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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39)화 (139/139)
  • 외전 13화

    수확제 행사가 마무리되고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할 무렵, 안나의 입덧이 시작되었다.

    쉴 새 없이 뱃속이 부글거리고, 입가가 헤질 정도로 구역질이 심했다. 삼킨 모든 것을 게워내야만 속이 좀 편해졌지만, 그 안정도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필리프는 필수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중요 회의를 제외한 모든 시간 내내 안나의 곁을 지켰다. 침실에 새로운 업무 공간을 꾸려 그녀를 눈앞에 두고 업무를 수행했다.

    “안나, 괜찮아?”

    반복해서 욕실을 드나들던 안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필리프의 귓가에, 입덧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걱정하실 것 없다는 주치의들의 말이 제대로 와 박힐 리 없었다.

    “괜찮, 괜찮아요. 일 보셔도 돼요. 옆에 시종들도 있고.”

    안나가 애써 미소를 만들어냈지만, 필리프는 귀족들과의 만찬을 취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니, 그녀가 스테판을 품고 홀로 출산했을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그녀의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힘들었을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한동안 괴로워했었다.

    “이번에는 내내 내가 곁에 있을 거야.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목구멍이 쓰리도록 위액을 뱉어낸 안나는 힘없이 침대에 널브러져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끝으로 안나의 이마를 쓰다듬은 필리프가, 그녀의 가슴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를 토닥이자, 오래되지 않아 그녀가 고른 숨소리를 뱉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안나의 입덧이 한참 이어졌고, 간신히 입덧이 사라질 때쯤, 카르멘은 배 속 아이의 위치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내렸다.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해 수척해진 안나는, 아이의 위치를 바꾸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볼록해진 배를 안고도 부지런히 운동했고, 아이의 영양에 도움이 될 만한 음식을 억지로 찾아 먹었다. 안나의 임신 사실이 온 제국에 퍼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황후의 회임을 축하하고자 하는 행렬이 도심을 가득 메웠다.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가 생겨난 것이 황후의 의견에서 기인한 것임이 알려진 이후, 제국 내에서 황후를 진심으로 섬기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안나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백성들 앞에 섰고, 자신에게 환호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순산을 응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몸을 갈라놓을 듯 고통스러웠던 출산의 고통도 쉬이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난 햇빛이 기승을 부리던 여름이 지나고, 알록달록한 가을도 저물었다. 전에 없이 매서운 추위가 제국을 덮쳤고, 흰 눈이 사방을 새하얗게 뒤덮었다. 그렇게 꽁꽁 얼었던 대지를 녹이는 실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안나의 출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안나의 출산을 보름 정도 남겨두고, 필리프는 그녀에게 마릴 저택에서 생활할 것을 제안했다. 필리프의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자, 안나가 필리프에게 작별을 고했던 곳이었다.

    “황궁은 지켜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곳이라면 조금 더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을 거야.”

    “폐하는…….”

    “말했잖아. 끝까지 당신 곁을 지키겠다고.”

    안나가 자신과 헤어짐을 선택한 공간이었기에, 필리프는 안나와 재회한 이후 마릴 저택으로는 스쳐 지나가는 눈길마저 주지 않았었다. 그랬던 그가 출산할 곳으로 마릴 저택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지 못해 갈증에 시달렸던 자신이었지만, 안나는 누구보다 풍만한 사랑으로 태어날 아이를 감싸 안을 것이다.

    하나의 미래를 꿈꾸었던 연인과 헤어짐을 겪었던 곳에서, 절대 변하지 않을 사랑을 다시 한번 맹세하고 싶었다. 그녀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로서.

    필리프는 절망의 공간을 희망의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안나가 가장 신뢰하는 마샤를 포함한 시종 스무 명, 산파 경험이 있는 약초상 두 명, 카르멘과 황궁 주치의 두 명, 호위병 백 오십 명이 황제를 따라 마릴 저택으로 향했다.

    확 트인 전경 때문인지, 안나는 마릴 저택에서의 생활을 즐거워했다. 몸은 점점 무거워졌지만, 움직임만은 가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필리프가 안도하는 것도 잠시, 곧 어마어마한 진통이 그녀를 덮쳐왔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진통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녀의 고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필리프를 좌절하게 했다.

    아랫입술을 아프게 베어 물며 고통을 삼키는 안나의 손을 잡은 필리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출산의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지금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이레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뿐이었다.

    “안나……. 제발……. 제발…….”

    다른 것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그녀와 아이만은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부와 권력, 목숨까지 당장이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있으니, 두 사람의 안전만은 보장해 주시기를.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안나의 진통이 시작되고 꼬박 나흘이 지난 후였다.

