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3)화 (3/181)
  • 3화 

    “그럼 이제 봐쯔니까 됐쬬? 저 공부하다 와서 가바야대요.”

    그러고 카눌레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등을 돌렸다.

    에이미가 카눌레를 붙잡아야 할지 망설였다.

    엄마는 고개를 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카눌레의 저런 태도가 익숙한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제가 잘 돌볼게요.”

    갈레트가 말했다. 하지만 의젓한 말과 달리 그는 내 볼따구니를 쿡쿡 찌르며 놀고 있었다. 카눌레가 돌아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에이미. 부탁할게요.”

    엄마가 나를 에이미에게 넘겼다.

    에이미가 나를 안아 들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엄마는 지친 듯한 걸음으로 내 방을 나갔다. 갈레트는 여전히 엄마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우리 동생, 누구 닮아서 이렇게 이뻐? 응?”

    이건 갈레트한테도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고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영원할 것 같아도 변하긴 하는구나.

    나는 새삼 깨닫고 감탄했다. 눈에 뵈는 것도 없었던 내가 어느덧 손으로 물건을 잡을 수도, 던질 수도, 이로 깨물 수도, 팔다리로 기어갈 수도 있게 되었다. 심지어 걸음마까지!

    “옳지, 옳지!”

    큰오빠 갈레트가 앞에서 열심히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나는 아장아장 걷다가 중심을 잃고 철퍼덕 주저앉았다.

    옆에서 책을 보고 있던 작은오빠 카눌레가 말했다.

    “두 개꾸나. 최고 끼록이네.”

    “두 개가 아니라 두 걸음이지. 그리고 최고 기록은 세 걸음이었어!”

    “흥.”

    카눌레가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갈레트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나와 눈을 맞췄다. 여느 때처럼 얼굴 가득 미소가 어려 있었다.

    ‘제가 잘 돌볼게요.’라던 그 말처럼, 갈레트는 그 이후로도 계속 나를 찾아왔다.

    그러자 보다 못한 엄마가 카눌레도 거기 끼워주라고 조건을 내건 모양이었다.

    물론 그래봤자 실상은 이런 모양이다.

    갈레트는 나한테만 관심이 있고, 카눌레는 이쪽을 보는 둥 마는 둥 책이나 읽고 있었다. 아마 엄마가 원하던 건 이런 그림이 아니었을 텐데.

    어쨌든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성장 중이었다.

    갈레트는 여전히 내게 동화책을 읽어주었고, 덕분에 나는 이제 글자도 얼추 알아볼 수 있었다.

    카눌레가 읽는 책이 『마법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제목이라는 것도 알았다.

    근데 그 책, 거꾸로 들고 있다는 건 아나 몰라.

    “카눌레, 너는 나중에 마법사가 될 거야?”

    “…몰라.”

    “크레페는 마법사 해도 잘 어울릴 것 같다. 분명 엄청 멋있겠지?”

    갈레트는 카눌레에게 잠시 관심을 주는 것 같다가도 다시 내 얘기로 돌아왔다. 뭐가 그리 좋은지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뭐가 좋다니, 내가 좋은 거겠지만.

    나는 민망해져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갈레트가 이렇게 동생 바보인 줄은 소설에선 미처 몰랐다. 갈레트가 죽은 후 크레페가 왜 그렇게 충격을 받았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고…….

    “형아는 마법에 관심 없쪄?”

    “지금은 우리 동생한테만 관심 있지.”

    갈레트가 생글거리며 내 코를 콕 찔렀다. 어린아이의 힘이라고는 해도 나는 그보다도 어린 아기였기에 내 몸이 뒤로 기우뚱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코앞에 있는 갈레트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그러나 갈레트의 다른 팔이 내 등을 받쳐주고 있는 걸 보니 손가락을 잡지 않았어도 다칠 일은 없었을 것 같았다.

    “카눌레, 이거 봐! 크레페가 내 손 잡았어!”

    “그렇게 쪼아?”

    “응, 완전 좋아. 너도 와서 쓰다듬어 봐.”

    “형아 몇 짤이야? 애기야?”

    카눌레가 고차원적인 비꼬기를 시전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일단 ‘형아’라는 호칭에서 그 비꼬기는 실패라고 지적해 주고 싶군.

    마법이라…….

    나는 카눌레가 든 책을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설렐 만큼 판타스틱한 단어였다.

    하지만 소설에서 크레페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묘사는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갈레트에게 더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지금도 봐라, 겨우 다섯 살 된 아이치고는 말도 조리 있게 잘하지 않나.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원작에서도 갈레트는 학문에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였다. 아마 십 년쯤 후에는 마법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순식간에 심란해진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레트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볼 수 있는 내 얼굴의 전부였다.

    갈레트 오빠와 꼭 닮은 금발에 보라색 눈.

    나는 아직도 거울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귀여운지는 나도 알고 싶은 사항이었다.

    사실 머리색이나 눈 색 정도는 소설에서 크레페에 대한 묘사를 읽어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문득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TV 광고 같은 데에 나왔던 아기처럼 볼록 튀어나온 배와 짤막한 팔뚝, 오동통한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15년 후에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미인이 되겠지.

    나는 지난 생에서도 외모에 큰 관심을 둔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소설에서 그리 찬양하던 미모가 어느 정도일지,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지 은근히 궁금하긴 했다.

    “흥. 바보 가타.”

