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나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유자 타르트를 손으로 들었다.
부스러기가 떨어질까 쟁반에 대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바삭한 소리와 함께 꾸덕한 필링이 윗니에 달라붙었다.
진한 크림치즈 맛과 유자 향이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유자 타르트 한 개가 사라졌다.
미니 사이즈였지만 아직 다섯 살인 나에게는 큼지막한 디저트였는데…….
“에휴… 왜 맛있는 건 이러케 빨리 사라지는 거지?”
한탄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카눌레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네가 먹어서 그런 게 아닐까?”
“…….”
맞는 말이니까 뭐라 하기도 그렇고.
나는 상종하질 말아야지 싶어 고개를 젓고 다시 펜을 들었다.
한참 동안 내가 글을 쓰는 소리와 카눌레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 갈레트가 내 옆자리에서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디저트 먹으면서 책 보기.
혹자는 다시 태어나서도 똑같은 취미 생활을 하는 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하는 일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쓰는 중이었으니까.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내 새로운 인생의 공략집을.
“크레페 아가씨, 부탁하신 우유 가져왔어요.”
“꼬마워요, 에이미!”
그러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에이미가 트레이를 끌고 도서관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흥분해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크레페, 위험하잖아.”
갈레트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서둘러 내 몸을 꽉 붙들어주었다.
“헤헤. 미앙해, 오빠.”
“뭘. 안 다쳤으면 됐지, 우리 동생.”
갈레트가 내 정수리에 뺨을 비비고는 날 놓아주었다.
에이미가 흐뭇하게 웃으며 우유가 든 잔을 우리 셋 앞에 놓았다.
“전 안 마셔요.”
카눌레가 짧게 말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책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엄마뻘의 아주머니에게 저따위로 버릇없는 태도라니, 역시 미래의 악역.
“다시 가져갈까요?”
“괜차나여! 오빠가 안 마시면 내가 두 잔 마시묜 대지!”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에이미도 별말 없이 트레이를 끌고 돌아갔다.
카눌레가 언짢은 듯 날 곁눈질하고 쯧, 혀를 찼다.
갈레트가 계속 달그락거리던 컵과 숟가락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 정도면 돼?”
“웅! 힘들었쯜 텐데 고생했져! 우유 줘바.”
갈레트가 조심히 우유 잔을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갈레트가 10여 분 동안 열심히 저어 만든 달고나를 조심스럽게 떠서 우유 위에 얹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갈레트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오오오.”
“헤헤. 오빠가 한 고야. 대다내!”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내 우유 잔에도 달고나를 얹었다.
갈레트가 제 잔을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커피는 처음이야. 넌 이런 외국 음료를 어디서 알았어?”
“책에서. 자, 다움!”
곤란한 질문은 넘기고 카눌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눌레는 나를 힐끔 보고 다시 책을 읽었다.
“오빠는 먹기 시러?”
“커피는 쓴 음료야. 네가 본 책에 그런 정보는 없었나 보지?”
“걱쩡 말라니깐!”
나는 의자를 밟고 일어나 책상에 무릎을 얹고 카눌레의 우유를 내 앞까지 끌고 왔다.
갈레트가 내 의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카눌레는 돕지도 않고 쯧, 혀를 찼다.
“책에서 읽긴 무슨. 맨날 낙서만 하고 있는 게.”
누구 좋으라고 하는 짓인데.
순간 울컥했지만 애써 참았다.
신체 나이는 다섯이었지만 정신 연령은 갈레트보다도 위였다. 여덟 살짜리 카눌레 정도야 조금 까칠한 고양이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고 카눌레의 잔에 달고나를 얹었다.
사실 ‘낙서나 하고 있는 게’라는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실제 낙서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일 만은 했다.
내가 지금 집필하고 있는 『내 인생 공략집』은 한글이었으니까.
공책에 적은 것은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등장인물과 줄거리 겸 독자 서평이었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자면 예언서이기도 했다. 앞으로 이 세계와 정치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적은 물건 말이다.
그러니 절대 다른 사람에게 걸리면 안 됐다. 누구에게라도 들키면 나는 곧바로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어야 할 판이었다.
음, 이 세계에도 무당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와, 이거 맛있다!”
갈레트가 일찌감치 한 모금 마시고 감탄했다.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카눌레에게 잔을 밀어 달고나 커피를 건네주었다.
“자, 머거바.”
망설이던 카눌레가 잔을 제 앞으로 끌고 갔다. 갈레트는 그새 우유를 원샷 하고 없는 꼬리라도 흔들듯 나를 보챘다.
“이거 더 만들 수 있어? 커피랑 설탕이랑 물이랑 한 움큼씩 넣으면 더 빨리 돼?”
“안 때. 오빠 벌쪄 팔 아프지 않아? 마니 하면 거뿜이 더 안 나! 분명 실패할 꺼야.”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갈레트가 풀이 죽었다.
참고로 한꺼번에 많이 만들려다가 실패한 건 내 전생의 경험담이었다.
게다가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달고나 커피를 먹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인스턴트커피가 겁나 비싸더라.
전생의 일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살았던 나는 당연히 커피콩보다 가공된 원두가 더 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이미에게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크게 놀랐다.
그것도 내가 커피를 아는 것보다 가공된 커피, 그러니까 커피 파우더를 아는 것에 더 놀란 듯 보였다.
알고 보니 내 전생에서는 당연했던 기계 공정이 이 세계에서는 전부 마법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라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대의 과학기술은 마법을 빼면 중세의 유럽 정도였으니까.
“…….”
