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5)화 (125/139)
  • 125화

    “이 정도 상처라면 상처 연고 하나면 거뜬했을 텐데요.”

    “그러니까요. 사실 저도 이곳에 와서 가장 아쉬운 것이 의약품이에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말 편리한 시대에 살았던 것 같아요.”

    사냥제 준비로 산에 올랐다가 찰과상을 입은 필리프의 상처를 살피던 안나와 카르멘이 대화를 나누었다. 필리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상처 연고? 상처 연고라면 이곳에도 충분히 많이 있는데?”

    필리프의 말을 들은 카르멘과 안나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빠르게 웃음을 갈무리한 안나가 세운 필리프의 무릎을 부드럽게 쓸었다.

    “미래에는 훨씬 더 효과가 좋고 사용이 편리한 연고가 나오거든요. 원한다면 누구나 언제든 연고를 살 수도 있고요. 자, 폐하. 카르멘에게 상처를 좀 더 자세히 보여 주세요.”

    시간의 문이 닫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르멘 아닐은 한동안 절망감에 사로잡혀 미친 사람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안나는 매일 같은 시간 카르멘을 찾았고, 그녀의 악다구니와 한풀이를 싫은 표정 하나 없이 받아주었다.

    안나는 카르멘이 느꼈을 절망감을 이해하고, 그녀가 마음의 빗장을 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런 안나의 노력이 통했는지, 카르멘은 열흘이 지난 후 자신을 가두었던 방에서 걸어 나와 안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국군 병원 간호사로 일하셨으면, 이런저런 수술에 많이 참여하셨겠어요.”

    “수술을 제가 직접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의사가 집도하는 장면을 정말 많이 보긴 했었어요. 그리고 야간 대학에 다니면서 의사가 되기 위한 준비도 해왔어요.”

    카르멘 아닐은 국군 병원 간호사로 20년 이상 일해 온 여인이었다. 안나는 필리프에게 카르멘을 황궁 보조 주치의로 들일 것을 제안했다. 현대의 의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카르멘이 황궁 의술에 분명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서였다.

    안나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카르멘의 의술 실력 자체에 의문을 가졌던 필리프였다. 그랬던 필리프가 마음을 돌린 것은, 카르멘이 수행원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본 이후였다.

    빠르게 상처의 원인을 파악하고, 출혈 부위를 압박해 길게 찢어진 상처를 꼼꼼하게 꿰매는 모든 과정에 다른 주치의의 절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상처를 꿰매는 것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도구로 쓸만한 재료를 찾아 소독해 놓은 것이 다행이었어요. 흉터는 좀 남겠지만, 상처는 곧 아물 것입니다.’

    세심하게 필리프의 상처를 살피고 소독을 마친 카르멘이 필리프와 안나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확실히 실력은 있는 것 같아.”

    “그렇죠? 다른 황궁 주치의들의 반대는 아직 많이 심한가요?”

    “아무래도 오랫동안 남자들만의 공간이었던 곳에 갑작스레 여자를 들이는 것이 이해되지 않겠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네.”

    카르멘을 설득해 이곳에서 의술을 행할 수 있게 설득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녀를 확실한 황궁의로 들이기까지는 많은 관문이 남아 있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겠죠. 그리고 카르멘도 그리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참 다행이에요. 그녀가 다시 삶의 원동력을 찾았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무심코 시계를 올려다보다 깜짝 놀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 시간이 벌써? 저희 가 봐야 할 시간이에요. 걸으실 수 있으시겠어요?”

    “이 정도로 가벼운 상처에? 호들갑 떨 일도 아니었어. 가만히 두면 자연 치유될 만한 상처였는데.”

    호기롭게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 위로 두꺼운 재킷을 걸쳐 주었다. 마침 방문을 두드린 유모가 두 사람의 품에 스테판을 안겨주었다.

    “우우… 바바…….”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못내 억울한지, 안나의 품에 안겨 한참 투정을 부리던 스테판이 필리프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요즘 이 녀석이 당신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필리프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에 매달리는 스테판의 등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미리 준비해 온 꾸러미를 챙겨 들었다.

    “그럼 이건 제가 들게요.”

    “무슨. 너무 무거워서 안 돼.”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서 꾸러미를 빼앗아 등 뒤에 선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별로 안 무거운데.”

    “자, 당신이 잡아야 할 것.”

    안나의 손목을 부드럽게 쓸고 내려간 필리프의 손끝이 가볍게 그녀의 손등을 쓸어 벌어진 손바닥 안쪽을 파고들었다. 깍지를 낀 손가락에 단단하게 힘이 실렸다.

    “이제 갈까?”

    세 사람이 향한 곳은 황궁 밖 중앙 정원 안쪽, 수풀과 키가 큰 나무들로 가로막혀진 공간이었다.

    필리프는 자신이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홀로 찾아 생각을 정리하곤 했던 이곳을, 이레네를 위한 공간으로 꾸미기로 했다.

    “자, 발밑을 조심해. 어제 내린 비로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네.”

    수풀로 가려진 공간으로 들어선 필리프가 안나의 손을 놓고 스테판의 몸을 받쳐 안았다. 길게 늘어진 수풀에 시야가 보이지 않아 안나의 손을 잡고 이동할 수가 없었다. 필리프가 발끝에 온 정신을 집중하며 수풀 틈 사이를 통과했다.

    “아…….”

    원래 있던 작은 연못 바로 옆에 있던 테이블과 의자가 사라진 공간을, 다양한 종류의 약초들이 채우고 있었다.

    “습기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약초들이라 이곳에서도 잘 자랄 거야.”

