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2)화 (2/181)
  • 2화 

    여자가 한숨을 쉬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팔에 안겨 있던 나는 천장을 향해 누운 자세가 되었고, 두 사람의 얼굴은 모빌처럼 높아졌다. 아무래도 갈레트가 직접 내게 책을 읽어주려는 모양이었다.

    “흠흠. @#$%#, 크레페!”

    갈레트가 목을 가다듬고 책을 폈다.

    유치원에 다녀야 할 법한 혀 짧은 목소리가 차근히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갈레트의 발음은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더러 있었지만 더듬거리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목소리도 차분해서 그가 읽어주는 내용으로 단어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교재 없이 공부하는 것은 꽤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처음 몇 분 정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의도치 않은 침방울이 터져 갈레트가 킥킥거렸다.

    엄마가 소매로 내 입가를 닦았다. 비싸 보이는 옷이었지만 더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직도 이 현실이 책 속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이들이, 정확히는 소설 속의 엄마와 갈레트 오빠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으니까.

    고개를 돌려 여자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갈레트가 책 읽기를 멈추고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허밍을 시작했다.

    빛나는 섬유로 만들어진 흰 드레스와 여기서 배어 나오는 햇빛의 향기.

    갈레트 오빠의 부드러운 손길과 희미하게 들려오는 자장가.

    소설의 첫 페이지가 되는 나의 열다섯 살 생일. 그 전에 이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주인공이 된 건 좋지만 하필이면 이 소설일 건 뭐야.

    때아닌 억울함이 느껴졌다.

    여자 주인공이 천재라거나 영웅 노릇을 하고 부자 남친을 만나 행복하게 진행되는 소설도 널려있다.

    하지만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를 완결까지 본 독자로서, 이 이야기는 절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피폐물이었다.

    애칭 크레페, 정확히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는 경국지색의 절세미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시기와 질투, 집착 어린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지내야 했으며 자신의 첩이 되지 않는다면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도 꾸준히 받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인 황태자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물론 그를 만난 다음에도 크레페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황태자를 꼬여냈다고 사교계에서 매장을 당한다거나, 이권 다툼에 휘말려 납치를 당한다거나, 황태자의 약혼녀가 된 후에는 인질이 되어 황태자의 발목을 잡는다거나, 이웃 나라의 귀족에게 약점을 잡혀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된다거나, 그러다 걸린다거나…….

    아무튼 하나씩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현실은 시궁창’ 정도 될 것이다.

    이제 그 시궁창에 빠진 게 내가 됐단 말이지.

    새 삶을 얻었다고 좋아했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는 그것도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쩝.”

    내가 입맛을 다시자 집무를 보고 있던 엄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방해가 됐을까 싶어 고개를 젓자 그녀가 미소 짓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 부드러운 미소가 나를 더욱 심란하게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시간 배경은 주인공인 크레페가 열다섯 살이 되는 해부터였다.

    그래서 크레페가 일곱 살일 때 세상을 떠나는 크레페의 엄마에 대해서는 깊이 다뤄지지 않았다.

    ‘크레페는 일곱 살에 엄마를 잃었다.’ 정도의 설명이 전부였다.

    물론 나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건 그냥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녀는 나의 엄마였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진짜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운명이 바뀔 가능성이 한없이 0에 가까울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알면서 모르는 척 그녀의 죽음에서 눈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사인이 불치병 따위가 아니라 암살일 경우에는 더욱이.

    갈레트의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일곱 살 때, 갈레트는 내가 열 살일 때 죽는 게 차이점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은 갓난애라는 것이었다.

    엄마의 죽음도, 갈레트의 죽음도, 내 인생이 꼬이기까지도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했다면 내가 운명을 거스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조용히 혼자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인생이 게임이라면, 나는 그 게임의 공략집을 하루 전에 정독하고 시험에 들어간 셈이었으니까.

    할 수 있어.

    나는 고사리 같은 손을 말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내가 힐링물의 주인공이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오오오옹!”

    갈레트가 뿌듯하게 웃으며 동화책 마지막 장을 덮었다.

    나는 갈레트가 공연하는 구연동화의 유일한 관객이었기에 열심히 박수를 쳐주었다.

    모르는 단어가 군데군데 있긴 했지만, 대충 용사가 어쩌고 마법사가 어쩌고 하는 모험 전기인 것 같았다.

    “그래, 그래. 재밌었어?”

    “웅!”

    알아듣는 건 해도 입술이나 혀가 아직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기에 길게 말하는 건 무리였다.

    나는 읽어줘서 고맙다는 말 대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레트가 엄마에게 허락을 받고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들었다.

    “크레페? 내가 네 오빠야. 우리 동생, 착하지?”

    속삭이는 목소리 때문에 귀가 간지러웠다.

    나는 팔을 들어 귀를 문댔다. 아니, 그러려고 했으나 갈레트가 내 손을 붙잡았다.

    “이거 봐. 손이 너무 작아요. 어떻게 이러지?”

    나는 갈레트의 손가락을 꽉 잡았다. 그러자 갈레트는 그게 더욱 신기한 듯 제 손을 살살 옆으로 흔들었다.

