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차츰 힘을 주어 의견을 내기 시작한 대신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필리프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제국의 전통이니, 황후님과 동행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결혼식을 생략하신 것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이 도는 상황인데, 이번에도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지방 영지 시찰 일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찰 대상인 영지의 영주 대부분이 전쟁에 승리하는 데 현격한 공을 세웠기에, 특별 사절단을 마련해 방문하려는 계획을 세운 필리프였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 일정에 안나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단지 황후의 안전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야. 호위병을 늘린다고 해도, 아이를 동행한 장거리 이동은 위험할 수 있어.”
황제가 배우자를 맞으면 황후와 함께 지방 영지를 방문하는 것이 관습처럼 행해지고 있던 카마르 제국이었다.
필리프는 안나와 스테판의 안전을 이유로 두 사람과의 동행을 불허하려 했지만, 반대 세력은 쉽게 주장을 꺾지 않았다.
“폐하. 신중히 생각하셔야 할 문제입니다. 분명 불만의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지금은 더 단단히 입지를 다져야 할 시기입니다. 불만의 말이 나올 구실을 주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안나와 스테판을 황궁에 남겨두고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홀로 떠나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안심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사안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지친 기색으로 회의실을 나선 필리프가 향한 곳은 안나가 있는 검술 훈련장이었다.
“폐하. 사제들과 식사가 한 시간 뒤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음. 황궁에는 언제쯤 도착한다고 하던가.”
“예, 기마병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약 삼십 분 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안나가 황후가 되는 데 큰 힘을 실어준 사제들과의 특별한 만찬 자리였기에 직접 황궁 입구에서 그들을 맞이하기로 했던 필리프였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검술 수련을 받는 안나의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잠시만 머물렀다가 가는 것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폐하.”
걸음의 보폭을 넓혀 걷기 시작한 필리프가 빠르게 황궁을 빠져나가 중앙정원을 가로질렀다.
검술 훈련은 중앙정원 뒤쪽 호숫가 옆 공터에서 진행되었는데, 이는 커다란 나무들로 빽빽하게 가로막힌 다른 정원들과는 달리 황궁 내 그 어디에서도 쉽게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공터에 도착한 필리프가 안나를 찾아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손을 뻗을 때 특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황후 마마.”
필리프가 안나의 검술 선생으로 낙점한 자는, 한때 황궁 기사단 소속기사였던 빌터 스미르였다. 이십 년 전 기사단에서 물러난 그는 황궁 근처에서 기사단 입성을 원하는 어린아이들의 수련을 돕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검을 쥔 팔에 너무 힘을 주지 마시고, 검 끝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에 집중하며 팔을 뻗어야 합니다.”
“핫!”
“좋습니다. 절대 한 자세로 오래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자세는 단순한 출발점이 될 뿐입니다.”
훈련이 이루어지는 공터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발을 멈춘 필리프가 안나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했다.
팔목 정도 길이로 만들어진 목검을 들고 빌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그녀는, 날렵한 몸동작으로 빌터의 움직임을 따랐다.
검술에서 체격과 힘만큼 중요한 것이 날렵함과 순발력이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각종 동작을 수행하는 안나의 모습에 매료된 필리프가 저도 모르게 나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폐하. 송구하지만, 서둘러 떠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출발을 재촉하는 수행원의 말소리가 제대로 귓가에 닿지 않았다.
안나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칼을 뻗을 때 드러나는 완전히 집중한 표정. 전부 확실히 눈에 담아,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폐하.”
흘러내린 땀방울 때문에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 주고 싶은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발을 움직이려던 순간, 황궁 초입에서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흠칫 놀란 필리프가 안나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안나는 필리프가 근처에 나타났다는 사실도, 사제단이 황궁 초입에 도착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빌터의 구령에 따라 목검을 쥔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만 가지.”
황제의 뒤에 서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던 수행원이, 빠르게 뒤돌아선 황제의 뒤를 따랐다. 공터 모퉁이를 돌기 전 필리프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안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말간 얼굴에 봄 햇살이 가득 스며 있었다.
* * *
안나가 유모 수잔의 손에서 스테판을 받아 안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아이의 눈가와 입매가 모두 벌겋게 짓물러 있었다.
“그래, 그래. 우리 아기, 착하지? 응? 엄마가 안아줘도 싫어?”
스테판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평소 투정이 그리 심하지 않고, 무언가를 조를 때도 오래 울음을 이어가지 않았던 아이였기에, 어디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언제부터 이랬죠? 혹시 오늘 내내 이렇게 울었나요?”
