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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34)화 (134/139)
  • 외전 8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활동을 시작한 안나의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사절단 규모가 적힌 서류에 서명한 필리프가 그녀의 손에서 바구니를 넘겨받았다.

    “이게 뭐지?”

    “아, 저희 이동 중에 먹을 점심 만든 거예요. 스테판이 먹을 이유식도 들어 있어요.”

    다시 필리프의 손에서 바구니를 넘겨받아 햇빛이 비치지 않는 자리에 보관한 안나가 몸단장 시종의 시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필리프가 시중을 받는 안나의 곁에 바짝 달라붙으며 물었다.

    “그럼요. 문제없어요. 그런데 폐하는 준비 다 끝내신 거예요?”

    “나는 이미 전부 끝났지.”

    “그럼 스테판 좀 살피고 와 주시겠어요?”

    “서류 보기 전에 확인했는데 잠들었더군. 지금 들여다보면 깨울 것 같은데, 다녀올까?”

    “……아, 아니에요.”

    “걱정할 것 없어. 유모와 함께 미리 이동하라고 일렀으니까.”

    시종이 안나의 머리 위로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씌워주었다. 시종의 시중을 받는 것에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데, 더 곤혹스러운 것은 필리프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자신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랫동안 황궁을 비워야 하는 일정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저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안나가 단장을 모두 마칠 때까지 그녀의 모습을 빠지지 않고 모두 눈에 담았다. 황급히 단장 시종을 물린 안나가 필리프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눈을 흘겼다.

    “아니,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네.”

    “왜, 쳐다보면 안 되나?”

    “안 되는 게 아니고, 시종들도 있는데 그렇게 보시니까.”

    “내 아내를 내가 보겠다는데 뭐가 그리 이상한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한번 추켜올린 필리프가 안나의 얼굴 앞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 황후. 준비는 되었소?”

    빙글빙글한 웃음도, 특유의 장난기도 사라진 얼굴이었다. 평소보다 반쯤 낮은 톤의 목소리를 뱉은 필리프의 손에 안나가 손바닥을 얹었다. 방을 나서기 전 시종에게 바구니를 챙기라 지시한 필리프는 안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날은 맑은 편이었다. 바람이 조금 불긴 했지만, 하늘이 어둡지 않아 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황궁 입구 앞에 놓인 마차 안에는 스테판을 안은 유모 수잔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폐하. 황후 마마.”

    구부정한 자세로 예를 표하려는 수잔에게 그럴 것 없다는 듯 휘휘 손을 저은 필리프가 그녀의 손에서 스테판을 넘겨받았다.

    “유모는 이 마차로 움직이면 돼. 필요한 것은 모두 챙겼는가.”

    “그렇습니다, 폐하.”

    여전히 잠기운이 남은 스테판이 잔뜩 부은 눈가를 쓱쓱 쓸어내리고 안나를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바로 아이를 안은 안나가, 자신과 필리프가 타고 이동할 마차로 향했다. 안나의 품에 안긴 스테판은 다행히 크게 보채지 않고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안나가 자리에 앉고 시간이 한참이 지난 후에 마차에 오른 필리프의 손에는 두꺼운 서류 뭉치와 커다란 지도가 들려 있었다. 빠르게 서류와 지도를 좌측으로 밀어 놓은 그가 안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처음이지? 이렇게 멀리 나가보는 건.”

    “네. 그래서 걱정보다는 설렘이 커요. 수도가 아닌 지방 쪽은 어떤 느낌일지 늘 궁금했거든요.”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들르는 건 어때.”

    “바다요?”

    필리프가 안나의 발아래 놓여 있던 요람을 눈짓했다. 안나가 잠든 스테판을 조심스럽게 요람에 눕히자 기다렸다는 듯 필리프가 그녀의 손을 낚아채다시피 하며 잡았다.

    “관광지를 조금만 지나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로 향하는 길이 나와. 당신, 바다에 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아…….”

    “당신 소원대로 결혼식은 건너뛰었으니, 간이 신혼여행쯤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신혼여행? 단어 자체에 놀라 동그랗게 눈을 키운 안나를 보며 슬슬 미소 지은 필리프가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때 필리프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들려왔다.

    “그럼, 낚시도 하는 건가요?”

    “뭐?”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별장에서 잠시라도 오붓한 시간을 가지길 기대했던 필리프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이 기대했던 낭만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낚시라니?”

    “저 사실 한 번도 낚시해 본 적 없거든요. 줄곧 해 보고 싶긴 했는데, 폐하가 가르쳐 주시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모닥불 피워놓고 직접 잡은 물고기 구워 먹으면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스테판도 생선이라면 아주 잘 먹으니까 좋고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안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 혹시 주변에 나무가 있으면 작은 배를 하나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요. 스테판만 앉을 정도로 작은 배요. 우리 둘이 배를 잡고 아이를 태우면 너무 좋아할 것 같지 않아요?”

    나무로 만든 작은 배라니. 이 여자는 내가 가진 권력과 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제대로 인지는 하는 걸까?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선박을 그녀의 눈앞에 대기시킬 수도 있을 텐데.

