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30)화 (130/139)

외전 4화

안나의 어깨에 닿은 필리프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노골적인 의도를 담지 않은 순수한 손놀림이었다. 그의 손이 어깨와 팔 근육을 주무르자, 종일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노곤하게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으음…….”

“어때? 좀 괜찮아?”

“좋아요, 너무.”

눈꺼풀을 내린 안나가 필리프의 가슴에 깊게 등을 기댔다. 한참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 마사지를 이어가던 필리프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나가 익히 아는, 노골적인 의도를 가득 담은 ‘나쁜 손’이 마사지가 필요 없는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아니, 저기 폐하. 거긴!”

“왜, 여긴 안 아파?”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한 목소리를 뱉는 것이 어이가 없어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이제 됐어요. 피로는 전부 풀렸으니까 그만하세요.”

“그럼 한잔할까?”

안나의 등 뒤에 바짝 밀착해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지분거리던 필리프의 손가락이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물기가 묻은 손은 욕조 뒤 낮은 찬장으로 이동했다.

“그건 또 언제 준비하셨어요?”

“아마 좋아할 거야. 이번엔 제대로 준비하라고 말했으니까.”

찬장에 있던 크리스털 잔을 안나의 손에 들려준 필리프가 살짝 몸을 일으켜 술병을 집었다. 뚜껑을 열자 달콤한 사과 향이 욕실 전체에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술잔에 술을 반 정도 채운 그가 어서 마셔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상체를 살짝 틀어 부드럽게 올라간 필리프의 입꼬리를 응시한 안나가 차가운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한 모금 머금은 술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도수가 높았다.

“어?”

놀라 급하게 다시 잔을 기울이는데, 밀착한 몸으로 나직한 진동이 전해졌다. 안나가 빠르게 입안의 술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술병을 쥔 그가 웃고 있었다.

“독주를 좋아하는 건 참 의외란 말이지.”

“네?”

“내가 그랬잖아. 좋아할 거라고.”

이곳에서 마셨던 술은 대부분 알코올 향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순했다. 술을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술다운 술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그는 그런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던 듯했다.

“도, 독주를 크게 좋아하는 게 아닌데. 원래 제가 있던 곳에서는 이 정도는 그렇게 독한 편이 아니라서요.”

“아, 그래? 맛은 괜찮고?”

“네? 아, 네. 뭐 맛은 괜찮은데…….”

“더 마셔. 당신을 위해 준비한 건데.”

적당한 온도와 도수의 술이 따뜻하게 데워진 몸에 온기를 더해주었다. 당장 술잔을 말끔히 비우고 다시 한 잔 가득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랬다가는 그의 눈에 술고래로 비칠 것 같아 잔을 쥔 손을 망설였다.

그때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 들려있던 잔을 우아하게 낚아채 액체를 가득 머금었다. 술을 삼키는 목울대를 보려 크게 고개를 트는데, 순간 몸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닫힌 안나의 입가에 따뜻하고 폭신한 입술이 먼저 닿았고, 예상하지 못한 입맞춤에 놀라 입술이 벌어지는 순간 곧 미지근한 액체가 입 안으로 쏟아지며 밀려 들어왔다.

그의 입 안에서 풍기는 달콤한 사과 향이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혓바닥을 밀어 넣었다. 맞닿은 혀에서는 자신이 마셨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알코올 향이 풍겼다.

기다렸다는 듯 맞물려온 혓바닥이 능숙하게 입 안 곳곳을 유영하며 움직였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혓바닥이었다.

필리프의 어깨에 둘렀던 손을 내린 안나가 그의 몸을 살짝 밀어내는데, 그는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능숙하게 각도를 바꾸며 고개를 틀었다. 길게 빼낸 혀가 안나의 입술 전체를 빨아들였다.

안나의 허리를 잡았던 필리프의 손이 그녀의 어깨로, 다시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이동했다. 손가락이 그대로 흘러내릴 정도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힘주어 잡고 혀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마치 앓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 아아아…….”

긴 키스가 이어졌다. 안나의 입 안 구석구석 흔적을 남기려는 듯 잇자국을 새겨넣은 필리프는, 부족한 숨을 참지 못한 안나가 발버둥을 치고서야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하아…….”

어느새 욕조 안 수온이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화들짝 놀란 필리프가 안나의 몸을 안아 욕조를 빠져나오게 했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연신 가쁜 숨이 뿜어져 나왔다.

“자, 내가 닦아줄게.”

“아, 아니에요. 이리 주세요.”

안나가 굳이 몸의 물기를 닦아주겠다고 자청하는 필리프를 피해 멀찌감치 물러났다. 빠르게 물기를 닦고 욕실 입구에 걸려 있던 침의를 걸치는데, 등 뒤에서 뻗어진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강하게 휘어 감았다.

“저기, 폐하.”

“이제 나갈까?”

“스테판은.”

“말했잖아. 곤히 잠들었다고.”

