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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4)화 (124/139)

124화

황제의 탄신일은 카마르 제국 내에서 가장 성대하게 기념되는 행사였다. 필리프 황제의 탄신일을 하루 앞둔 황궁 주방 안에 소란이 더해지고 있었다.

“아니, 그 고기는 염장용 고기이니 이쪽에 두어야지!”

“자자, 손질된 채소는 이 커다란 소쿠리로 옮겨 놓도록 해라.”

귀족 영애들이 외출할 때 쓰는 챙이 넓고 깊은 모자를 푹 눌러쓴 안나가 조심스럽게 황궁 주방 풍경을 살폈다. 처음 이곳에 와서 정신없이 주방일을 했던 시간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올랐다.

“이제 가셔야 해요. 곧 이쪽으로 시종들이 몰려나올 테니까요.”

“…응, 마샤.”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동쪽 출입구로 발을 옮겼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반나절. 필리프는 자신의 탄신일에 시민들을 앞에 두고 안나를 황후에 앉히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려 하고 있었다.

여전히 안나의 황후 책봉을 두고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귀족들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수의 귀족들이 황후 책봉에 동의했고 과반수의 동의로 의결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안나가 다른 세력과 결탁할 수 없는 가문의 출신이라는 것, 또 황태자가 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이제 내일부터는 황후마마라 부르게 되겠습니다.”

“아, 무슨. 그러지 마, 마샤.”

“오늘은 꼭 푹 주무셔야 해요. 요즘 내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계시잖아요.”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황궁에 돌아온 이후 내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 안나였다.

“숙면에 좋은 차가 있는데,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지금은 괜찮아. 어차피 곧 스테판이 일어날 시간이라서.”

“네.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바로 불러주세요.”

마샤가 방을 나서자마자 안나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스테판의 유모가 될 후보들의 인적 사항과 특징이 적힌 서류였다.

‘이제 슬슬 유모를 찾아야 할 시기야.’

‘스테판은 제가 직접 키우고 싶어요. 지금까지도 별문제 없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내가 돕는다고 해도 혼자서는 무리야. 곧 황후의 자리에 오를 텐데, 온종일 아이를 돌보면서 황후의 책무를 수행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나 역시 유모의 손에서 자랐지만,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잖아? 아이에게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만 느끼게 해주면 돼.’

필리프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안나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글에 적힌 내용만으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불가능했다. 펜대를 쥔 안나가 면담을 할 날짜를 확인하고 따로 물어야 할 사항을 정리했다.

“마마.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필리프의 전담 수행원의 목소리였다. 그는 안나가 황궁으로 돌아온 이후 내내 그녀에게 마마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예. 들어오세요.”

안나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인 수행원의 손에 두툼한 자료가 들려 있었다.

“마마의 다음 주 일정이 적힌 자료와 황후 임명식 때 입게 되실 드레스에 관한 내용입니다.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수행원의 설명은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필요한 사항을 필기한 안나가 수행원에게 자료를 건네받았다.

“잠시 쉬시고 재단사를 만나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지금 바로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마마.”

앞으로 한 달가량은 어마어마하게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안나가 테이블에 흩어진 자료를 갈무리했다.

재단사를 만나 드레스 디자인을 수정하는 일도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전통이라는 명목하에 드레스에 각종 장식을 추가하려는 재단사의 노력은 전부 수포가 되었다. 안나의 확고한 요구에, 드레스 장식은 필수적인 요소를 제외하고는 전부 삭제되었다.

재단사를 물린 안나가 진이 빠진 상태로 의자에 늘어졌다.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움직이느라 켜켜이 쌓인 고단함이 한꺼번에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 자세로 잠이 든 거야?”

귓가를 간지럽히는 낮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닫힌 눈꺼풀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아니, 눈 뜨지 마. 침대로 옮겨줄 테니.”

“스테판이…….”

“그래. 요람도 옮겨 줄게.”

“으응… 폐하는 언제.”

“쉬이, 괜찮으니까 조금만 쉬어.”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로 나긋하게 속삭인 필리프가 안나의 몸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았다는 불안감에 안나가 눈꺼풀 안쪽에 힘을 주었지만,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침대 시트가 마지막 남은 한 꺼풀 정신력을 앗아갔다.

“딱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만…….”

“그래. 깨워 줄게.”

“정말 딱 삼십 분…….”

웅얼거리는 말소리를 뱉던 안나의 입술이 완전히 닫히고, 곧 공간에 완벽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안나의 호흡이 일정한 속도가 될 때까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넣고 있던 필리프가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를 벗어났다.

