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31)화 (131/139)
  • 외전 5화

    “아앗!”

    “죄송합니다, 황후 마마. 많이 아프십니까?”

    안나의 코르셋을 조이던 몸단장 시종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마님의 허리에 맞게 새로 주문한 코르셋이라 다루는 것에 서툴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 괜찮아요. 어서 고개 들어요.”

    깊게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비는 시종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안나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기괴할 정도로 허리를 졸라맨 코르셋이 등과 가슴을 동시에 압박해, 제대로 숨을 쉬기도 벅찰 정도였다. 잠시 거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안나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오늘 코르셋과 파니에는 생략하도록 해요.”

    “……예? 하지만, 마마. 오늘 티 파티에 초대된 부인들이 모두 화려한 차림새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상관없어요. 드레스는 소맷단이 넓은 프릴 드레스로 준비해요.”

    황후의 말은 단호했다. 이에 더 말을 보태지 못한 시종이 황후의 허리를 졸라맸던 코르셋을 풀었다.

    “새로운 드레스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시종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서자 안나가 안락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두 시간째 이어지고 있는 치장이었다. 황후 책봉식 이후 황궁에 머무르는 귀족 부인들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요한 자리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과한 치장이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허리를 더 가늘어 보이게 하기 위해 치마 속을 부풀리는 용도의 속치마를 덧입고, 머리 위에 커다란 가채를 얹고, 분장 같은 두꺼운 화장을 하는 것이 귀족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치장이 된 사회였다.

    안나가 원래 살았던 시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과한 치장이지만,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해온 상황을 지금 당장 뒤집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나오려나.”

    수수한 화장을 한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안나가 뒤늦게 사교계에 퍼질 말을 걱정했다. 아직도 황궁 내부에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교계에 융화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아……. 복잡해, 너무 복잡해.”

    가뜩이나 이곳 사람들의 외모와 너무도 다른 자신의 외모에 관해 여전히 이런저런 소문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그저 잠자코 이 시대 사람들의 풍습과 관습을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일까?

    벗은 코르셋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후 마마. 말씀하신 드레스 준비했습니다.”

    “들어와요.”

    몸단장 시종의 손에 들린 수수한 드레스를 바라보던 안나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황후 마마. 오늘도 꽃처럼 아름다우십니다.”

    “그렇습니다, 마마. 입으신 드레스도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응접실에 모인 귀부인들이 안나를 바라보며 입에 발린 칭찬의 말을 늘어놓았다. 머리 위로 무거운 가채를 올린 귀부인들은,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차를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마마.”

    귀부인들이 상냥하게 웃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하나둘 찻물을 맛보던 부인들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좀 쓰지요?”

    부인들의 표정 변화를 읽은 안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아주 맛이 좋습니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귀부인들이 손사래를 쳤다.

    “아마도 익숙하지 않은 맛일 것입니다. 흰털 박하인데, 잎을 달여 차로 마시면 소화에도 좋고 기관지나 폐 질환에도 효과가 좋은 약초입니다.”

    보통 티 타임을 즐길 때면 향이 좋은 장미차나 레몬차를 마시곤 했던 부인들이었다. 여전히 반신반의한 표정을 짓는 부인들을 바라보던 안나가 입을 열었다.

    “일반적인 쿠키를 준비하려 했지만, 처음 부인들을 만나는 자리라 좀 특별한 것을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안나의 등 뒤에 서 있던 시종이 커다란 접시를 들고 응접실에 들어왔다.

    “드셔보세요.”

    접시에는 동그란 모양의 황갈색 쿠키가 놓여 있었다. 먼저 쿠키로 손을 뻗는 안나를 따라 하나둘 쿠키를 집어 입에 넣은 귀부인들이 저마다 낮은 탄식을 뱉기 시작했다.

    “음! 이게 무슨 쿠키입니까. 쿠키라고 하기엔 조금 부드럽고, 파이라고 하기엔 조금 딱딱한 것이 아주 맛이 독특합니다, 마마.”

    “너무 달콤하고 맛이 좋은데요? 살짝 시나몬 향이 나는 것 같습니다.”

    처음 맛보는 독특한 단맛에 우아함과 고상함의 가면을 벗어버린 부인들이 앞다투어 쿠키 접시로 손을 뻗었다.

    “차와 함께 맛보면 더 맛있을 것입니다. 달콤한 다과와 쌉쌀한 차의 궁합이 훌륭하거든요.”

    안나가 다과로 준비한 것은 약과였다. 한식당에서 일하며 외국인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디저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부인, 부인은 이미 두 개나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왜 이렇게 욕심을 부리십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체중을 줄이기로 했다고 하신 분께서.”

