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1부 - 프롤로그 】
천천히 되짚어보자.
어제는 분명 고등학교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가채점을 끝낸 만 점짜리 시험지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단골 빵집에 들러 조각 케이크와 머랭 쿠키, 갈레트, 까눌레, 브라우니 등등의 디저트를 한 아름 샀다.
그래, 거기까지는 별문제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 아무도 없었다는 것도 평소와 같았다.
엄마는 일 때문에 집에 일찍 들어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건 문제는커녕 오히려 반가운 소식에 가까웠다. 매일 돼지처럼 처먹기만 할 거냐는 구박도, 겨우 중간고사 백 점으로 만족할 거냐는 꾸지람도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익숙하게 컴퓨터를 켜고 소설 사이트에 들어갔다. 앞으로 몇 시간이 내가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것은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라는 제목의 판타지 소설이었다.
구린 제목이라 처음에는 클릭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여자 주인공 크레페를 시작으로 주요 인물의 이름이 모두 디저트인 것에 꽂혔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달달하지 않았다.
“피폐물 스토리의 주인공 이름을 죄다 이런 식으로 지어놓다니, 작가 제정신이냐.”
마지막 머랭 쿠키를 입에 넣고 손을 털었다.
원래 디저트를 먹으며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은 나의 취미였다. 달콤한 디저트나 소설 속 세계는 현실을 잊게 해주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선택한 이야기는 현실 도피에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물론 몰입하고 나선 이름 같은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푹 빠져 읽긴 했지만.
“디저트몬스터?”
나는 뒤늦게 작가 이름을 발견하곤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다른 의미 없이 디저트를 좋아해서 등장인물 이름도 그런 식으로 지은 거구나.
사실 내 취향은 이런 소설이 아니었다.
나는 가벼운 이야기가 좋았다. 다정하고 잘생긴 남친, 동생 말이면 껌뻑 죽는 오빠, 공부 못해도 오냐오냐해 주는 부모님이 있는 그런 스토리 말이다.
다 현실엔 없는 것들이니까.
그때 방문 너머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다.
나는 급하게 컴퓨터를 끄고 빈 케이크 상자를 책상 밑에 숨겼다. 그리고 원래 자고 있던 척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엄마가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냐느니, 내가 너를 혼자 어떻게 키웠는데 잠만 처자면 장땡이냐느니 하는 호통이 들려왔다. 또 술을 마시고 온 것이 분명했다.
최악의 생일이었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눈을 꼭 감았다. 그것이 이 집, 이 몸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고는 상상도 못한 채.
【 미쳤거나 꿈이거나 】
역시, 아무리 어제를 되짚어봐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시험을 마치고 평소 같은 하루를 보낸 후 잠에 든 것. 그게 끝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이라곤 어제가 내 생일이었다는 것 정도일 테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눈앞이 뿌예서 사물이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눈곱이라도 꼈나 싶어 눈을 비비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도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제어가 안 되는 촉수를 팔에 달면 이런 기분일지도.
“무웅… 낑…….”
그것만이 아니었다. 열심히 눈을 비비적거리려는 내 입에서는 이상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이게 내 목소리라고?
“꺄우?”
목소리가 영 이상했다.
그러나 헬륨 가스를 먹은 것 같은 목소리에 더 의아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기 때문이다.
“끼야아아!”
“%^[email protected]*^#?”
순간 놀라서 비명을 질렀지만 상대는 분명 사람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보아 여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클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그 사람이 내 몸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 사람이 큰 게 아니라 내가 작아진 거라고.
아기가 된 건가? 하지만 갑자기 왜? 내가 죽었던가? 이건 환생한 건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의 유일한 특기는 공부였다. 이대로 될 대로 되라 하며 늘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비록 하루아침에 갓난아기가 되었더라도 말이다.
아니, 이렇게 고차원적인 사고가 가능한 내가 아기라고?
나는 찬찬히 지난 삶을 떠올려보았다.
친구도 없고 마음 터놓을 사람도 없고. 아무도, 심지어 엄마도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던 인생을.
더럽게도 현실적인데…….
“끄응…….”
나는 착잡한 얼굴로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여자가 한 말이 처음 듣는 언어인 걸 보면 여기는 분명 외국이었다.
여자의 머리 색도 염색한 것 같은 적갈색이었다. 그리고 분위기나 방의 크기로 짐작하건대, 이곳은 서양 어딘가의 부잣집인 것 같았다.
오히려 주변을 파악하는 것이 나 자신을 파악하는 것보다 쉬웠다.
나는 조막만 한 손을 들어 보았다. 몇 번을 봐도 아기의 그것이었다.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내가 부잣집의 아기로 환생한 것이다.
“…….”
미쳤거나 꿈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 * *
며칠이 지났다. 정확히 며칠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망할 갓난아기의 몸은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지는 몹쓸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은 사라지고 설렘만 남았다.
내가 소설 속에서나 봤던 인생 2회차에 당첨됐다니!