    필리프가 어이없다는 듯 짧은 탄식을 뱉었지만, 정신없이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에 빠진 안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 미리 알았으면 저도 좀 준비해 오는 건데. 물놀이 할 옷을 하나도 챙겨오지 않았어요.”

    “옷이야 별장에 가면 충분히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혹시 조개를 주울 수도 있을까요? 조개가 있다면 맑게 탕을 끓여서 안주하면 좋거든요.”

    필리프가 기대했던 낭만적인 밤을 보내기는 사뭇 어려워 보였지만, 안나의 얼굴 가득 자리한 미소를 보니, 어떻게 보내든 상관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조잘조잘 이야기를 뱉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필리프가 순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낚시라.

    땡볕에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서 있는 것도 질색이거니와, 생물을 만지는 것이 싫어 낚시는 한 번도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었다. 물론 안나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잔뜩 신이 난 그녀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좀 곤란하게 되었군.”

    “……네?”

    “아, 아니야.”

    기분이 좋아진 안나는 그 이후로도 바닷가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대다가 마차가 평지에 접어든 후에야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마부의 교대를 위해 잠시 마차가 멈춰 섰지만, 깊게 잠든 안나와 스테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움직임을 최대한 줄이며 마차 밖으로 나온 필리프가 주변을 둘러싼 시종과 호위병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 중, 낚시에 자신 있는 자가 있는가.”

    * * *

    안나와 스테판이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이른 아침 황궁을 떠난 마차는 어느새 제국 수도를 한참 지나 아득히 펼쳐진 농지를 지나가고 있었다.

    “깨우시지 그러셨어요.”

    요람 밖으로 손을 내미는 스테판을 안아 든 안나가 민망한 표정으로 필리프의 눈치를 살폈다.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인지 그의 눈가 아래 짙은 피로가 드러났다.

    “어제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잠 설쳤잖아. 충분히 자 둬.”

    “너무 오래 잤어요. 아, 식사는요? 출출하지 않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필리프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로 시찰할 영지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았지만, 안나가 아침부터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나가 바구니에서 보자기에 싼 그릇을 꺼내 필리프의 손에 들려주었는데, 그릇 안에는 동그랗게 말린 밥이 들어 있었다.

    “안에 각각 다른 재료를 넣어 보았어요. 가끔은 이 안에 뭐가 들었을지 상상하고 먹는 것도 재미니까요. 어서 드셔보세요.”

    포크로 밥을 집어 필리프의 입에 넣어준 안나가 다시 바구니로 손을 뻗어 자그마한 접시를 꺼냈다.

    “어때요?”

    “음, 맛있는데? 잘게 썬 고기인가?”

    “네, 고기를 잘게 썰어서 간을 미리 해 준 뒤 볶은 거예요.”

    빠르게 밥을 씹어 넘긴 필리프가 다시 하나의 밥을 입에 넣었다. 이번에는 말린 오징어 식감이 느껴졌는데, 달콤하고 짭짤한 맛의 조화가 훌륭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접시의 반 정도를 비워내고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안나의 품에 안긴 스테판이 거의 접시에 코를 처박을 기세로 이유식을 먹는 장면이 필리프의 눈에 들어왔다.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안나가 필리프를 바라보았다.

    “부전자전이죠?”

    “……뭐라고?”

    “당신이랑 먹는 모습도 똑같잖아요. 평소에는 식탐이 너무 없는데, 맘에 드는 음식을 해 주면 당신도 꼭 이 모습이거든요.”

    스테판은 어느새 접시 안 이유식을 모두 비우고 더 없냐는 표정으로 접시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어때요? 똑같죠?”

    “똑같긴 무슨. 난 저렇게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없어.”

    “당신 기억 안 나요? 저번에 제가 매콤한 스튜를 끓여 드렸을 때, 읍!”

    필리프가 남은 밥 하나를 집어 말을 하려 벌린 안나의 입안에 급히 밀어 넣었다. 흘긋 눈을 흘기긴 했지만, 배가 고팠는지 그녀가 부지런히 입안 음식물을 씹어 삼켰다. 다시 또 하나의 밥을 입가에 들이미니, 어미가 모이 주기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얌전히 입을 벌렸다.

    “남은 하나는 당신이 드세요.”

    사이좋게 음식을 나누어 먹고 지저분해진 자리를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첫 번째 도착지인 스미르 영주의 저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먼저 필리프의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것을 도운 안나가, 스테판에 이어 빠르게 자신의 머리와 드레스 상태를 살폈다.

    “언제나 당당히, 잊지 않았지?”

    황후가 된 이후 그녀가 처음 맞이하는 공식적인 행사였다. 살짝 떨림이 전해지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온 필리프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다정하게 눈을 맞춰주었다.

    차창 너머 저택 정원 밖으로 대규모의 환영 사절단이 보이자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뛰기 시작했지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안나가 입가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저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폐하.”

    “자, 그럼 내리시죠,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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