 있어서일 수도. 아니면 올백으로 머리를 넘겼기 때문일지도.

“왜? 그게 뭔데? 응?”

갈레트가 대답을 보챘다.

하지만 저런 옷을 입고 이렇게 촐싹거리는 건 별로 안 어울리는구나.

“저리 가.”

메모를 주워 든 카눌레가 갈레트에게 손을 훠이 저었다. 지금만큼은 나도 카눌레와 같은 마음이었다.

갈레트는 우리 셋 중 유일하게 사교계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는 학교까지 들어갔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학교의 평균 입학 연령은 열다섯, 적어도 열세 살 정도였다. 열 살에 입학시험을 보고 합격한 갈레트는 꽤나 유명 인사였다.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어머, 저기 있는 아이들이 쉬제트 백작가의 남매들인가 봐요.”

“다들 세트로 맞춰 입었네, 귀여워라.”

“여자애는 아까 백작님 어깨에 올라타고 있던 아이죠?”

움찔.

결국 듣고야 말았다.

난 슬쩍 옆으로 자리를 옮겨 사람들 사이에 섞이려고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통통한 애한테 저렇게 프릴이 가득 달린 드레스를 입히다니. 멀리서 보고 백작님이 모자를 쓴 줄 알았다니까요?”

“아하하, 저도요!”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잔뜩 부풀린 프릴 드레스가 보였다. 사실 나도 웃기는 꼴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도 처음부터 이 옷을 입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원래는 내 옷도 오빠들과 같은 제복이었다.

그런데 저 망할 옷에 단추가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도저히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사이즈를 조절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고 했다.

그 와중에 뒤뚱거리다가 실수로 한 번 넘어졌더니 옷이 뜯어졌다.

대체 옷을 왜 그렇게 딱 맞는 크기로 만든 거야?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크는 법인데.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어차피 십 년만 지나면 나는 절세미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의기소침해질 필요 없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악!”

비명을 듣고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를 비웃던 사람이 정강이를 부여잡고 있었다.

어느새 그 앞에 선 카눌레가 신발코를 바닥에 툭툭 두드렸다.

멍청히 그 모습을 보던 내 눈앞을 갈레트가 가로막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크레페, 저쪽에 생일 케이크 먹으러 갈까? 마시멜로도 있더라!”

그러고 갈레트는 내가 돌아볼 수 없도록 몸으로 내 시야를 막았다.

물론 나는 허리만 숙이면 충분히 그 너머를 볼 수 있었고, 아빠나 엄마한테 달려가 울며 매달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웅! 마시멜로 먹을래!”

내가 환히 웃자 갈레트도 날 보며 마주 웃었다.

그 이후 메인 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옆 홀에 나열된 간식을 먹고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메인 홀에 돌아왔을 땐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파티 호스트를 은근히 비웃던 귀족도, 부모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갈레트가 물었다.

“왜 그래?”

“작은오빠는 어디 갔쪄?”

“…자꾸 카눌레만 찾네? 내가 학교 때문에 신경 많이 못 써줘서 그래?”

자꾸라고 할 만큼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갈레트는 대놓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위로해 주길 바라는 심보가 훤히 보였다.

그래도 모르는 척해 줘야겠다.

“그런 거 아니야. 아까 얘기하다가 나왔짜나.”

나는 까치발을 하고 갈레트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갈레트가 감동받은 얼굴로 나를 꽉 껴안았다.

마침 인파 사이를 뚫고 카눌레가 다가왔다.

“사람들 많을 땐 참아주면 안 돼?”

“어떻게 참아! 크레페가 이렇게 귀여운데!”

“…….”

마음 같아서는 나도 참아달라고 한마디 거들고 싶었지만, 이미 사람들 눈에는 띌 만큼 띄었다.

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카눌레도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듯 내게 말했다.

“아, 아빠한테 그 쪽지 줬어.”

“앗, 진짜? 아빠가 뭐라고 했쪄?”

“그냥 좀 놀라신 것 같던데……. 그리고 이따 얘기하자고 하셨어.”

그랬구나.

나는 안도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눌레도 갈레트도 이 대화의 방향을 못 잡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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