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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36)화 (136/139)
  • 외전 10화

    커튼 틈 사이로 맑은 햇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직 시간이 이르다며 안나를 품 안에서 놓아주지 않았을 필리프였지만, 오늘만큼은 침대를 벗어나는 안나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설레하는지를 알고 있었으므로.

    시종의 시중을 받으며 빠르게 몸단장을 마친 안나가 스테판이 머무는 옆방을 찾았다. 이미 한참 전에 잠이 깬 듯 보이는 아이가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해맑은 웃음을 흩뿌리고 있었다.

    안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달려온 스테판의 몸에서 기분 좋은 땀 냄새가 풍겼다. 그와 함께 침실로 돌아왔을 때, 필리프는 이미 완벽하게 채비를 갖춘 상태였다.

    “스테판, 아침부터 신나게 뛰어놀았나 봐?”

    필리프가 스테판을 번쩍 안아 들고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필리프와 안나, 스테판은 파이크 영주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섰다.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날이 너무 좋은데? 덥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정도야.”

    안나와 스테판에 이어 가장 마지막에 마차에 오른 필리프가 마부에게 출발 신호를 주며 말했다.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텐데. 좀 서둘러 말을 몰라 일렀으니 정오 전이면 도착할 것 같아.”

    “바로 바다로 가나요?”

    “음. 아침을 거의 먹지 않았으니까 저택에 먼저 들러 식사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괜찮다고,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하려던 안나가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어제부터 일찍 출발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자신 때문에, 필리프도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래요.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씩씩하게 답한 안나가 필리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고된 일정이 마무리되었지만, 시야를 가득 채울 푸르른 바다를 생각하면 힘들거나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파이크 영주 말이에요. 가장 야욕이 심해 보였어요.”

    “음. 대대로 권력욕이 심한 가문이지.”

    “그대로 자신의 권력욕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브레이든 영주처럼 속마음을 감추며 사람을 떠보는 스타일보다는.”

    필리프가 안나의 말에 동의하며 몸을 그녀에게로 바짝 기울였다. 동행 기간 내내 안나는 자신에게 매우 훌륭한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편견 없이 모두를 대했고, 그 때문에 각각의 장단점을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사람을 대할 때 늘 색안경을 낄 수밖에 없는 필리프에겐, 더없이 훌륭한 조력자였다.

    “와인은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지?”

    술을 선택하는 일이라면 자신보다는 안나 쪽이 훨씬 나았다. 필리프의 질문을 들은 안나가 무릎에 내려놓았던 손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매일 와인을 마신 후 느낌을 적어놓았어요.”

    안나가 필리프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수첩에는 와인의 맛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와인을 대접한 영주에 대한 인상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오직 와인 맛만 두고 최종 선택을 하지는 않으실 것 같아서요.”

    꼼꼼하게 작성된 평가를 읽어내리던 필리프가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이걸 전부 언제 적은 거야? 시간이 없었을 텐데.”

    “아, 폐하께서 영주들과 회의하실 때 적어놓은 거예요. 저에게는 자유 시간이 좀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아침에 모자를 좀 챙겼는데요. 바닷가에 가면 폐하도 모자를 쓰셔야 할 것 같아서요.”

    괜한 부끄러움에 안나가 별것 아니라는 듯 빠르게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필리프의 눈은 여전히 안나의 수첩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브레이든 영주가 내어 온 와인은 좀 떫었던 기억이야. 당신 때문에 하나하나 기억이 되살아나는데?”

    “저도 적어놓지 않았으면 전부 잊었을 거예요.”

    “이거 어쩌지?”

    “……네?”

    수첩을 닫은 필리프가 안나에게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

    “앞으로 당신과 모든 일정을 함께 하고 싶은데.”

    동그랗게 커지는 눈동자, 발갛게 물드는 두 뺨. 변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처럼,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날이 갈수록 그녀를 원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정말 큰일이라고, 서안나.”

    안나가 입을 열 틈도 없이 필리프가 그녀의 몸을 당겨 안았다. 그녀를 힘이 실린 두 팔 안에 가두고 거친 숨을 몰아쉰 그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 갑자기 그러시면.”

    놀란 마음에 그의 가슴을 밀어내고 스테판을 살폈지만, 다행히 이미 면역이 되었다는 듯 아이는 부모의 애정행각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경 쓸 것 없어. 지금 저 아이는 우리가 뭘 하든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어서 이리 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안 돼요.”

    “아이에게 사이좋은 부모의 모습을 보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래?”

    “정말 아이에게 중요해서 이러시는 거라고요?”

    “물론이지.”

    어이가 없어 안나가 탄식을 내뱉은 이후로도 작은 실랑이가 이어졌다. 등을 돌린 스테판이 그다지 감흥 없는 눈빛을 한 채 필리프와 안나를 바라보았다.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대화를 이어가던 안나가 말을 멈춘 건,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

    창밖 너머 멀리 푸른 바다가 보였다.