    안나가 준비한 다과 하나로 다소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누그러지고 있었다.

    “천천히 많이 드십시오. 넉넉히 준비하라고 일렀으니.”

    “예,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맛이 좋습니다, 황후 마마.”

    “이 디저트의 정확한 레시피는 저만 알고 있습니다.”

    “설마 황후 마마께서 직접 개발한 것입니까? 혹시 저희에게도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정신없이 약과를 맛보던 부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먼저 부인들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나가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을 직감한 부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숨을 죽였다.

    * * *

    아이 요람 손잡이를 잡은 채 부드러운 콧노래를 부르는 안나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던 필리프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 뒤로 이동했다.

    “새들도 아가 양도 다들 자는데.”

    잔잔한 노랫말은 아마 자장가인 듯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랫말이 너무 좋아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조금씩 노랫말이 속도를 늦추었고, 곧 요람 안에 있던 스테판이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래가 멈추었지만, 요람을 흔드는 안나의 손은 멈추질 않았다. 아이가 좀 더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부드럽게 요람을 밀던 안나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

    그제야 안나가 등 뒤에 선 필리프를 발견했다.

    “언제.”

    “쉿.”

    어렵게 재운 아이를 깨울 수야 없지.

    필리프가 안나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요람을 확인한 안나가 발가락을 세워 걸으며 침실을 빠져나왔다.

    “오늘 장관들과 만찬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만찬 코스를 줄인 것이 효과가 있었어. 예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그 지긋지긋한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거든.”

    일주일에 세 번 이상 계획되어 있는 업무 관련 저녁 식사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필리프는 식사 코스를 단순화할 것을 주방에 명령했다.

    고기가 주가 되며 보통 총 9가지의 코스로 이어지던 저녁 식사를 6가지 코스로 간소화하니, 평소 3시간 넘게 이어지던 식사 시간을 한 시간 일찍 마무리하는 게 가능했다.

    “관료들이 싫어하진 않던가요? 음식 욕심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수도원에서 받은 와인을 나누어 주었는데, 불만을 드러낼 수야 없었겠지.”

    수도원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보통의 와인에 비해 그 가치가 높았는데, 황궁에 공급되는 수도원 와인은 고급 귀족이라도 해도 함부로 맛볼 수 없게 극소량만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거 폐하가 아끼시는 와인이잖아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한 시간이나 늘어났는데, 그깟 와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필리프의 말에 수줍어하며 고개를 떨군 안나의 볼이 열감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다정한 손끝. 온종일 기다려왔던 온기였다.

    “오늘 티 타임에서 어떤 마법을 부린 거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 고고한 부인들이 황후의 칭찬을 잔뜩 늘어놓았다더군. 웬만해서는 다른 이에 대해 좋은 말을 하지 않는 부류들인데 말이야.”

    “아…….”

    오전 부인들과의 티 타임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안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간을 경험해 보았다는 사실을 무기로 삼아 부인들을 공략하려 했던 안나의 작전이 통한 모양이었다.

    “제가 있던 곳에서 알고 있던 지식을 좀 나눈 것뿐이에요. 별다를 건 없었어요.”

    “지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들이요. 폐하는 들으셔도 별로 관심을 가지진 않으시겠지만요.”

    처음으로 귀족 부인들과 만나게 된 안나를 내심 걱정했던 필리프였다. 혹시나 여자들의 시기와 질투, 견제에 의기소침해지진 않았을까 우려했는데, 그저 기우였던 모양이다.

    부인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무엇인지 물으려던 필리프가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되어 사교계로 첫발을 내딛는 그녀에게 그저 무한한 응원을 보내주고 싶었다.

    “와인 한잔 어때? 수도원 와인이 딱 한 병 남았는데.”

    “좋아요!”

    두 손을 모아 잡으며 반색하는 안나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 필리프가 수행원에게 와인을 가져달라 말한 뒤 안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스테판과 비슷한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다음 주부터 무술 배우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안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필리프가 단번에 표정을 굳혔다.

    “설마 이번에도 미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 정말 그러면 화낼지도 몰라요.”

    그녀의 목소리에 서서히 날카로움이 섞이고 있었다. 일단은 빨리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당연히 잊지 않았어. 정확한 일정이 나오면 말해 주려고 했을 뿐이야.”

    “뭐야. 잊으신 줄 알았잖아요.”

    상체를 뻗대며 필리프의 품 안을 빠져나가려던 안나가 몸에 힘을 풀었다. 맞춘 것처럼 품에 밀착하는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은 필리프가, 아직 정하지도 않은 안나의 무술 선생 리스트를 떠올리며 강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