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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35)화 (135/139)
  • 외전 9화

    스미르 영주의 직계 가족과 저택에 머무르는 인원 모두가 모여 성대한 환영식을 진행했다. 황제와 황후는 스미르 영주 내외의 열렬한 환영 연설을 들은 후 저택 안으로 발을 옮겼다. 여독에 지친 스테판은 유모 수잔과 함께 미리 침실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폐하.”

    스미르 영주의 저택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아치형의 높은 천장이 달린 거실을 가로지르자 벽면이 온통 금박으로 장식된 커다란 홀이 보였다. 홀 한가운데에는 사각 테이블이 놓여있었는데, 테이블 밑에는 반질반질한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필리프와 안나의 자리는 테이블 정 중앙 자리였다. 식탁에 자리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금으로 된 커트러리와 황동 술잔이 세팅된 곳이었다.

    “시장하실 텐데, 바로 음식을 들이라 이르겠습니다, 폐하.”

    필리프가 고개를 끄덕였고, 스미르 영주의 지시를 들은 하인들이 차례로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여러 종류의 고기를 넣고 끓인 스튜와 알록달록한 색의 채소를 보기 좋게 섞은 샐러드가 그 시작이었다.

    “최상급의 수확물로만 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황후 마마.”

    안나의 옆에 자리한 영주 부인이 샐러드 그릇을 받는 안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전쟁 이후 경작지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복구가 빨라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모두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의 은공입니다.”

    앞으로 각 영지를 방문할 때마다 연거푸 듣게 될 찬사의 말이었다. 안나와 필리프는 짧은 시선 교환을 한 뒤 잔잔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간단한 전채 요리에 이어 오이스터 파테, 훈제 칠면조, 샤프란과 후추로 조리한 새우가 차려졌다.

    식사 자리는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테이블에 올려진 디저트 접시를 바라본 안나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위는 포화 상태였지만, 저와 필리프의 얼굴에 집중된 시선을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캐러멜 맛이 아주 좋습니다.”

    작은 칭찬의 말에도 뛸 듯이 기뻐한 영주 부인은 안나의 술잔이 비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등 뒤 시종에게 독촉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곧 안나의 술잔에 붉은 와인이 가득 찼다.

    “이쪽 지역에서는 저희 와인이 가장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와인에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는데, 평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황궁에 납품되는 와인은 매해 그 출처가 바뀌는데, 황제의 영주지 방문을 통한 시음이 꽤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생각보다 이르게 와인을 비운 안나를 바라보며 쾌재를 부른 스미르 영주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영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와인 잔을 비우는 안나를 흘끔 곁눈질한 필리프가 자신의 잔을 채우려는 시종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영주의 말에 간간이 말을 얹으며 잔을 비우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오늘은 이쯤 마무리하지.”

    “……예? 아, 죄송합니다, 폐하. 고된 일정이셨을 텐데…… 바로 침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영주 내외를 위한 시간은 충분히 할애했다고 판단한 필리프는, 안나가 잔을 비워내는 순간 바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제를 따라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선 스미르 영주가 대기하고 있던 집사와 짧은 말을 주고받았다.

    집사에 의해 안내된 방은 2층 가장 안쪽에 있는 손님용 방이었는데, 방 중앙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었다. 침대 틀에는 상아와 사슴뿔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4면 기둥 밑으로 금색 실크 천이 걸린 형태였다.

    “이곳은…… 모든 것이 화려하네요.”

    “지방 영주들이 보이는 것에 더 예민한 편이지.”

    안나와 필리프는 시종들을 모두 물리고 침실에 들었다. 필리프가 침대 천을 걷자, 안나가 기다렸다는 듯 매트리스에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피곤하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혹시나 실수라도 하게 될까 봐 긴장했어요. 어쨌거나 책잡힐 일은 조금도 만들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잔뜩 지쳐 힘없이 중얼거린 안나가 필리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당신이 누구에게 책잡힐 일을 할 리가 없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피곤할 텐데 먼저 씻겠어? 연결되는 문 건너편에 욕실이 있다고 하던데.”

    “하아…… 지금은 손 하나도 깜짝하지 못하겠는데.”

    푸념 섞어 뱉은 말에 갑자기 필리프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뿔싸. 제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안나가 입술을 급하게 달싹였지만, 건수를 잡은 필리프의 입이 한발 앞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도와주면 되겠네. 나는 아직 힘이 충분히 남아 있거든.”

    “아, 농담, 농담이었어요. 설마 제가 씻을 힘도 없을 리가요. 하, 하하.”

    어색한 웃음을 뱉은 안나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만 단념해 주었으면 했지만,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필리프는 단숨에 그녀의 뒤를 따라붙었다.

    “피곤할 때 무리하면 큰일 나. 아직 일정이 꽤 남았는데, 당신이 앓아눕기라도 하면 나만 곤란해진다고.”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그럼 옷을 벗는 것만이라도 도와줄까? 드레스가 불편해 보이는데 혼자 벗을 수 있겠어?”

