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5)화 (5/181)

5화 

내가 그녀를 올려다보자 엄마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다섯 살이 먹기에는 너무 뜨거운데. 어쩌다 이렇게 어른스럽게 자란 걸까. 일부러 공부도 안 시켰는데 말이야. 지난번에는 에이미한테 커피 얘기도 했다며? 매일 카눌레랑 같이 도서관에 가고.”

“…….”

나는 고개를 들고 엄마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녀의 그런 반응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 낯설기만 했다.

일류 대학만 대학, 1등급만 성적 취급을 했던 전생의 엄마와 보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저랑 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 내가 도서관에 갈 때마다 쟤가 와 있는 거라고요.”

카눌레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툴툴거렸다.

“게다가 매일 이상한 낙서나 하고 있다니까요? 제대로 된 책을 읽는 걸 못 봤어.”

“그래, 차라리 낙서라도 하고 놀아. 벌써부터 머리 아프게 공부할 필요 없어. 어차피 나중에 학교도 갈 테니까. 알았지?”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눌레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대답을 들었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그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비밀인데, 사실 카눌레는 다섯 살에 글을 읽을 줄도 몰랐다? 똑똑한 척하느라 매일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상하게 항상 거꾸로 들고 읽더라고.”

“엄마! 다 들리거든요!”

“아하하!”

엄마가 까르르 웃었다. 갈레트도 웃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보던 나도.

* * *

“아무튼 너희가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크레페 생일 파티는 보름 후에 열 테니까 알아둬. 갈레트는 학교 친구를 불러도 되고.”

“안 불러도 되죠?”

“뭐… 마음대로 하렴.”

엄마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카눌레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우리 귀여운 크레페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어!’라는 거지?”

“역시 너도 동의하는구나?”

“형 생각을 맞혀본 것뿐이거든?”

갈레트와 카눌레가 아웅다웅했다.

“그런 거라면, 안타깝게도 실패야.”

엄마가 손짓으로 그들을 말리고는 덧붙였다.

“이번엔 오랜만에 아빠가 올라오시거든. 그래서 크레페 생일 파티도 그날로 미룬 거고. 이번에 아빠 환영식을 겸해서 사람들을 잔뜩 초대하기로 했어. 며칠 후에는 다시 변방으로 떠나셔야 하지만…….”

“아빠가요?”

갈레트가 엄마의 말도 끊고 눈을 반짝였다. 엄마는 화난 기색 없이 싱긋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래. 그러니까 너희가 크레페 잘 챙겨줘야 돼. 크레페는 아빠를 보는 것도 처음이고 사교계에 소개되는 것도 처음이니까.”

“엄마, 크레페는 겨우 다섯 살인데요. 저도 아직…….”

“카눌레, 너도 이제 여덟 살이잖아. 크레페랑 같이 소개해 줄게. 네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계속 피하기만 할 순 없다는 거, 알지?”

“…….”

카눌레가 불만이 있다는 걸 과시라도 하듯 입술을 삐죽였다.

분위기가 불편해지려는 것을 갈레트가 중재했다.

“네, 제가 둘 다 챙길게요.”

“그래, 고맙다. 갈레트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엄마는 영지 관리하느라 바쁘시잖아요.”

“미안해. 물어볼 게 있으면 에이미랑 상의하렴.”

엄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직 스콘도 남았는데.

“벌쪄 가요?”

“벌쪄가 아니라 벌써.”

바른말 수호자인 카눌레가 어김없이 끼어들었다. 물론 나는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혀가 짤바서 그래!”

엄마가 풋, 웃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희는 더 놀다가 들어가렴. 나는 재판이 남아있어서 가봐야 돼. 혹시 파티 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네!”

갈레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엄마는 마치 햇살 같은 미소를 짓고는 집무실로 돌아갔다.

“…….”

방금 전까지도 화기애애하던 정자의 분위기가 적막해졌다. 갈레트가 고개를 숙인 카눌레에게 물었다.

“왜 그래?”

“형은 아빠 기억나?”

“나는 아빠한테 편지도 자주 쓰잖아. 너랑 크레페도 쓰지 않았어?”

“쓰라고 해서 쓴 거지, 뭐…….”

카눌레가 말을 흐렸다. 역시 그것 때문인가.

아까도 그랬지만, 아빠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반겨했던 건 큰오빠인 갈레트뿐이었다.

나는 아빠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고, 추측건대 카눌레도 아빠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듯했다.

웬만하면 나도 여기서 끼어들어 불효자네, 매정하네 같은 소리로 카눌레를 도발했겠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아빠에게 보낸 편지도 ‘아빠, 크레페예요. 사랑해요.’ 같은 영혼 없는 메시지밖에 없었으니까.

참고로, 그나마도 갈레트의 편지를 베껴 적은 것이었다.

아빠는 산적과 야만인, 몬스터를 토벌하러 변방에 나가 있었는데, 몇 년에 한 번이나 겨우 돌아올 만큼 여유가 없는 듯했다.

“스콘 아직 남았죠? 클로티드 크림이랑 잼 더 가져왔어요.”

그때 에이미가 트레이를 끌고 정원을 가로질러 왔다. 나는 방금 전까지 착잡해하던 것도 잊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와아앙!”

“하하, 역시 부족할 줄 알았어요.”

웃으며 다가온 에이미가 테이블에 작은 종지와 함께 새로 구운 스콘도 몇 개 더 내려놓았고,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지켜보았다.

“지짜 대다내요! 에이미는 엄마 돕눈 것만으로도 바쁘 텐데 요리할 찌간이 나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에이미가 싱긋 웃었다.

