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33)화 (133/139)
  • 외전 7화

    번쩍 눈을 떴을 때 방안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안나가 어둠 속에서 눈을 끔뻑이며 공중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오래지 않아 손바닥에 딱딱한 요람 손잡이가 닿았다.

    조심스럽게 침대를 벗어난 그녀가 요람 속으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어둠 속에 가려 스테판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가 내쉬는 고른 호흡이 들렸다.

    “하아…….”

    가슴을 쓸어내린 그녀가 발끝을 세워 걸으며 침실을 벗어났다.

    초를 켜지 않았지만, 벌써 사흘 동안 어둠 속에서 지냈던 만큼 방향 잡기가 어렵지 않았다. 욕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린 안나가 문 앞 선반에 놓인 양초를 집어 불을 밝혔다.

    스테판의 몸에 이상이 생기고 사흘 내내 단 십 분도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했다. 눈가가 버석버석하게 말라붙는 느낌에 서둘러 세수하고 남아 있는 몽롱함을 마저 몰아냈다.

    욕실 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드는 것을 보니 이제 곧 날이 밝아올 시간이었다.

    “안나.”

    이제 막 잠에서 깬 듯한 필리프가 욕실 문을 열었다. 결 좋은 백금발이 부스스 헝클어져 있었고, 눈매에도 잠기운이 진득하게 남아 있었다.

    필리프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최대한 주의했지만, 그는 옆자리의 허전함을 늘 너무도 쉽게 알아차리곤 했다.

    “괜찮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어렵게 억지 미소를 만들어냈다.

    “조금 더 주무세요.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 시간은 더 남은 것 같아요.”

    “이리 와.”

    느리게 다가온 다정한 손끝이 안나의 뺌에 닿았다.

    “이제 괜찮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잖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늘 안심이 되는 그의 품 안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이상하게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상태를 살피는 카르멘의 품에 안겨 있는 내내 스테판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체온도 맥박도 정상이었기에 다른 이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 아이를 살피던 카르멘은 스테판의 입 안쪽에 작은 염증이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다. 육안으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염증이었다.

    현대 의약품을 쓸 수 없는 환경에서 최근 카르멘은 천연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연고를 개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스테판의 입 속에 연고를 바르자 조금씩 울음이 잦아들었고, 계속되는 울음에 지친 것인지 아이는 오래지 않아 금세 잠이 들었다.

    울음의 원인을 발견하고 치료를 마쳤지만, 안나의 불안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며칠 사이 부쩍 여윈 안나의 모습이 안쓰러워, 필리프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 확인했잖아. 이제 입 안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고.”

    “…….”

    “아이가 자라다 보면 아플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는 거야. 그럴 때마다 이렇게 잠 못 자고 걱정하면서 애태울 거야?”

    필리프는 평소 안나가 아이를 너무 과도하게 보호한다고 생각해 왔다. 제국 황실의 아이는 보통 유모의 손에서 길러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안나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절대 아이를 유모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

    “아직 말도 못 하는 아이를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사내아이를 과보호해 키우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혹여 안나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내내 피해왔던 대화였다.

    “큰 문제 없을 거라고 얘기 들었잖아. 그런데도 안심이 안 돼?”

    “정확한 검사를 해 본 것도 아니니까 당분간은 잘 살펴야 해요.”

    다시 그 소리였다. 정확한 검사.

    그녀가 살았던 곳과는 확연히 다른 이곳에서, 그곳에서라면 가능했을 검사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나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필리프가 보기에는 그랬다.

    아니, 어쩌면 후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저는 스테판에게 가 볼게요.”

    길게 한숨을 내쉰 안나가 필리프를 스쳐 욕실을 나섰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가 건강하게 세상 빛을 보았고, 안나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는 것에 성공했다.

    행복함에 가슴 속 가장 밑바닥까지 미뤄 두었던 불안감이 조금씩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그녀가 후회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필리프가 빠르게 욕실을 빠져나왔다. 안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요람 속을 살피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에서 행복이라는 감정은 읽히질 않았다.

    쿵쿵. 불안하게 심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 * *

    방 안에 후끈한 열기가 감돌았다. 계절이 봄으로 바뀌면서 자연히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던 벽난로와 화로가 계절에 맞지 않게 지펴진 탓이었다.

    커다란 침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온기를 살핀 안나가 창문을 열었다. 맨살에 와 닿는 바람 온도가 제법 훈훈했다.

    “안나.”

    침대 가까이 붙여 놓았던 요람을 창가 쪽으로 옮기려는데, 등 뒤로 다가온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서 요람 손잡이를 받아들었다.

    “오셨어요.”

    필리프가 습관처럼 안나의 이마에 입술을 내리며 물었다.

    “요람을 옮기려고?”

