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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6)화 (6/181)
  • 6화 

    “에휴, 저 짜람들을 온제 다 만나냐.”

    “네? 다 안 만나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마르크가 내 혼잣말에 대답했다.

    나는 흥, 콧바람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래도 어떠케 그래요. 내 생일을 추카해 주러 온 건데.”

    “허어… 정말 어른스러우시네요.”

    나는 막 태어났을 때부터 어른스러웠으므로 그 말이 딱히 칭찬으로 들리진 않았다.

    나는 마르크의 감탄을 못 들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부터 인사 나누시려고요?”

    사서 고생하기는 싫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마르크가 다시 물었다.

    “그럼 도망가시려고요?”

    다섯 살이 가긴 어딜 가나.

    재차 고개를 젓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 디저트를 먹으러 가시는 건가요?”

    마르크의 다음 질문에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네. 근데 나 그러케 알기 쉬워여?”

    마르크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내 호위기사가 된 지는 겨우 삼 일밖에 되지 않았다.

    파티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착하고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에이미는 내 몫의 디저트를 미리 빼놓고 있었다.

    나는 블루베리 파이 한 조각을 들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식당이나 정원의 정자에서는 모르는 사람과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내 비밀 아지트인 도서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낙서쟁이. 또 낙서하러 왔냐?”

    “…간식 먹으러 왔쪄.”

    “더 심하네.”

    카눌레가 짧게 대꾸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내게 별 관심 없는 듯 계속 책만 보고 있었다.

    전에 얘기가 나왔듯이 갈레트는 올해부터 학교에 다니느라 예전만큼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눌레는 갈레트의 주도 없이 나를 보러 올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카눌레와 단둘이 있는 것도 엄청 오랜만이었다.

    아니, 처음인가?

    카눌레의 호위기사와 내 호위기사가 있긴 했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단둘이 보는 건 처음인 것 같기도.

    사실 나는 아직 카눌레가 조금 어색했다.

    카눌레 때문에 원작의 크레페는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수없이 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카눌레는 악역이었고, 모든 사달의 원흉 같은 존재였다.

    어쩌면 갈레트가 죽은 것도 카눌레 때문이었을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카눌레를 멀리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굳이 『내 인생 공략집』을 적을 이유도, 엄마와 갈레트의 죽음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미래를 바꿔서 엄마랑 갈레트를 살릴 수 있다면, 카눌레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도울 수도 있지 않을까?

    모처럼 찾아온 이 역사적인 순간을 그냥 넘길 순 없었다.

    나는 블루베리 파이를 카눌레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게는 조금 높은 의자에 올라가기 위해 팔꿈치를 대고 버둥거렸다.

    “오, 오빠, 나 쫌 도아주라.”

    “내가 왜?”

    망할 놈.

    나는 욕설을 삼키고 입술을 씹었다. 다행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마르크가 날 들어 의자에 앉혀주었다.

    나는 마르크에게 고갯짓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파이에 포크를 꽂았다.

    “…….”

    그러나 파이 조각을 바로 입에 넣진 않았다. 나는 망설이는 척 카눌레를 흘끗 바라보았다.

    카눌레는 별 반응 없이 다음 장을 넘겼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날 신경 쓰고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나는 겨우 다섯 살짜리 꼬맹이였다. 꼬맹이는 귀엽다. 심지어 나는 친동생이었다.

    비록 외모는 별로 안 닮아 있었지만, 적어도 카눌레는 갈레트를 따르긴 했다. 그럼 내게도 약간의 호의는 있겠지.

    게다가 난 꼬마니까! 꼬마는 귀여우니까!

    중요한 것은 몇 번이고 강조해야 한다.

    나는 고민하는 척 한참 끙끙거리다가 카눌레에게 포크를 내밀었다.

    “오, 오빠… 먹을래? 나, 나는 갠차나. 오빠 머거.”

    “…….”

    그러자 드디어 카눌레에게서도 그럴싸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곧 읽던 책을 덮었다.

    고맙다고 하겠지? 귀엽다고 생각하겠지? 나중에 날 배신한다거나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하는 일은 생각도 못할 거야!

    그러나 카눌레는 포크를 받아 드는 대신 의자에서 폴짝 내려갔다. 그리고 내 뒤에 있던 마르크에게 말했다.

    “크레페가 뭘 잘못 먹었나 봐요. 기사단에서 짤리기 싫으면 잘 좀 감시해요.”

    그러고 그는 책을 든 채 유유히 도서관을 나갔다.

    내가 배신감을 느끼고 손을 떨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감히 블루베리 파이를 거절하다니!

    * * *

    “오빠아아!”

    내가 저에게 달려드는 것을 본 카눌레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내가 달라붙기 직전에 휙 몸을 틀어 피했다.

    그에게 안길 뻔했던 나는 그대로 넘어졌다. 아니, 넘어질 뻔했다. 마르크가 나를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무릎이라도 까졌을 것이다.

    “안 바쁘냐?”

    “바빴찌만 오빠 보러 왔찌!”

    “쯧.”

    카눌레는 내 애교 있는 말에도 혀 차는 소리만 들려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갈레트가 상대였다면 1 포옹에 2 쓰다듦 3 비비적쯤은 얻어냈을 텐데, 난이도 차이 너무 심하잖아, 이거.

