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9)화 (129/139)

외전 3화

황후 책봉식 당일은 화창하고 맑았다. 커다란 창으로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금빛 햇살 아래, 안나의 곁으로 대여섯 명 정도의 착복 시종이 자리했다.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황후 마마.”

“드레스도 화장도 완벽합니다, 마마.”

시종들의 찬사에 멋쩍어져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던 안나가 커다란 전신 거울로 자리했다. 책봉식이 열리는 광장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하는데, 문가에 서 있던 필리프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폐하.”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필리프가 안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안나에게서 뒷걸음질로 물러난 착복 시종이 방을 나서자 필리프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황후.”

제 오른손에 얹어진 안나의 손을 잡은 필리프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마르 제국 전통에 맞춰 준비된 황금빛 마차를 보니, 드디어 안나를 황후로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 났다.

“설마 긴장이라도 하시는 건가요?”

평소보다 긴장한 듯 보이는 필리프는 연신 헛기침을 뱉고 있었다.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안나가 평소보다 한층 높은 톤의 목소리로 물었다.

“긴장이라니. 전혀.”

필리프는 안나의 말 한마디에 금세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황궁 복도를 지나고 중앙 출입구에 마련된 마차 앞에 도착했다.

“잠시만요.”

안나가 마차에 오르기 전 유모의 품에 안겨 있는 스테판을 안아 들었다. 필리프와 같은 예복을 차려입은 스테판은 제법 씩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아가. 조금만 참으면 엄마가 맛있는 거 줄게. 알았지?”

“마마! 마마!”

터질 것처럼 토실토실한 스테판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은 안나가 먼저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도 외관과 같은 황금빛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와……. 엄청난데요? 의자도, 장식도 전부 금색이에요.”

“카마르 제국의 전통이야. 제국의 중요한 행사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황금빛으로 꾸며져야 해. 지금은 금보다 비싼 보석이 많지만, 이 나라가 세워질 무렵에는 금보다 비싼 것이 없었으니까.”

간단한 설명을 마친 필리프가 잡고 있던 안나의 손을 끌어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손에서는 향기로운 장미 향이 풍겼다.

“스테판은 괜찮겠죠? 우리 오페라 보러 갔다 왔을 때도 유모님을 굉장히 힘들게 했다고 하던데.”

“내 생각에는 그 녀석이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더군. 내가 당신을 대중 앞에 처음 공개할 때도 엄청나게 얌전했던 것을 보면.”

“아, 맞다. 그랬었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책봉식이 열릴 샤를 광장이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광장 주변에 모인 시민들의 행렬을 보는 순간, 안나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얗게 질린 안나의 얼굴을 흘끔 바라본 필리프가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단상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 책봉식 자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테니까.”

“하아……. 네.”

“내가 내내 곁에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맞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흔들리거나 휘청이지 않게 손을 잡아 줄 그가 바로 곁에 있으니. 온몸을 꽉 잡아 옥죄는 듯한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한꺼번에 사그라들었다.

마차의 외관으로 마차 속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마차가 지나갈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덕분에 쉼 없이 달린 마차는 빠르게 샤를 광장 초입에 도착했다.

“자. 천천히.”

먼저 마차에서 내린 필리프가 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재빨리 안나의 드레스를 받쳐 들었고, 두 사람이 꽃가루와 은화,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황후 마마!”

먼발치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시민들이 열광적인 함성을 쏟아냈다. 상상하지도 못한 환대에 놀란 안나가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에서 조금씩 힘을 풀었다.

광장 중앙에 마련된 커다란 단상 역시 황금으로 꾸며져 있었다. 단상 바로 아래에는 제철 과일과 곡식이 한가득 놓여 있었고, 사제를 위한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자, 이제 사제에게 축복의 말을 들으면 돼. 할 수 있겠지?”

내내 잡고 있던 필리프의 손을 잠시 놓아야 할 시간이었다.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얼굴 가득 웃음을 매단 안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마르 제국 황후 마마를 위해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긴 기도문 끝에 황후를 향한 축복의 말을 뱉은 사제가 금빛 잔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광장 중앙에서 사제가 건네는 잔을 받아든 안나가, 잔 속의 술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와아아아아!!!”

“황후 마마 만세!!!”

안나가 술을 마심과 동시에 참았던 시민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오른손을 들어 감사 인사를 전하는 안나의 곁으로 다가온 필리프가 그녀의 허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필리프의 눈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단상 가장 끝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 앞에서 차분하게 소감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가득했지만, 그 속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살며시 눈을 내리감은 필리프가, 제국의 새로운 황후에게 신의 충만한 사랑이 함께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 * *

“하아아…….”