    “네. 이제 바람이 차지 않으니까 환기가 잘 되는 쪽이 좋을 것 같아서요.”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요람을 들어 창가 가까이 옮겨 놓은 뒤 화로와 벽난로를 확인했다.

    “스테판은 아직 검진 중인가?”

    “네. 곧 올 거예요.”

    매일 같은 시간 황궁 주치의에게 건강 상태를 진찰받는 스테판이 침실에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카르멘 말인데요. 아직 황궁의 승격은 결정되지 않은 건가요?”

    안나의 요구로 개인적인 의술을 행하고 있는 카르멘이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아직 그녀를 황궁 정식 의원으로 들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다음 달 황궁의 승격을 가리는 시험이 있어. 이 시험에 통과하고 수련을 거친다면, 아마 올해 가을쯤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해.”

    “……올해 가을이요?”

    황궁 주치의 자리는 오랫동안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카르멘이 승격 시험을 치르게 되기까지 필리프의 각별한 노력이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안나는 끝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실망했어?”

    “네? 아, 아니에요. 그간 폐하가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잘 알아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안나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미소를 띠었다. 필리프에게서 물러난 그녀가 바삐 창가 앞 요람 속 침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나가 얼굴에 드러내는 불안감을 파악하고,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에는 늘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만큼은 이상하게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답답함에 긴 한숨을 내쉬는데, 스테판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폐하. 황태자 전하의 검사가 끝났음을 알려드립니다.”

    보고를 올리는 수행원의 등 뒤로 하얀 실크 보자기에 감싸인 스테판을 안아 든 유모 수잔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 주세요.”

    수잔의 손에서 황급히 스테판을 받아 안은 안나가 그의 얼굴을 가린 보자기 틈을 벌렸다. 피곤한 것인지 스테판은 기다란 속눈썹을 느릿하게 끔뻑이고 있었다.

    “황태자의 상태는.”

    “체온도 맥박도 호흡도 모두 정상이십니다. 단, 지난주보다 체중이 좀 줄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것뿐인가?”

    “예?”

    “다른 이상은 없느냔 말이야.”

    필리프의 목소리에서 농도 짙은 짜증이 묻어났다. 흠칫 놀라 어깨를 수그린 수행원이 주치의의 진료 내용을 상세하게 읊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매로 수행원을 응시하던 필리프가 보고를 마친 그에게 턱짓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황제의 축객령을 들은 주치의와 유모가 기다렸다는 듯 침실을 나섰다.

    “체중이 조금 줄었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고 해. 내일 아침 카르멘을 불러 줄 테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때 묻는 게 좋겠어.”

    수행원을 대할 때와는 백팔십도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을 뱉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조금 지친 것처럼 느껴졌다.

    스테판은 안나의 품에서 잠투정 한 번 하지 않고 금세 고른 숨을 뱉기 시작했다. 아이가 좀 더 깊은 잠에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요람에 눕힌 안나가 욕실로 향하는 필리프의 등을 돌려세웠다.

    안나는 최근 며칠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느낌을 받았다. 필리프가 자신의 의견에 대부분 따라주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부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표현하지 않은 마음을 그가 모두 읽어 주길 기대했다. 그건 분명……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미안해요.”

    대뜸 안나의 입을 가르고 새어나온 말에 놀란 필리프가, 숙인 그녀의 고개 아래로 손가락을 넣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당신과 스테판은 내게 유일한 가족이에요. 목숨을 내놓아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안나.”

    “아이가 아프다고 했을 때 제가 원래 있던 곳을 떠올렸던 건 사실이에요. 그곳이었다면 아이가 왜 아픈지, 어디가 안 좋은지 더 빠르게 알아낼 수 있었을 테니까.”

    마음속 말을 내뱉지 않고 꽁꽁 묻어두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 자신이 한심했어요. 조금 더 공부했으면, 더 알아두었으면 아이를 덜 힘들게 했을 텐데…… 하는.”

    안나가 필리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빠르게 덧붙였다.

    “하지만 맹세코 그곳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나도, 스테판도 당신 없이는 완전해지지 못했을 테니까.”

    “…….”

    “제가 스테판을 과보호한다고 생각하시죠?”

    속내를 들켜 당황한 필리프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는 것이 보였다.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뱃속에서부터 너무 힘들었던 아이니까……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만요.”

    아무 말도 보태지 않고 안나의 말을 들은 필리프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싶어, 급히 말을 더하려던 순간 어깨가 붙잡히고 가슴이 끌어당겨졌다.

    “사랑해.”

    답을 하기도 전에 입술에 부드러운 접촉이 닿았다. 부드러운 입맞춤 사이사이로 그는 몇 번 더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며칠 동안 안나의 머릿속을 엉키게 했던 불안감을 녹이는, 주문 같은 속삭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