“카눌레, 너 그거 안 먹을 거면 나 주라.”
“…먹을 거야.”
갈레트가 카눌레의 몫을 눈독 들이자, 지기 싫어하는 카눌레가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눌레는 편식이 심해서 엄마한테도 매일같이 혼났다.
그는 내가 사약이라도 준 것처럼 날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책을 내려놓았다.
이따 마셔도 됐겠지만, 카눌레는 갈레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천천히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꿀꺽.
“어때? 맛없지? 나 마셔도 돼?”
갈레트가 대답을 재촉했다. 서투른 유도 신문 같은 질문이었다.
카눌레가 짧게 대답했다.
“안 돼. 내 거야.”
참 흐뭇한 광경이로군.
오늘도 착한 일을 하나 했다.
두 오빠에게 씁쓸하고 달고 부드러운 맛의 신세계를 알려준 나는 내 몫의 달고나 커피를 마시며 머랭 쿠키를 입안에 넣었다.
단거, 단거, 거기에 단거. 최고!
나를 질린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카눌레가 한마디 했다.
“너 살쪘어.”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살찐다’였던 게 어느새 과거형이 되어 있었다.
나는 문득 손을 들어 내 뺨을 눌러보았다. 포동포동했다. 배를 내려다보았다. 볼록했다. 팔뚝을 쳐다보았다. 오동통했다.
하지만 난 겨우 다섯 살이라구!
나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내가 쓴 『내 인생 공략집』을 탕탕 치며 말했다.
“걱쩡 마! 십 년만 이쓰면 난 엄쩡난 미인이 될 거니깐!”
카눌레가 허언증 환자라도 본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빈말이 아니라 딱 십 년 남았다. ‘하루만 못생겼으면 좋겠다’고 절규할 만큼 경국지색의 미인이 될 날이.
옆에서 갈레트가 내 머리를 끌어안고 우는소리를 했다.
“아냐, 왜 그런 말을 해? 우리 크레페는 벌써 엄청난 미인이라고! 저런 말 듣지 마, 크레페. 카눌레가 뭘 몰라서 그래!”
갈레트의 이런 반응도 근 5년이나 겪어서 익숙했다.
나는 내 머리에 매달린 갈레트를 무시하고 손을 뻗어 머랭 쿠키를 입안에 넣었다. 옴뇸뇸.
날씨 좋다.
부속 건물이 몇 채나 있는 거대한 집에 개인 도서관까지. 쉬제트 백작가는 두말할 필요 없는 대귀족이었다. 권력과 부를 동시에 갖춘 세도가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집에 공원만 한 정원이 있는 것도, 그 정원 한가운데에 티타임을 가지며 쉴 수 있는 정자가 있는 것도 당연했다.
정자 기둥을 타고 올라간 등나무 덩굴과 화사하게 핀 연보라색 등나무꽃, 부드럽게 불어오는 봄바람과 휘날리는 꽃잎.
한 손에는 블렌딩한 허브차에 다른 손에는 초코 스콘까지.
“여기가 천꾹이꾸나.”
“크레페, 할머니 같아.”
옆자리에 앉은 갈레트가 풋,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쌀쌀한 봄기운을 따뜻한 차가 눌러주었다.
“으으음.”
황홀감에 어깨를 떨었더니 갈레트가 외투를 벗어주었다.
“아, 아냐. 안 쭈워.”
“그래도 입고 있어.”
“형이나 똑바로 입어. 얼마 전엔 감기 걸렸다고 생난리를 피워놓고.”
막 정자에 도착한 카눌레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말했다. 갈레트가 그를 발견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난리는 학교 가기 싫어서 피운 것이었음을.
나는 그때의 갈레트가 내 방 침대 기둥에 매달려 ‘크레페에에! 나 학교 가기 싫어어! 우리 동생을 두고 어떻게 나가아아!’라고 징징댔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카눌레는 갈레트가 진짜 아팠던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갈레트가 망설이다가 제 외투를 도로 입었다.
카눌레가 자리에 앉아 갈레트의 부자연스러운 태도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갈레트의 체면을 생각해 모르는 척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다들 빨리 왔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나타났다. 오늘은 가족끼리 티타임을 가지기로 한 날이었다.
자리에 앉은 엄마가 인사를 대신해 갈레트에게 말을 걸었다.
“학교는 다닐 만해?”
“네. 괜찮아요.”
“다행이네. 크레페 침대에 매달려서 감기니까 학교 보내지 말아달라고 징징댔던 게 엊그제 같은데.”
“…….”
카눌레가 갈레트를 쳐다보았다.
갈레트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뒤늦게 진상을 알게 된 카눌레가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이런이런, 이래서야 내가 모르는 척해 준 보람이 없구만.
“크흠. 아무튼, 오늘 모인 거 크레페 때문이죠?”
갈레트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돌렸다. 엄마가 빙긋 웃었다.
“맞아. 생일이 지났는데 파티를 아직 못 했잖아. 크레페, 이제 몇 살인지 말해 볼래?”
“다섯 짤이요.”
엄마가 두세 살 아기한테나 할 법한 질문을 했다.
내가 싱긋 웃으며 한 손을 쫙 펴고 대답하자 엄마가 흐뭇해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반응이라면 어린아이인 척(실제로도 아이이긴 했지만)하는 것도 할 만하구만.
“귀여운 척하냐?”
“크레페는 원래 귀여워.”
카눌레와 갈레트의 일갈은 언제나처럼 못 들은 척하자.
내가 차를 또 한 모금 마셨다.
엄마가 손을 뻗어 내 잔을 만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