자리에 참석한 사제, 관료, 귀족들과 한 명 한 명 인사를 주고받은 안나가 녹초가 된 표정으로 필리프 앞에 섰다.

“이제 전부 끝났어. 몸은 괜찮아?”

“좀 지치긴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빨리 끝난 것 같아요.”

“오늘 너무 멋졌어. 놀랄 정도로.”

“멋지긴요. 어? 그런데 스테판은 어디 있어요?”

내민 필리프의 손을 잡은 안나가 스테판을 찾아 바삐 눈동자를 돌렸다.

“아직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데? 내가 좀 전에 확인했어.”

“아니, 아직도요?”

관료들과 인사를 나누기 전, 마지막으로 스테판을 확인했을 때도 요람 안에서 얌전히 잠을 자고 있었으니,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놀아달라고 조를 것이 분명했다.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얹은 안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 황후 마마.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필리프의 수행원이 광장 우측 중앙에 마련된 마차를 가리켰다. 광장으로 향할 때는 금빛으로 도배되어 있던 마차가, 이제는 색색의 빛깔로 화려하게 꾸며진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앞으로 카마르 제국의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황후의 전용으로 쓰일 마차였다.

“자, 먼저 타시죠. 황후 마마.”

장난기 어린 필리프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안나가 마차에 올랐다. 이곳에 올 때와는 다르게 황궁으로 향할 때는 홀로 마차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살짝 겁을 먹었지만, 이제는 누구 앞에서도 담대한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애써 표정을 단속했다.

마차의 휘장이 내려가고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동안 미뤄 두었던 피로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괜찮다고, 긴장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황후 임명식을 준비하는 내내 걱정으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조금만 눈을 감아 볼까?

열린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을 느끼며 안나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톡톡.

“으음…….”

무언가 얼굴을 부드럽게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힘겹게 감았던 눈을 뜬 안나의 시야에는 여전히 짙은 어둠이 잡혔다.

“많이 피곤해?”

“……으응?”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마차의 움직임은 완전히 멎어 있었고 비어 있던 옆자리에 필리프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

“도착한 지 십 분쯤 지났어.”

“에?”

안나가 화들짝 놀라며 반쯤 감았던 눈을 뜨고 기대 있던 등받이에서 상체를 떼어냈다.

“피곤해 보여서 깨우고 싶지 않았는데, 제국의 황후를 마음대로 안고 들어갈 수는 없어서.”

“아, 저 괜찮아요. 일찍 깨우지 그러셨어요.”

세상에. 그새 긴장이 풀려 정신 놓고 잠이 들어버리다니. 마부며 시종들이며, 다들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수치심이 끓어올라 안나가 뺨을 붉게 물들였다. 안나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잠시 황후와 대화할 것이 있다고 최소한의 시종만 남겼어. 스테판은 목욕하러 미리 올려보냈고. 자, 이제 올라갈까?”

자신의 머릿속 생각을 속속들이 읽어 주는 든든한 남자의 손을 잡은 안나가 마차를 빠져나왔다.

부쩍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끌다시피 침실에 도착하는데, 침실 옆 욕실 문 앞에 방금 목욕을 마친 스테판의 뽀송뽀송한 얼굴이 보였다.

“마마! 바바!”

안나가 살짝 물기가 남은 아이의 몸을 안아 들려 손을 뻗는데, 필리프가 한발 앞서 스테판을 받아들었다.

“당신은 먼저 목욕 시중을 받아.”

“네?”

“피로를 푸는 게 먼저니까. 자, 어서.”

필리프에게 떠밀려 들어간 욕실 욕조에는 김이 올라오는 물 위로 향유와 꽃잎이 가득 담겨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모조리 벗어 던지고 욕조 안에 들어간 안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따뜻한 수온에 다시 또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았다. 시중을 돕는 시종들을 모두 욕실 밖으로 내보낸 안나가 길게 기지개를 켜며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똑똑.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손의 주인을 예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상대는 들어오라는 말을 뱉기가 무섭게 욕실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아이는요?”

“정말 신기한 일이야. 오늘은 꽤 각오했는데, 품 안에서 바로 잠들더군.”

필리프가 걸치고 있던 공단 가운을 벗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근육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몸이 허락 없이 욕조 속을 침범했다.

“아, 왜. 좁은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안나의 어깨를 당겨 안은 필리프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수고했어요, 황후.”

뜨거운 혀가 벌어진 입술 틈을 부드럽게 넓히며 밀려 들어왔다. 그의 커다란 가슴에 그대로 몸을 맡긴 안나가, 혀끝으로 교환되는 따스한 숨결을 남김없이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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