필리프의 손이 안나의 등을 휘감아 침실로 향했다. 여전히 그의 몸은 나신이었다. 굳이 고개를 올려 그의 눈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자, 잠깐.”

“내가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당신과 단둘이 남게 될 시간을.”

느릿하게 말끝을 내리며 웃은 필리프가 살짝 벌어진 안나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단단한 손바닥이 여린 허벅지 안쪽을 느리게 쓸어 올리자, 그녀의 몸이 튕겨 나가버릴 것처럼 경련했다.

“단상에 서 있을 때, 전혀 떨지 않던데?”

귓가에 뜨거운 그의 숨결이 닿았다. 안나가 밀착한 몸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의 팔과 다리가 더 단단하게 그녀를 옥죄었다.

“하으……. 아, 아뇨, 그게.”

“하긴. 생각해 보면 당신은 늘 담대했지. 내가 놀랄 정도로.”

필리프가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안나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진득한 손길에 온몸이 고장 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필리프.”

안나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동시에 그녀의 등이 부드러운 침대 매트리스에 닿고, 그 움직임으로 인해 생겨난 바람이 침대 옆 촛불을 꺼트렸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어둠에도 필리프는 손쉽게 안나의 침의를 벗겼다. 나신이 된 몸에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빠듯하게 밀착된 그의 몸이, 온기가 식을 틈을 주지 않았다.

“하아…….”

필리프가 내뱉는 뜨거운 숨이 안나의 목덜미를 습하게 적셨다. 살짝 고개를 내린 그는 흥분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안나가 급하게 입가로 손을 가져가며 신음을 막으려 했지만, 손바닥이 입술에 닿기 전 필리프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핫.”

“쉬이. 괜찮아.”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전처럼 온전히 정신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필리프가 안나의 입술을 부드럽게 쓰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아랫입술을 강하게 베어 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하루 정도는 우리 둘만 생각해도 괜찮지 않아?”

“…….”

“오늘 하루만.”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안나가 필리프와 눈을 맞췄다. 아름다운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애써 흥분감을 감추면서도 자신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대하는 눈동자. 밀착한 그의 하체에 조금씩 묵직함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대답해. 그래도 괜찮지?”

귓가에 간절한 속삭임과도 같은 말이 뜨거운 숨과 섞여 흘러들어왔다. 습한 목소리에 온몸이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았다.

짙어지는 흥분감에 목구멍이 잠겨 제대로 된 답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안나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필리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뻗었다.

“왜 몸을 떨어.”

이상하게 긴장되는 몸이 좀처럼 힘을 풀지 못했다. 빳빳하게 굳은 안나의 허벅지 사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필리프가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묻으며 낮게 물었다.

“그냥, 이상하게 너무 긴장되어서요.”

안나가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필리프가 바르르 떨리는 안나의 목덜미에 입술을 닿았다 떼어내며 속삭였다.

“안심해. 나도 마찬가지니까.”

필리프가 안나의 허리 사이에 손을 넣고 그 안으로 베개를 밀어 넣었다. 허리에서 자연스럽게 힘이 빠지면서 단단하게 굳어 있던 하체 근육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빙긋 웃은 그의 얼굴이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귓바퀴, 이마, 코,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내린 그가 안나의 가슴을 타고 내려가 납작한 배와 튀어나온 갈비뼈에 진득하게 입술 자국을 남겼다.

뜨거운 혓바닥이 머문 자리마다 새빨간 자국이 남았다. 필리프가 안나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며 입맞춤을 이어갔다. 그의 입술이 척추뼈를 자근자근 훑고 어깻죽지를 쓸어내리기 시작하자, 안나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흐르기 시작했다.

“으으음……. 필리프.”

묵직한 하체의 반응을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필리프가 안나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상하로 크게 뒤틀리는 안나의 잘록한 허리를 단단히 잡아 고정하고, 힘을 싣지 않은 채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완벽하게 맞닿은 두 사람의 몸 곳곳 뜨거운 땀방울이 솟았다. 땀에 젖은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각자의 몸을 결박하듯 안았고, 감정을 숨기지 않은 신음이 쉴 새 없이 입술 틈을 갈랐다. 감정을 숨기지 않은 신음을 마음껏 뱉어냈다.

“하아……. 안나. 안나…….”

필리프가 안나의 눈에서 흐르기 시작한 눈물과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흐른 타액을 남김없이 핥아내며 성마른 움직임을 이어갔다.

눈물방울이 떨어져 나간 눈꺼풀을 깜박인 안나가 더듬더듬 손을 올려 필리프의 등을 끌어안았다.

움직임에 점차 속도가 붙고 절정의 시간이 올 때까지 머릿속 생각을 모두 비운 채 몰아치는 쾌락이란 감각에만 집중했다.

진하고 뜨거운 감각이 몸과 머리를 적시는 순간, 필리프와 안나는 서로의 몸을 부서뜨릴 것처럼 강하게 끌어안고 동시에 사랑한다는 말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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