    그의 소맷자락이 내 코를 간질였다.

    “핫퓨! 츄!”

    “이리 다오. 한 팔로 안으면 위험해.”

    엄마가 나를 다시 제 품으로 데려갔다.

    코를 씰룩이던 나는 눈높이가 높아진 틈을 타서 방 이곳저곳을 빠르게 스캔했다.

    흰 자작나무로 만든 아기 침대와 그것을 살포시 가리고 있는 얇은 커튼, 화려한 샹들리에와 그림, 조각상 같은 장식품들. 그러나 거울은 아무 데도 없었다.

    나도 그 경국지색이라던 내 미모를 좀 보고 싶은데. 뭐, 그래봤자 한 살도 안 된 아기니까 미모라고 할 것도 없으려나.

    엄마가 의자에 앉고 나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갈레트가 내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무 귀엽다.”

    네가 더 귀엽다.

    그렇게 말해 주지 못하는 게 유감이었다.

    갈레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금발에 보라색 눈을 한 갈레트는 꼭 도자기로 만든 인형 같아 보였다.

    물론 나도 족보 있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 제법 삼삼했다.

    특히나 이런 일상은 원작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은 장면이었다.

    어쩌고 몬스터 작가는 인성도 닉값을 하는지, 조금이라도 훈훈하다 싶은 장면은 다 빼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매일 좋아하는 소설의 비하인드 외전을 읽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인생이 멋진 이유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지.

    인생 스포를 이런 식으로 피해 가다니,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식사 준비해 드릴까요?”

    종종 내 방에 들어와 젖병을 물려주는 아주머니가 물었다.

    한때는 가사 도우미라고 생각했지만, 이 시대 배경에 맞춰보면 메이드인 것 같았다.

    엄마가 고개를 젓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따가요. 그보다 에이미, 가서 카눌레 좀 데려와 줄래요?”

    딸꾹.

    카눌레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놀라 딸꾹질이 터졌다.

    디저트랑 같은 이름이지만, 이 세계관이 그렇듯 저것도 사람 이름이었다.

    “괜찮아, 크레페? 아기가 딸꾹질해도 돼요?”

    갈레트가 어지간히 걱정되는 듯 나와 엄마에게 번갈아 질문했다.

    엄마가 갈레트의 등을 떠밀었다.

    “너도 에이미랑 같이 다녀와. 크레페를 귀여워하는 건 좋지만 카눌레한테도 신경 써줘야지.”

    “네에…….”

    히끅.

    갈레트는 여전히 딸꾹질 중인 나를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보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메이드인 에이미가 갈레트를 이끌고 방을 나갔다.

    “걱정하지 마, 크레페. 작은오빠를 데리러 간 거야. 둘 다 곧 돌아올 테니까. 응?”

    엄마가 나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카눌레 드 보흐도 쉬제트. 쉬제트 백작 가문의 둘째 아들이자 크레페의 작은오빠.

    엄마가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그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긴장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엄마가 나를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었다.

    “괜찮아. 카눌레도 분명 널 좋아할 거야. 오빠들이랑 친하게 지내렴. 알겠지?”

    엄마가 내 몸을 토닥이며 다정히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뭘 걱정하는지 모른다.

    카눌레 오빠 때문에 우리 가족이 망가질 텐데, 친하게 지내라고요?

    쉬제트 백작가의 첫째인 갈레트가 내 방에 찾아와 열심히 책을 읽어주었던 몇 개월 동안 둘째인 카눌레는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벌써부터 안 좋은 예감이 팍팍 들지 않는가?

    햇살 같은 갈레트에 비하면 친형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만큼 다크한 태도였다.

    나의 그런 예감은 카눌레를 실제로 봤을 때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갈레트의 금발과 다른 새까만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고 눈은 빨간색이었다.

    소설에서 봤는데 저건 외탁이라고 했다.

    갈레트와 카눌레가 나란히 서니 그야말로 빛과 어둠이 따로 없었다. 빛의 용사와 어둠의 마법사 같은 조합이라고 해야 하나.

    아마 외탁이라는 건 핑계고, 작가가 선역과 악역을 대비되는 외모로 설정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소설의 비평가가 된 양 혼자 납득하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카눌레를 뜯어보았다.

    이제 서너 살일 그는 갈레트보다 작았고,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었다.

    마법진이 그려진 표지를 보니 마법서인 것 같았다. 아니면 마법서인 척하는 그림책이거나.

    카눌레가 언짢은 얼굴로 검지를 들어 내 얼굴을 가리켰다.

    “이게 동쨍이에요?”

    “이거라니! 크레페야.”

    갈레트가 번개처럼 정정하고 나섰다.

    동생을 동쨍이라고 발음하는 건 지적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내가 쓸데없는 고민에 빠진 사이 엄마가 끼어들었다.

    “동생이 태어났는데 한 번도 %##? 아무리 @@#$%도 #**% 해야지.”

    “어쨔피 형아가 자주 와주쟈나요.”

    간간이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엄마의 말뜻을 알아듣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엄마의 말보다 카눌레의 저 혀 짧은 발음이 더 답답했다.

    분명 뭔지 아는데 거슬린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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