    하지만 나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엄마가 암살당하기까지 앞으로 겨우 2년이었다.

    갈레트가 학교에 익숙해지면 다시 나한테 들러붙을 테고, 어쩌면 내가 카눌레와 친해질 기회는 영영 없을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저 얼음 왕자의 마음을 열고야 말리라.

    이번에도 카눌레는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나도 카눌레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글을 깨치기 전부터 마법서 같은 것을 끼고 다녔던 그는 여전히 마법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저찌, 에이미한테 가서 달고나 우유 좀 가따 주면 안 때요?”

    “예? 하지만…….”

    “여긴 도서관이구, 오빠네 기사님도 있짜나요. 갠찮을 거예요.”

    마르크가 망설이다가 도서관의 문을 지키고 있던 카눌레의 호위기사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금방 다녀오겠다며 도서관을 나갔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달고나를 만들려면 적어도 10분은 필요하다는걸.

    손쉽게 마르크를 떼어낸 나는 품에서 『내 인생 공략집』을 꺼냈다. 이번에는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읽기 위해서였다.

    [카눌레 드 보흐도 쉬제트. 쉬제트 백작가의 차남이자 나와 세 살 차이 나는 오빠.

    마법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원작에서는 그런 얘기 없었음.]

    역시, 다시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마법이 등장하긴 했지만 주요 인물 중에 마법을 쓴다고 언급된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남자 주인공인 황태자와 그의 심복.

    확실한 건 원작의 카눌레는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의 카눌레는 마법에 관심을 갖고 있을까?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추려볼 수 있었다.

    원작의 카눌레도 어릴 땐 마법을 좋아했지만 크면서 현실적으로 마법을 배울 수 없었다거나, 원작에서는 마법에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크레페가 된 이번 생에서는 마법에 관심이 생겼다거나.

    객관식이지만 굳이 정답을 찾아낼 필요는 없겠지.

    내게 중요한 건 세 가지였다.

    카눌레가 지금 마법에 관심이 있다는 것과 이대로 가면 그는 마법사가 될 수 없다는 것,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세 번째.

    나는 그를 마법사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오빠, 마법 쪼아하지?”

    내가 작게 속삭였다. 카눌레는 ‘이 쪼그만 것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카눌레가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줄 것을 확신했다.

    나는 그에게 몰래 쪽지 한 장을 건넸다.

    “내일 아빠 오시면 이거 보여줘. 아랐지? 오빠가 썼다고 하구.”

    “무슨 소릴…….”

    “아가씨! 다녀왔습니다!”

    몽실몽실한 달고나를 올린 컵을 들고 마르크가 돌아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박수를 치며 그의 귀환을 환영했다.

    * * *

    내 생일 파티 하루 전, 우리는 꼬까옷을 입고 앞뜰에 정렬했다. 아빠가 도착하기로 한 날이었다. 갈레트는 학교까지 쉬었다.

    “아빠!”

    멀리에 사람들이 보였다. 갈레트가 제일 먼저 튀어 나갔다.

    그들의 가운데 개선장군처럼 말에 올라 있던 남자가 내려와 갈레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서 남자는 엄마와 나, 카눌레를 향해 곧장 걸어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이 더했다.

    남자는 수염이 덥수룩했기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갈레트와 나처럼 금발에 보라색 눈인 것을 보면 아빠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수플레, 고생 많았습니다.”

    아빠는 제일 먼저 엄마를 부드럽게 안고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엄마가 환히 웃으며 아빠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가 할 말을요, 프랄린.”

    그리고 열렬한 키스가…….

    나는 왠지 민망해져서 엄마의 치맛자락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갈레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물을 훔쳤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지? 파티가 끝나면 다시 헤어져야 하지만.”

    아빠는 이제 엄마의 바로 옆에 있던 카눌레를 껴안고 뺨에 키스를 퍼부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갈레트의 말처럼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었다.

    카눌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어서 꼭 친부인 척하는 유괴범이 카눌레에게 뽀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레트는 내 감상에 동의하지 않는 듯 그들 무리에 섞여 아빠의 허리를 안았다.

    아빠가 갈레트와 카눌레를 동시에 껴안았다.

    카눌레의 표정이 그의 몸에 가리자 그제야 나도 이 광경이 아름답다는 데 공감했다.

    응. 나만 빼면 참 아름다운 가족이구나.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엄마가 다시 인사했다. 아빠가 그제야 가족들 간 감동의 포옹을 끝내고 똑바로 섰다.

    “우리 기사단 덕이죠. 그리고 저기는…….”

    “아, 아녕하쎄요.”

    아빠의 시선 끝에 있던 내가 뒤늦게 인사했다. 손에 식은땀이 나서 나는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크레페예요! 귀엽죠?”

    갈레트가 끼어들었다.

    아빠는 대답하지 않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전생에서도 나는 아빠가 없었다.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환상을 가질 틈도 없었다.

    게다가 내게 생긴 첫 아빠라는 게 저렇게 얄상한 얼굴에 수염은 덥수룩하고 어깨는 떡 벌어진 데다 눈망울은 선한, 괴이한 조합의 사람일 줄도 몰랐다.

    “크레페?”

    “네, 넵.”

    그가 내 앞에 섰다. 내 키가 작은 탓도 있겠지만 그는 마치 장승처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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