    “버, 벌써 도착했나 봐요! 저기, 저기 좀 보세요.”

    스테판을 안은 안나가 시야 멀리 보이는 바다를 가리켰다. 스테판도 그녀를 따라 짧고 오동통한 손가락을 주욱 내밀었다.

    푸르른 바다의 모습에 들뜬 안나를 본 순간, 필리프는 곧바로 깨달았다.

    아무래도 저택에 먼저 들르지는 못하겠군.

    “안나.”

    “네?”

    안나가 필리프를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눈매를 접어 웃은 필리프가 그녀의 품에 안긴 스테판을 받아 안았다.

    “당신은 먼저 내려서 기다려.”

    “네?”

    그제야 말간 얼굴이 필리프에게로 돌아왔다.

    “이 녀석 배는 채우게 하고 놀아야 할 것 같으니까, 내가 저택에 들렀다가 다시 나오지.”

    “아, 아니에요. 같이 갔다가 나오면 되는데.”

    “괜찮아. 당신은 먼저 온전히 혼자서 바다를 즐기고 있으라고.”

    이견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는 백사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차를 멈춰 세우고 뒤따르는 호위병들과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삼십 분 안에 돌아올 거야. 괜찮지?”

    제국의 황제인 자신과 함께 하는 삶에서, 아마 그녀는 평생 온전한 자유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짧지만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네. 늦으시면 안 돼요?”

    필리프의 생각을 읽은 안나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필리프와 스테판을 태운 마차가 조금씩 시야에서 멀어졌다.

    하얗게 작열하는 태양 아래 굽이치는 파도를 눈앞에 두니,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신발을 벗어 손에 쥔 안나가 한낮의 열기를 품은 모래를 밟고 걷기 시작했다.

    “와아…….”

    발바닥에 닿은 흙이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모래알이 흩날리며 발자국을 만들었고, 다시 발을 뗄 때쯤이면 바람이 그 흔적을 지워냈다.

    연파랑 파도가 부드럽게 밀려 들어와 발끝을 조금씩 적셨다. 이렇게 깨끗한 바닷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바닷물에 발목이 잠길 정도로 걸어 들어가자 먼발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병들이 몸을 급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을 테지.

    등을 돌려 호위병들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느리게 손을 흔들었다. 황급히 다가오던 이들이 그녀의 신호에 모두 움직임을 멈추었다.

    안나가 발목에 닿은 물의 수면이 무릎을 넘지 못하게 유의하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마차가 세워진 반대편에 가지가 길게 드리워진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햇빛을 가릴 수 있겠다 싶어 조금 가까이 다가서는데, 나무 그늘 밑에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어차피 호위병들은 그녀의 지시 한 마디에 바로 달려올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걸음을 늦춘 안나가 수면을 빠져나와 작은 그림자가 비치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누구니?”

    그늘 밑에 연노랑 원피스를 입고 은발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내린 여자아이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안나를 돌아보며 빙긋 미소 지은 아이의 얼굴에 뜨거운 바다 열기가 스며 있었다.

    “이거 드리라고 했어요.”

    “어?”

    여자아이가 등 뒤에 감추었던 손을 쭉 내밀었다. 하얀 조막손에는 커다란 복숭아가 들려 있었다.

    “복숭아? 이걸 누가 주라고 했어?”

    “그냥 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받으세요.”

    아이가 안나의 손에 억지로 복숭아를 쥐여 주었다.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가 제 손에 전해지는 순간, 안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몸에 전달되는 느낌을 받았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러면 안녕히 계세요.”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툴툴 털며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가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안나가 황급히 아이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이가 있었다.

    “자, 잠깐만. 혹시 이걸 너에게 준 사람, 그분은 괜찮으시니? 건강해 보였어?”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 대답해 줘. 그분은 괜찮아 보였어?”

    거듭되는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은 아이를 향해 다시 한번 질문을 하려 입을 벌리는데,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페넬로페라는 이름을 기억하라고 하셨어요.”

    “……뭐?”

    순간적으로 아이의 손을 놓친 안나가 등을 돌렸다. 스테판을 한 손에 안은 필리프는 햇빛을 모조리 머금은 찬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물장난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 여기, 여기 아이가.”

    “아이?”

    “어? 분명 아이가 있었는데…….”

    다시 등을 돌렸을 때 아이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아이의 흔적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그건 뭐야.”

    “……네?”

    안나가 제 손에 들린 진분홍 복숭아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복숭아를 바라보던 안나가 필리프를 향해 천천히 등을 돌렸다.

    “오늘 밤에도 수잔 유모님께 스테판을 부탁해야 할 것 같아요.”

    “응?”

    “방금……. 엄청나게 큰 선물을 받았거든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필리프의 얼굴이 꿀처럼 반짝였다. 안나는 필리프의 손을 끌어와 제가 쥐고 있던 복숭아에 닿게 했다. 자신과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인지, 그의 얼굴에도 기묘한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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