그녀는 엄마를 도와 집의 관리를 맡고 있는 총책임자로 요리는 취미라고 했다.

아마 내 파티 준비로 그녀도 바쁘겠지만, 나는 차마 무리하지 말라는 기특한 소리는 할 자신이 없었다.

이 세계에 태어나서 제일 만족스러운 게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매일같이 이어지는 티타임! 그리고 디저트!

“꺄아아!”

나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콘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바보는 단순해서 좋겠다.”

카눌레가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은요?”

그릇을 다 내려놓은 에이미가 두리번거렸다.

“엄마는 집무실로 돌아가셨어요. 에이미도 가도 돼요.”

갈레트가 대답해 주자 에이미가 웃으며 목례하고 자리를 떠났다.

갈레트 오빠도 참, 어떻게 저렇게 착하고 싹싹한 애로 컸을까.

나는 클로티드 크림을 듬뿍 바른 스콘을 입에 넣고 뿌듯한 얼굴로 갈레트를 바라보았다.

내 표정의 이유를 오해한 카눌레가 말했다.

“그렇게 맛있냐?”

“먹어보면 알쟈나.”

“참 나. 아마 크레페 너는 태어나서 처음 말한 것도 케이크였을걸.”

“내가 처음 말한 거?”

그러고 보니 뭐였더라.

나는 스콘을 입에 물고 문득 과거를 돌아보았다.

“나 기억나. 앙흐 쉐보렌. 이거였어.”

갈레트 오빠가 먼저 말했다.

“…….”

얼굴이 뜨거워졌다.

기억났다. 그때는 슈트루델어(語)에 대해 하나도 몰랐을 때였지.

카눌레 오빠가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동생 예쁘다? 그거 형이 먼저 얘기한 거지.”

“그럼, 물론이지.”

오빠.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민망하니까 그 표정 그만둬 주지 않을래?

* * *

“…이쪽 뽀지 말아줄래여?”

“예, 예.”

마르크가 더듬거리며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내가 폭 한숨을 내쉬고 다시 펜을 들었다. 그리고 공책에 오늘의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내가 크레페가 되기 직전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를 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이제 5년이나 전 일이었다.

당연히 사소한 문구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내 인생 공략집』은 대략적인 연표만 써놓은 것으로 완결이었고, 이제 남은 페이지는 개인적인 일기를 쓰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만난 사람의 이름이나 사건 같은 것을 적어놓으면 나중에 새로 기억해 낼 것이 생길 때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오늘의 일기에서 주인공을 맡게 된 것이 바로 내 침대 옆에 서 있는 마르크였다.

[마르크. 내 다섯 번째 생일 파티를 맞아 임시로 고용된 호위기사.

쉬제트 백작가의 피낭시에 제2기사단 일원이라고 함.

날 매우 신기하게 쳐다봄.]

나는 잠시 펜을 멈추고 마르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갈색 머리’라는 글을 추가했다. 나이는… 스물 정도 되나?

일단 이름이 디저트가 아닌 걸 보면 이 사람도 에이미와 마찬가지로 엑스트라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나는 정보 수집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 아나? 나중에 이런 정보가 필요하게 될지도.

“아저찌.”

“저, 저 말입니까?”

“네, 마르크 아저찌. 새 사람이에요?”

“예?”

“새로 기사가 된 사람이냐꾸요.”

“아, 예. 신입입니다. 그래도 3년은 됐지만요. 열일곱이면 빨리 입단한 편이죠. 아… 입단이 뭔지는 아십니까?”

“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단어였지만 문맥을 맞추면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질문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내 인생 공략집에 몇 줄을 추가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글을 쓰지는 못했다. 마르크가 자꾸 내 공책을 기웃거렸기 때문이었다. 이쪽 보지 말라니깐, 사람 신경 쓰이게.

“에휴.”

나는 한숨을 내쉬고 공책을 덮었다. 마르크가 그제야 저 때문인 것을 눈치채고 자세를 똑바로 했다.

“아, 죄송합니다.”

“돼써요.”

일기는 침대 옆에 있는 협탁에 내려놓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갓난아기일 때보다는 나았지만 아직 어린애라 잠이 많을 나이였다.

빨리 자고 쑥쑥 커야지. 이왕이면 카눌레 오빠보다 커져서 오빠를 내려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야무진 꿈을 꾸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바로 잠에 들 수는 없었다.

“저, 근데 진짜 다섯 살이십니까?”

“네에.”

“허어, 정말 대단하시네요. 제 동생도 세네 살쯤 되는데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거든요.”

“…….”

시끄럽다.

“그래도 어찌나 귀여운지 모른다니까요. 저랑 나이 차가 많이 나서 그런지 꼭 제 아들 같고…….”

“아저찌.”

“아, 예.”

“방에 불 좀 꺼주쩨요.”

내가 말을 끊자 마르크가 실례했다면서 뻘쭘하게 웃었다. 그리고 방을 밝히고 있는 마법등 하나하나를 건드려 불을 끄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 놨던 공략집을 펼쳐 한 줄을 추가했다.

[동생 있고 말 많음.]

마침 온점을 찍은 것과 동시에 마지막 등이 꺼졌다. 마르크는 내 수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방 밖으로 나갔다.

휴, 이제 좀 조용하겠군.

* * *

내 생일 파티가 다가올수록 쉬제트 백작가에 모르는 얼굴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초대객 중 멀리 사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며칠 머물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백작가는 어지간한 성만큼 넓었기 때문에 그들을 마주칠 일은 적었지만, 그간 읽은 판타지 소설에 비추어보면 내 생일에는 어마무시한 숫자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으으, 벌써부터 도망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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