    카눌레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읽고 있던 책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여전히 그는 책을 거꾸로 들고 있었기 때문에 책장은 뒷이야기가 아니라 앞 이야기로 넘어갔지만, 뭐, 본인이 괜찮다면야.

    “크레페…….”

    그때 갈레트가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손을 들어 진지하게 내 주먹을 감쌌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갈레트의 커다란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지더니, 곧 그가 나를 꽉 껴안았다.

    “흑. 크레페, 더 크지 마라. 계속 애기 해. 응?”

    여기 누가 다섯 살짜리 꼬맹이한테 술 줬니!

    나는 맨정신에 주정을 부리는 그의 품에서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그러나 벗어나기엔 어림도 없었다.

    가만히 있다간 숨 막혀 죽겠다 싶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찌러!”

    “…….”

    그것이 나의 첫마디였다.

    갈레트가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날 마주 보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카눌레도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둘 다 제 귀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길래 내가 한 번 더 말했다.

    “찌러.”

    “어, 엄마!”

    갈레트가 벌떡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갔다. 적막한 방에 나와 카눌레 오빠만이 남았다.

    내가 멀뚱멀뚱 카눌레를 보고 있으니 그가 책을 탁, 소리 나게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시러.”

    카눌레가 외마디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혼자 남은 방에서 생각했다.

    아기는 난데 왜 저놈이 삐친 것 같지?

    예전부터 내가 잘하는 것은 공부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걸음마도 못 뗀 내가 어설프게나마 대화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동생 바보인 갈레트뿐 아니라 웬만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엄마도 크게 놀랐다.

    “세상에…….”

    “크레페는 천재인가 봐요!”

    “아냐. 가렛뚜가.”

    “나보다 크레페가 훨씬! 훨씬 천재야!”

    아직 자기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아기를 치켜세우며 갈레트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하지만 나는 내 허접한 말을 이해한 것부터 그에게 가산점을 주고 싶었다.

    나는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대신 방긋 웃었다.

    그러자 갈레트는 몇 배로 감동받은 듯 내게 뺨을 비비며 ‘우리 크레페!’ 같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카눌레가 탐탁잖은 얼굴로 태클을 걸었다.

    “가렛뚜가 아니라 가렛뚜거든.”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카눌레를 쳐다보았다. 카눌레가 헛기침을 하고 고쳐 말했다.

    “형아거든.”

    그럼 나도 다음부터는 오빠라는 단어를 연습해야겠군.

    “자, 자, 이제 그만하고 가서 앉아. 갈레트도.”

    엄마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손을 내저었다.

    내 코앞에 있던 갈레트가 물러나자 그제야 나도 다시 주변을 볼 수 있었다. 화려한 식탁과 벽난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보석으로 장식된 조각상들이 있는 식당을.

    다시 봐도 놀랍다. 내 방은 검소한 편이었구나.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까지 내 식사는 방에서 먹는 이유식이나 모유였다. 그래서 내가 식당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물론 아직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수프 정도였지만, 매일 보던 장소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근데…….

    “또 이쪄?”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들은 내가 숟가락을 들고 수프와 씨름하고 있을 때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어 먹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문을 당한 기분이라 배가 아팠는데 아직도 먹을 게 남아 있다니.

    “응. 디저트 먹어야지.”

    엄마가 싱긋 웃으며 손으로 내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

    나는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앉은 아기용 의자에 붙어있는 작은 식탁에는 내가 방금까지 먹다 흘린 수프가 흥건했다.

    이 사람들이 디저트를 먹는 동안 나는 또 수프만 핥아 먹고 있어야 하는 건가?

    생각만 해도 침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때 내 눈앞에 푸딩이 얹어진 작은 숟가락이 다가왔다.

    나는 이 상황을 믿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푸딩 정도는 부드러우니까 괜찮을 거야.”

    엄마,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감격하다 못해 턱이 덜덜 떨렸다.

    나는 그녀가 떠준 푸딩을 조심스레 머금고 입술을 닫았다.

    혀가 닿자 조각은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은은한 바닐라 향과 그에 대비되는 강렬한 단맛이 뇌리를 강타했다.

    존맛!

    귀족과 백만 광년 정도 떨어진 감탄사가 목구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엄마의 스푼을 손으로 밀어내고 푸딩 접시에 그대로 코를 박았다.

    “하하하, 크레페 봐!”

    갈레트가 깔깔거렸다.

    옆에서 카눌레가 얼굴을 찌푸렸다.

    “…바보 가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아아!

    【 처음 만나는 아빠 】

    오늘은 초코케이크와 유자 타르트, 머랭 쿠키, 로즈마리 차를 준비해 봤다.

    거기에 빠질 수 없는 추억의 푸딩.

    “그렇게 먹으면 살찐다.”

    카눌레가 쯧, 혀를 차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더 이상 혀 짧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놀릴 거리가 하나 줄어들었으니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끄마큼 머리 쓰거든?”

    내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카눌레는 듣는 척도 않고 책을 펼쳤다.

    이곳은 우리 쉬제트 가문이 소유한 도서관이었다.

    서재도 아닌 도서관이 떡하니 집에 있다니, 나도 처음에는 놀랐지만 그것도 금방 익숙해졌다.

    그래, 귀족이니 그럴 수도 있지. 생일에는 도서관을 지어주고 결혼식 땐 성을 지어주고, 이러다 혁명도 일어나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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