    끈질기게 물러서지 않는 필리프를 달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안나가 빙그르르 턴을 돌아 필리프의 눈을 마주한 채 까치발을 들었다.

    입술은 간신히 필리프의 턱에 닿았다 떨어졌다. 짧게 맞닿기만 했던 간질거리는 입맞춤이었다. 갑작스러운 안나의 입맞춤에 모든 움직임을 멈춘 필리프가 당황이 섞인 눈동자로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빨리 씻고 나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직한 안나의 말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치 말 잘 듣는 대형견을 보는 느낌이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아 빠르게 등을 돌린 안나가 욕실로 향했다. 커다란 욕조 밖으로 안나가 황궁에서 자주 사용하는 향유 냄새가 퍼졌다.

    분명 저 사람이 지시한 것이겠지. 낯선 환경에 조금이라도 빨리 적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문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남자를 떠올리며 낮게 웃은 안나가 욕조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 * *

    영지 방문 일정은 끝없이 이어졌다. 방문한 영지에서마다 모두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장시간 마차로 이동하는 일정이 고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인 스테판이 마차 타는 것을 몹시 즐긴다는 사실이었다.

    “어쩜 어린아이가 이렇게 한 번을 조르지 않고 착하게 갈 수가 있죠?”

    비탈길을 지나는 중이라 크게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창밖을 바라보며 즐겁다는 듯 소리치는 스테판을 바라보던 안나는 짐짓 감격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글쎄. 스테판은 고른 길보다는 이렇게 비탈길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자라면 승마를 배우게 해야 하겠어.”

    “조금이라뇨. 승마를 배우려면 적어도 여덟 살은 되어야 해요. 약속했던 거, 잊으셨어요?”

    “아니 그땐 그랬지만, 여덟 살은 너무 늦은 나이야. 내가 처음 말을 탔던 게…….”

    “제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황제 폐하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가만히 눈을 응시하는 안나의 눈동자에서 무언의 압박감을 느낀 필리프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안나의 걱정을 알기에 대충 말을 뭉뚱그려 놓긴 했지만, 사실 제 아들의 상태를 보니 굳이 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해 보였다.

    창밖으로 바뀌는 풍경을 한참 내다보던 스테판은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고 말을 모는 마부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당장 내년이면 말을 타겠다 조를 것이 뻔히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한 곳밖에 안 남았네요.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어요.”

    말을 하는 안나의 안색이 파리했다. 매년 이 길을 나서는 자신에게도 벅찬 일정이니 그녀에게는 특히나 고됐을 것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안나의 야윈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하는 안나의 눈이 서슴없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제 짐을 따로 싸두었어요.”

    뺨을 쓰다듬는 필리프의 손길을 즐기며 눈을 감은 안나가 불쑥 화제를 바꾸었다.

    “무슨 짐?”

    “파이크 영주 저택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바다에 들르자고 하셨잖아요. 바로 바다에 들어갈 수 있게 단단히 준비했거든요.”

    눈을 뜨면 정해진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모든 일정이 끝나면 고단함에 쓰러지듯 잠들기를 반복했던 열흘이라는 시간이었다. 안나는 일정이 힘에 부친다고 생각되는 순간마다 필리프, 스테판과 함께 걸을 바닷가의 백사장을 떠올렸다.

    “비가 그치면 참 좋을 텐데.”

    많은 양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하늘에서 부슬부슬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린 비에 흠뻑 젖은 이끼 냄새가 풍겼다. 평소엔 그리 좋아하지 않던 이끼 냄새가 오늘따라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필리프는 문득 입에도 대지 못했던 오징어를 처음 먹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그녀가 제 곁에 있었다.

    “내일이면 그칠 거야. 하늘이 맑으니까.”

    “그렇겠죠?”

    안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운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따뜻한 손끝으로 안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필리프가 그녀의 허리를 당겨 두 사람 사이의 틈을 좁혔다.

    “만에 하나 비가 좀 내리더라도 상관없잖아?”

    “……네?”

    “비 내리는 날 바닷가를 걸어본 적이 있어?”

    안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꽤 낭만적일 것 같지 않아?”

    “뭐…….”

    “난 뭐든 괜찮을 것 같은데.”

    필리프가 길게 말끝을 늘였다. 그가 생략한 다음 말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느리게 숨을 내쉰 안나가 그의 허리를 가까이 당겨 안았다. 그의 가슴은 언제나 맞춘 것처럼 제 얼굴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나도 당신만 있으면 뭐든, 어디든 다 좋아요.”

    말을 뱉어놓고 나니 스테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안나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테판은 요람 손잡이를 손에 꾹 쥔 채 마부가 말을 모는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다. 안나와 필리프의 입가에서 동시에 맑은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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