꿈이라기엔 현실감 넘쳤고 미쳤다기엔 정신이 말짱했다.
내 시력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고, 그건 분명 이 세계에서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푸우.”
시간 배속 기능 좀 주면 안 될까요?
나는 내 꼬물꼬물한 손가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잠에서 깰 때마다 내가 여전히 아기라는 사실이 한탄스러웠다.
“@^#@$$%*!”
그때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잖아도 심심해 죽을 것 같았던 내가 고개를 돌리고(이제 고개를 돌릴 수 있게 됐다!) 방문을 쳐다보았다.
아직 방문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누가 들어올지 벌써부터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평소에 내 방에 들어오는 사람이 단 두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한 명은 내게 젖을 물렸던 여자였고 다른 한 명은 종종 이 방에 들어와 청소를 하는 다른 여자였다. 아마 엄마와 가사 도우미인 것 같았다.
“#%@.”
목소리를 들으니 엄마인 것 같았다.
그러나 문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함께 들어온 낯선 남자아이 때문이었다.
“앙흐!”
“$$%*!”
분명 내 귀나 눈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남자아이가 지금도 내 침대 주변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앙흐 $%%! 앙흐!”
“쉬잇!”
금발의 남자아이가 앙이 어쩌고 흐가 어쩌고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겨우 다섯 살 남짓으로 보이는데 운동 신경이 대단하기도 하다.
“앙흐 쉐보렌! 쉐보…….”
아이는 갓난아기인 내가 외울 수도 있을 만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게 말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주접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심심했던 나는 짧은 혀를 움직여 어떻게든 옹알이를 해보았다.
“아흐? 헤오?”
그러자 내 침대 주변을 산만하게 돌아다니고 있던 남자애가 나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의 주의 산만, 과다 활동, 충동적인 태도가 쏙 들어갔다.
아이가 침대 창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큼지막한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금발에 보라색 눈동자라니. 동화책에서나 나올 것 같은 비현실적인 조합이었다.
“앙흐. 쉐보렌.”
“@^@, $#%%…….”
“쉬잇.”
옆에 선 여자가 조심스레 끼어들려는 것을 아이가 저지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보라색 눈동자가 긴 속눈썹에 가렸다가 다시 나타났다.
순간 방 안이 적막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가 느리게, 다시 말했다.
“앙흐. 쉐보렌.”
이거, 나한테 따라 해보라고 하는 거 맞지?
아무래도 이 녀석과는 뭔가 통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몇 번 입을 뻐끔거려 근육을 풀고 천천히 말했다.
“아후. 헤오운.”
“@^@%#! *@%$#!”
아이가 갑자기 여자를 보며 방방 뛰었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걸 보니 대충 저 말은 ‘얘 봐요! 천재인가 봐요!’ 정도가 아닐까?
저렇게 좋아해 주니 내가 다 뿌듯하네.
“갈레트.”
여자가 점잖게 타일렀다. 남자아이가 합, 입을 다물었다.
이쯤에서 서비스 한번 해줄까?
“하엣투.”
“히히.”
아이가 키득거리며 웃고는 창살 틈새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의 얼굴이 아까처럼 가까워졌다. 내 몸이 작아서 그런지 체감이 더욱 컸다.
아이가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갈레트. 갈레트.”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크레페. 크레페.”
“크…….”
나는 그 말을 다 따라 하지도 못하고 멍청히 입을 벌렸다. 그러고 있자 여자가 남자아이를 내보냈다.
“갈레트. @^%%#%.”
“^*&.”
남자아이는 아쉬운 듯 내 쪽을 한 번 더 쳐다보긴 했지만 얌전히 방을 나갔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갈레트. 그리고 크레페.
단지 간식 같은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갈레트와 크레페.
분명 내가 본 소설에 나온 이름이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나온 여자 주인공과 그 오빠의 이름.
나는 여자의 품에 안긴 채 손을 뻗었다. 알전구처럼 생긴 전등이 내 손을 통과했다. 홀로그램처럼 전혀 뜨겁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구체.
이게 소설에 나왔던 마법등이구나.
시무룩하게 여자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정말 미친 걸까? 그냥 환생했다고 해도 내 정신 건강에 의문이 들 지경인데, 이제 책 속으로 들어왔다니. 그것도 주인공으로.
세상 어떤 중2병도 이렇게 미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래서야 매번 잠들 때마다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번에도 깨지 않길. 새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깨지지 않길.
그러나 내가 어떤 고뇌와 좌절을 겪든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매일 젖을 먹었고, 매일 트림했고, 매일 쌌다. 이게 꿈이라면 참으로 구체적인 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똥 꿈은 길몽이랬는데.
“크레페!”
잡생각으로 빠질 뻔한 그때, 남자아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갈레트였다. 여자 주인공 크레페의 오빠.
“갈레트! #%% 안 돼!”
갈레트가 합, 입을 다물고 손에 든 책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표지로 보건대 동화책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