    * * *

    안나가 흐른 눈물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눈앞에 강보를 든 카르멘의 모습이 보였고, 우측 귓가에 안도하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였다. 살짝 끝이 떨리는 음성에서 그의 불안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안나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요.”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렀다. 볼품없이 쉰 목소리를 들은 필리프의 얼굴이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목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괜찮다고 그를 안심시키려는데, 공간을 울리는,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

    아이를 낳은 과정 모두가 흐릿했다.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이의 살갗이 공기에 닿는 순간 울리던 울음소리에 안도하며 지친 눈을 내리감은 순간이었다.

    “공주님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안아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받아 들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자국이 날 것처럼 살결이 보드라웠고, 무게감이 많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안나.”

    필리프가 감격한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는 안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길고 길었던 출산을 겪느라 너무나도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을 앞에 두고 아이가 건강하다는 사실에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었다.

    “너무……. 너무 예뻐요.”

    그런 필리프의 마음을 훤히 읽은 듯, 안나가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매단 채 강보를 필리프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이를 받아 든 필리프가 살짝 떨리는 손끝으로 강보 틈을 넓혔다.

    “당신을 닮았어요.”

    안나의 말대로 아이의 이목구비는 필리프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예외였다. 끝이 살짝 아래로 처진 눈매 속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안나를 닮은 모습이었다.

    “이름을 지어줘야지.”

    필리프가 품 속에 아이를 소중히 안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발개진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림 같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안나가 머릿속을 스치는 이름을 읊조렸다.

    “페넬로페.”

    “……뭐라고?”

    “그분이 전해주신 이름이에요.”

    페넬로페. 페넬로페. 필리프가 낮은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품 안의 아이가 커다랗게 눈동자를 키우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 * *

    “페넬로페. 여기 장미꽃. 따달라고 했었지?”

    “어? 이거 오빠가 직접 딴 거야? 어머니가 장미 정원엔 가지 말라고 하셨잖아.”

    “그러니까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알았지?”

    페넬로페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뜬 스테판이 먼지와 흙이 잔뜩 묻은 바지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금방 들켜버릴걸? 그럼 오빠가 혼나게 될 거야. 그냥, 그냥 이거 다시 그 자리에 가져다 놔. 난 장미 없어도 괜찮아.”

    “아냐. 아무리 크게 혼나도 상관없어. 장미가 너무 아름답잖아. 대가가 따르는 걸 감수해야지.”

    페넬로페는 경외의 눈빛으로 당당하게 말을 뱉는 스테판을 바라보았다. 두 아이는 사이좋게 손을 잡고 황궁 복도를 지나 부모님이 계시는 집무실로 향했다.

    “아니, 스테판. 너 옷이…….”

    어차피 들키지 않고 지나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스테판은 정면돌파를 선택했고, 안나는 일 초 만에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장미 정원은 아직 위험하다고 했지? 가시 정리를 마치기 전이라고 했잖아.”

    고개를 푹 숙이고 안나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스테판은 한마디 변명의 말을 뱉지 않았다. 어머니의 앞에서는 무조건 변명보다 사죄를 택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아버지의 충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규칙을 어긴 벌로 일주일 동안 스테판의 놀이 시간이 한 시간 줄어들었다. 안나는 그 시간 동안 매일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오빠는.”

    “아냐, 페넬로페. 난 괜찮아.”

    동생 앞에서 언제나 씩씩한 모습을 보이는 스테판이 자신의 편을 들고자 나서는 페넬로페를 막아섰다. 두 아이를 지켜보던 안나의 눈빛이 누그러지는 것을 확인한 필리프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럼 책을 읽는 것 대신 우리 네 명이 매일 산책하는 시간으로 벌을 대신하면 어떨까.”

    “산책이요?”

    “어제 중앙 정원 확장 공사가 끝났잖아. 당신 말대로 산책로를 넓혔는데, 궁금하지 않아?”

    “엄마, 우리 가요! 지금 가요!”

    스테판과 페넬로페가 동시에 안나의 손을 잡아끌고, 행동대장이 된 듯한 필리프가 시종들에게 뒤를 따를 것을 지시했다.

    “나 참.”

    안나는 세 사람의 공작을 이기지 못하고 산책길에 올랐다.

    “자, 올라서야지!”

    힘찬 기합과 함께 두 아이를 양손에 각각 안아 든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에 바짝 몸을 밀착했다. 눈부시게 밝은 달빛이 쏟아져 들어와 나란히 걷는 네 사람의 길을 밝혀 주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입가에서 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시원한 밤공기 위로 따뜻한 서로의 숨결이 섞여 번지고 있었다. 완벽했던 하루의 사랑스러운 마무리였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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