필리프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 발끝에 힘을 주어 몸을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아이의 요람을 침대에 가까이 붙여 놓고 잠이 든 안나와 아이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 얼굴을 꼭 닮은 아이와 자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 될 여인이 꼭 같은 표정으로 꼭 같은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 * *

황제의 탄신일은 화창하고 맑았다. 이른 아침부터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길게 고개를 빼고 단상을 응시했다.

“저기, 황제 폐하다!”

“황제 폐하, 만세!”

필리프가 모습을 드러내자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일제히 우레와 같은 함성을 뱉어냈다. 단상에 오른 필리프가 공중으로 손을 뻗어 귀를 먹먹하게 하는 함성을 잠재웠다.

“전쟁이 끝난 이후, 나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억울하게 피해를 본 시민들을 돕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네. 이 나라의 황제로서,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었지.”

필리프 마티어스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 있었던 두 번의 전쟁이 모두 카마르 제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에 필리프 황제는 역대 황제 중 시민들로부터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모두 숨을 멈추고 황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은 끊임없는 폭력을 낳을 뿐임을 모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이것이 내가 수많은 인접국과 종전 협정을 맺은 이유였어.”

잠잠해졌던 광장 안이 다시 금세 황제를 향한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는 시민들을 가만히 둘러보던 필리프가 화제를 바꾸었다.

“선황께서 금지하셨던 마녀사냥도 모두 권력과 돈을 차지하기 위해 죄 없는 여인들을 희생한 경우이지.”

마녀사냥? 갑자기 웬 마녀사냥?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수군거림이 시작되었다.

“수없이 많은 여인이 실체 없는 괴담으로 마녀로 몰렸고,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이 불에 타들어 가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네. 아직 그 시절의 광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 몇 명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잠시 말을 멈춘 필리프가 단상 아래를 응시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생김새가 보통 이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머리카락 색이 어둡다는, 피부색, 체형 그리고 말투가 조금 다르다는 이유였지. 따져보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죄 없는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었어. 실제로 마녀를 만나지도 못한 인간들이 떠들어대는 마녀의 조건이란 것이,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네.”

탁.

필리프가 단상 아래 문을 응시했다.

끼이익. 무거운 문이 활짝 열리고 어두운 푸른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머리카락을 가볍게 하나로 묶은 여인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 필리프의 옆에 자리했다.

화장기가 거의 없는 수수한 여인의 품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주변을 돌아보는 아이가 안겨 있었다.

안나는 자신을 하이젠 부르크 가문의 숨겨진 딸이라 소개하려 했던 필리프의 의견에 반대했다. 더는 어떤 부분에서도 거짓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필리프는 고심 끝에 안나의 의견에 동의했고, 안나는 갈색으로 염색했던 머리를 다시 원래의 색으로 되돌리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시민들 앞에 섰다.

삽시간에 광장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여인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든 필리프가 광장 안 시민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곧 카마르 제국의 황태자가 될 아이네.”

이제 갓 돌도 되지 않아 보이는 사내아이의 얼굴이었지만, 아이의 얼굴에서 필리프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필리프를 똑 닮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민들이 하나둘,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황태자 저하!!!”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을 알아들은 것인지, 필리프에게 안겨 있던 스테판이 입가에 환한 웃음을 매달았다.

“그 시기는.”

장내의 소란을 잠재운 필리프가 제 곁에 선 여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의 어머니인 이 여인의 황후 취임식이 열린 이후가 되겠지.”

사람들은 황실의 인간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황제가 마음에 품은 여인이 귀족이 아니라는 소문이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시민들의 반발이 그리 크지 않았던 이유였다.

시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 이유는 보잘것없는 가문의 여인이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보통 귀족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생김새를 한 여인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제야 광장에 모인 사람 모두 황제가 마녀사냥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 그대들에게 묻겠네.”

황제의 목소리가 한 톤 낮게 가라앉았다.

“이 여인의 머리카락이 어둡다는 이유로, 이 여인의 얼굴이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제국의 황후를 마녀 취급할 사람은 없겠지. 제국의 황후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은 곧 제국의 황제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으니.”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한 황제가 제 곁에 선 여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황제와 황제의 아이를 향해있던 시민들이 시선이 일제히 여인에게로 이동했다.

여인이 내내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마주했다. 여인의 눈동자와 황제의 눈동자가 맞닿는 순간, 드넓은 광장 안 시간이 그대로 멈춰 버린 듯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거짓말처럼 황제와 여인의 입가가 함께 말려 올라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들의 입가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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