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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8)화 (128/139)

외전 2화

재촉하지 않으려 했지만, 오페라가 시작할 시간이 목전으로 다가와 있었다. 드레스 룸 밖을 줄곧 서성이던 필리프가 살짝 열린 문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이야?”

“아, 이제 거의 다 됐어요. 금방 나갈게요.”

발랄한 안나의 음성에는 왠지 모를 흥분감이 어려 있었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에 흐뭇하게 미소 지은 필리프가 문에서 멀찌감치 물러섰다.

그리고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

머뭇거림이 섞인 목소리를 듣자마자 필리프는 바로 등을 돌렸다.

“…….”

드레스 룸 문을 열고 나온 안나에게서 눈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늘 단정하게 묶었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그녀는 눈처럼 새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고운 빛의 홍조가 가득 스며 있었다.

“오랜만에 화장해 봤는데…… 아무래도 좀 어색하죠?”

아몬드 가루가 더해진 백분을 얼굴에 바르고, 연지벌레를 갈아 만든 장밋빛 염료로 뺨과 입술에 생기를 주었다. 거기에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던 화장용 연필로 눈가에 선명한 검은색을 입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어색해서 드레스 룸을 나서기를 망설였던 안나였지만, 고대해 왔던 오페라에 늦을 수는 없었다.

“너무 이상하면 금방 지울게요. 잠시만,”

“이상하다니.”

필리프가 다급히 안나의 말을 끊었다.

“아름다워. 너무나.”

살짝 드러나는 새하얀 목덜미에 대비되는 장밋빛 볼과 입술이 관능적이면서도 청순해 보였다. 찬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운 안나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수행원의 목소리에 필리프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제 갈까?”

“네.”

마음 같아서는 오페라 감상을 취소하고 그녀를 온종일 감상하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오페라 감상을 기대하며 아이처럼 설레하던 안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네?”

안나와 나란히 보폭을 맞춰 걷던 필리프가 뒤를 따르던 수행원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왜, 무슨 일이세요?”

“음. 아무것도.”

말을 얼버무리는 태도가 어쩐지 조금 수상했지만, 더 캐묻지 않고 바삐 발을 옮기는 필리프를 따라 걸었다. 홀을 지나쳐 동쪽 출입구에 마련된 화려한 마차를 보는 순간, 안나의 심장이 기대감에 쿵쿵 뛰어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저 오페라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거든요.”

“왜, 당신이 살던 시대에는 오페라가 없었어?”

“아뇨. 있었는데 엄청 비싸요. 오페라뿐만 아니라 연극, 뮤지컬도 너무 비싸서 제 처지에 보는 건 무리였으니까요.”

“그래?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면 더 자주 보러 가야 하겠는데?”

온종일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한 끝에 가까스로 둘만의 시간을 마련한 필리프였지만, 안나가 지금처럼 밝게 미소 짓는다면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일을 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오늘 회의는 거의 네 시간 동안 이어졌다고 들었어요.”

“음. 아무래도 금요일 국정 회의는 늘 회의 시간이 길어지니까.”

“피곤하지 않으세요?”

걱정스러운 안나의 목소리에 필리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예전에도 한 번 얘기하지 않았어? 난 지금까지 지쳐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또 시작이다. 이 남자의 허세.

“뭐지, 그 표정은? 못 믿겠다는 거야?”

“아뇨.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지쳐본 적이 없다는 말은 좀…….”

“그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늘 새벽 5시면 절로 눈이 떠졌던 사람이야. 매일 함께 훈련하는 기사들이 지쳐 떨어져 나갈 때도 오직 나만이 쌩쌩했었다고.”

지금 그의 말에 동의해주지 않으면, 분명 전쟁을 겪으며 있었던 일을 세세히 읊고도 남았다. 터지려는 웃음을 꾹 눌러 삼킨 안나가 열변을 토하는 필리프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대단해요,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살짝 굳어 있던 필리프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니, 뭐.”

신하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근엄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남자가,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이렇게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에 새삼 안나의 가슴이 뻐근하게 부풀어 올랐다.

“아, 맞다. 아까 수행원과는 무슨 얘기를 하신 거예요?”

“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

이번에도 필리프는 빠르게 말을 얼버무렸다. 안나의 궁금증이 풀린 것이 마차가 오페라가 열리는 돔 공연장 앞에 멈춘 이후였다.

“여기 있습니다, 폐하.”

“음.”

황제를 뒤따르던 마차에서 내린 수행원이 필리프의 손에 챙이 넓은 상아색 모자를 건네주었다.

“자, 이걸 쓰도록 해.”

“……네?”

안나가 무작정 머리에 모자를 씌우려는 필리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 갑자기 웬 모자예요?”

“아무래도 지금 당신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네?”

“나만 봐야 겠다는 말이야.”

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한 번에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차마 신하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황제와 실랑이를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안나가 불퉁한 표정으로 필리프의 손에 들린 모자를 받아들었다.