“아닙니다, 황후 마마. 종일 아무렇지도 않으셨는데 식사 후부터 조금씩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주치의가 바로 진료를 보았지만, 확실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말씀해 주시지…….”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도 알지 못한 채, 신나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니.
속상함에 눈시울을 붉힌 안나가 스테판의 이마에 손등을 얹어보았다. 특별히 열이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이렇게 목을 놓아 울 아이가 아니었다.
“폐하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안나가 수행원을 바라보지 않고 물었다.
“예. 황제 폐하는 사제님들과의 만찬에 참석 중이십니다.”
황제 즉위 이후 사제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필리프가 며칠 전부터 중요한 행사라고 말했던 자리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안나의 머릿속에, 구세주가 될 만한 이의 얼굴이 스쳤다. 그녀가 수행원에게 고개를 돌려 다급히 말을 뱉었다.
“지금 당장 카르멘 아닐을 찾아와요. 아마 지금쯤 중앙 도서관에 있을 거예요.”
안나와 같이 미래에서 온 여인. 현대의 의술을 경험한 이에게 아이의 상태를 살피게 하는 것이 지금의 그녀로서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알겠습니다, 황후 마마.”
아이를 어르고 달래기를 계속해 봤지만, 스테판은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나의 초조함이 극에 달하기 직전,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후 마마. 카르멘 아닐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와요!”
스테판을 안은 채 문 앞으로 달려간 안나가 카르멘의 손을 잡아 붙들었다.
“아이, 우리 아이 좀 봐 주세요. 어디 이상이 있는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질 않아요.”
금방이라도 펑펑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을 한 안나의 얼굴을 바라본 카르멘이 스테판에게로 침착하게 시선을 내렸다.
“모두 나가 있어요. 내가 부를 때까지.”
“예, 황후 마마.”
안나가 카르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요람 가까이 다가갔다. 스테판을 요람에 눕힌 카르멘이 신중한 표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궁금한 것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카르멘을 방해할 수 없어 입술 끝만 잘근잘근 물어뜯기를 한참, 카르멘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우리 스테판…… 괘, 괜찮은 건가요?”
“속단하기 이릅니다.”
“……네? 그게 무슨…… 스테판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말인가요? 확실히 말을 해 주세요!”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요람 속 스테판은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지만, 제풀에 지친 것인지 울음소리가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이곳에서는 신생아를 위한 예방 접종을 할 수 없습니다. 아이의 상태를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는 데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자신이 살던 곳이었다면 당장 택시를 타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을 것이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의사의 진료를 받았을지 모른다. 답답함에 안나의 눈가를 비집고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열이 심하지 않은 것은 다행입니다. 조금씩 울음도 잦아들고 있으니까, 제가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찰해 보겠습니다. 먼저 제 진찰 가방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차분한 말투로 안나를 안심시킨 카르멘이 깊은 묵례 후 응접실을 나섰다. 혼자가 된 안나가 요람 앞에 서서 훌쩍이는 스테판을 달랬다.
“그래, 미안해. 엄마가 다 미안해. 많이 아픈 건 아니지? 응?”
훌쩍이느라 코밑으로 길게 늘어진 스테판의 콧물을 닦아주고, 울음 자국이 남은 아이의 얼굴 구석구석을 매만졌다.
“안나.”
스테판에게로 온 신경이 쏠려 있었던 탓에 문이 열리는 소리도, 그가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괜찮은 거야?”
검술 연습을 하고 돌아왔을 테니 신이 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안나의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안나의 어깨에 손을 얹은 필리프가 푹 숙인 안나의 고개 밑에 손가락을 넣었다. 내려다본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니, 왜.”
“스테판이, 스테판이…….”
말을 채 끝까지 잇지 못한 안나가 필리프의 품 안으로 무너지며 몸을 안겼다. 서러운 그녀의 눈물이 필리프의 가슴을 뜨겁게 적셨다.
“아니, 스테판이 왜.”
필리프가 안나의 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요람 속을 살폈다. 필리프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의 눈에서도 서러운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아아아아!!! 바바!! 바바!!!”
잠시 멈추었던 스테판이 다시 커다란 울음을 뱉어냈다. 안나가 화들짝 놀라며 요람 속에서 스테판을 안아 들었다.
필리프가 안나의 품에 안긴 스테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 닿는 뜨거운 열기에 놀라 얼굴을 굳히는데, 짧은 노크와 함께 응접실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