    건강하게 자라난 약초를 훑어보던 필리프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비석을 세우지 않은 게 맞는 일이었던 것 같지?”

    “그럼요. 유모님은 돌아가신 게 아니니까요. 언제라도 그분이 원하시면 예고 없이 이곳을 찾아주실 거예요.”

    안나가 허리를 굽혀 길게 자라난 약초 주변의 잡풀을 정리하고 들고 온 커다란 꾸러미 속 내용물을 꺼냈다.

    “이 꽃은 폐하께서 직접 전해 주세요. 유모님이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안나가 스테판을 받아 안으며 필리프의 손에 꽃다발을 들려주었다. 안나에게서 꽃다발을 전해 받은 필리프가 연못 옆 커다란 돌덩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납작한 돌덩이 위에 깔린 수북한 짚단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편안한 자리를 늘 마다하고, 그대는 항상 이렇게 불편한 자리에 앉아 있었지.”

    필리프의 손에 들려 있던 화사한 장미 꽃다발이 짚더미 위로 이동했다.

    “늘 약초 사이에 파묻혀 언제 한번 제대로 된 꽃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으려나.”

    필리프의 목소리에 한스러움이 섞여들었다.

    “여태껏 그대에게 향기로운 꽃 한 송이 전해 주지 못했어.”

    필리프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 일인지 이레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열렬한 사랑을 상징하는 장미는 저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이레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린 필리프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사랑의 종류는 너무나도 다양하니까.”

    잠시 하늘과 장미꽃이 놓인 짚단 위를 번갈아 바라보던 필리프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한 발자국 뒤에서 필리프의 모습을 바라보던 안나도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며 필리프와 같은 이를 떠올렸다.

    이레네를 위한 묵념을 마친 이후에도 한참 약초가 가득한 공간을 둘러보며 살피던 필리프가 다시 안나의 품에 있던 스테판을 받아 안았다.

    “피곤하진 않아? 조금 걸어도 괜찮겠어?”

    “좋아요.”

    수풀 틈을 빠져나온 필리프와 안나가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었다. 맞잡은 손이 단단하고 따뜻했다.

    “아직 드레스 가봉을 하기 전이라고 들었는데.”

    “…아.”

    안나는 다음 달 황궁을 개방하여 진행될 신년 행사에 필리프와 함께 단상에 설 예정이었다. 아직 정식적인 황후 책봉식을 거치기 전이었지만, 필리프가 백성들 앞에 안나의 존재를 내비친 이후 처음 맞게 되는 공식적인 행사였다.

    “아무래도 너무 화려한 드레스는 좀 부담스러워서요. 그렇다고 너무 무난한 디자인에 드레스를 입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고민 중이었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걱정돼?”

    안나의 이야기를 듣던 필리프가 덤덤하게 물었다. 그녀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이제 이 제국의 황후가 될 사람이야.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필리프가 안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단호한 목소리를 뱉었다. 그녀가 언제 어디에서나 당당한 모습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앞으로 수없이 많은 종류의 인간군상을 상대하게 될 거야. 당신도 잘 알겠지만, 그들 앞에서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네. 그래야죠.”

    “나와 이 녀석이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필리프가 굳은 안나의 얼굴을 풀어주기 위해 눈을 접어 웃으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조바심 낼 필요 전혀 없어. 다 잘 될 거니까.”

    확신하는 듯한 필리프의 목소리를 들은 안나가 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목적지를 향해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깊은 바다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마다 든든한 안전 부표가 되어주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그 어떤 거친 파도, 바람도 굳건히 버텨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제가 어떤 색의 드레스를 입었을 때 가장 잘 어울렸어요?”

    “글쎄. 어떤 색이든 다 잘 어울렸던 것 같은데?”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하나를 골라 주시면 제 선택이 쉬워질 것 같아서 그래요.”

    잠시 안나가 입었던 드레스를 떠올리며 고민하던 필리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크림색 풀 드레스, 그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렸던 것 같아.”

    “아, 지난주에 제가 입었던 푸른색 드레스는 별로였군요. 제가 직접 디자인과 색을 골랐었는데.”

    “아니, 그 드레스도 잘 어울렸어. 내 말은.”

    “아뇨. 알겠어요. 이번 행사에는 크림색 드레스를 선택할게요.”

    당황한 필리프의 반응을 본 안나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부러 실망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단숨에 따라붙은 필리프가 급히 변명의 말을 뱉었다.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해서 말했던 것뿐이야. 당신이 푸른색 드레스를 원하면 원하는 대로 해. 말했잖아. 무슨 색이든 잘 어울린다고.”

    평소 그답지 않게 급하게 말을 쏟아내는 모습이었다. 꾹꾹 눌러둔 웃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안나가 허벅지를 아프게 꼬집으며 웃음을 삼켰다.

    “정말이라니까? 아, 저번 만찬에 입었던 연분홍 드레스도 아주 좋았고, 그전에 입었던 남색 레이스 드레스도 예뻤어. 아, 어제 식사할 때 입은 노란색 드레스도 훌륭했고.”

    안나가 답을 하지 않으면 그간 그녀가 입었던 드레스 전부를 읊을 기세였다. 매번 그에게 놀림을 받는 것이 억울해 이번에는 제대로 그를 놀려주려 했지만, 그의 절박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좀 약해졌다.

    아, 역시 난 안 되겠어. 아직 내공이 부족해.

    백기를 든 안나가 필리프를 향해 몸을 돌리며 참고 있던 웃음을 뱉었다. 자신의 웃음을 보자마자 사르르 풀어지는 그의 얼굴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