“자, 그럼 이제 들어갈까?”

커다란 모자를 쓴 안나의 모습에 뿌듯한 미소를 머금은 필리프가 살짝 굽힌 팔을 내밀었다. 그가 내민 팔 안쪽 공간으로 팔짱을 낀 안나가 극장을 향해 발을 옮겼다. 사위에 얕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황금빛 노을이 발을 내딛는 길에 불빛을 내어주었다.

마차를 세운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왕립 대극장 주변은 화려한 치장을 한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필리프와 안나가 극장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한 귀족들은 하나같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폐하. 이쪽에 앉으십시오.”

호위병이 무대 바로 앞 커다란 의자 두 개가 놓인 곳으로 필리프와 안나를 안내했다. 화려한 비단이 깔린 의자는 장시간 앉아 있어도 불편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편안했다.

“와, 무대가 엄청나게 커요! 앗, 저기가 배우들이 나오는 곳인가 봐요. 붉은 천이 있는 곳이요.”

안나가 아이처럼 들떠 무대 곳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뜬 그녀의 모습만을 계속 바라보고 있어도 좀처럼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어? 곧 시작하려나 봐요.”

막이 오르는 것을 알리듯 극장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꿀꺽 침을 삼킨 안나가 급히 모자를 벗고 무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씩 무대가 밝아지며 청아한 아리아가 극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지만, 필리프의 시선은 줄곧 안나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실 오페라 자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필리프였기에, 안나가 아니었다면 좀처럼 걸음하지 않았을 극장이었다.

남자 주인공이 무대에 오르면서 여자 주인공과 만들어 낸 환상적인 화음에 감동한 것인지, 안나가 두 손을 모으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집중해서 살짝 벌어진 안나의 입술을 바라보던 필리프의 얼굴에 차츰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에, 오페라의 내용이 들어올 리 없었다.

이 극이 원래 이리도 긴 극이었었나? 안나에게 기초 내용을 설명해 주려 일부러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극을 골랐는데, 처음 극을 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지루함을 지금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내내 극에 집중하지 못하는 필리프가 걱정스러운지 안나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속삭였다. 그녀의 집중을 방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저은 필리프가 우측에 고정되어 있던 고개를 무대로 돌렸다.

갖은 고난을 겪은 이후 서로를 향한 변하지 않을 사랑을 확인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서로를 향해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길고 길었던 극이 마무리되었다.

극이 끝남과 동시에 관객석에서 환호성과 갈채가 터졌고,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관객들을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배우들을 향해 그 누구보다 힘찬 박수를 보낸 안나가 흥분이 깃든 표정으로 필리프를 돌아보았다.

“정말 멋져요. 오페라가 이런 것인 줄은 처음 알았어요! 왜 그렇게 입장권이 비싼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요.”

안나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한동안 오페라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팔에 힘을 가득 실어 안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순히 딸려온 몸과 호흡이 교환될 정도로 가까워진 빨간 얼굴. 필리프의 입술이 닿은 안나의 뺨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졌다.

“이제 돌아갈까?”

예상하지 못한 입맞춤에 놀라 동그랗게 눈동자 크기를 키운 안나가 벗어 두었던 모자를 뒤집어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자, 레이디.”

그와 왈츠를 추었을 때가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선 필리프가 한 손은 허리 뒤로, 다른 한 손은 안나의 가슴 아래로 내밀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 무릎을 굽혔다 펴며 그의 손을 잡은 안나가 호위병들의 뒤를 따라 극장을 빠져나왔다.

“날이 정말 좋아요. 따로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될 날씨에요.”

하늘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지만, 바람에는 얼굴을 부드럽게 간지럽힐 정도의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맞잡은 손에 닿은 체온도 더없이 따뜻했다.

“근처에 괜찮은 선술집이 있다고 하는데, 어때? 함께 한잔하고 들어가는 건.”

안나를 에스코트해 먼저 마차 안에 앉게 한 필리프가 창문 휘장을 걷으며 물었다.

그와 단둘이 선술집에 앉아 그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너무 오래 스테판을 떠나 있었다는 생각에 안나는 빠르게 마음을 돌렸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 우리 돌아가서 한잔해요. 폐하가 좋아하시는 벌꿀 주로.”

안나가 뱉을 답을 예상하였다는 듯, 필리프가 쉽게 단념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잠깐, 잠시 후에 타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마차에 오르려는 마부에게 대기하라는 신호를 보낸 필리프가 안나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뭐지?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에 당황하며 질끈 눈을 감는데, 모자에서부터 이어진 빳빳한 천이 안나의 얼굴을 스쳤다.

“어?”

열었던 마차의 휘장을 내린 필리프가 안나와 눈을 맞추었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눈동자는 지금껏 그가 봐온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레이디.”

“…….”

“입 맞춰도 되겠습니까?”

허락하듯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이 느릿하게 감기었다. 아주 소중한 것을 대하듯 안나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잡은 필리프가 그녀의 얼굴 위로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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