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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3)화 (123/139)
  • 123화

    “공격적으로 영지를 늘려 부를 축적하기 시작해, 한때는 제국 내에서 꽤 권세를 떨치던 가문이었습니다. 이런 하이젠 부르크 가문의 권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선황이 즉위하기 전 공격적으로 이루어졌던 마녀사냥 이후였습니다.”

    악마적 마법의 존재를 믿었던 카마르 제국의 5대 황제 티에리 마티어스는,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펼쳐졌던 마녀사냥의 전성기를 맞게 한 인물이었다.

    주로 오갈 곳 없는 여인들이 마녀로 몰렸던 마녀사냥 초기와는 달리, 그 대상은 점점 돈이 많은 미망인으로 옮겨졌다. 마녀로 지목받은 여인은 그 즉시 재산과 토지를 몰수당했는데, 이 재산은 모두 황실의 소유로 옮겨졌다.

    황제의 지시로 종교재판소가 아닌 세속법정이 마녀사냥을 주관하게 되면서 점점 행위는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세간의 소문만으로도 여성들을 체포하는 것이 가능했고, 잔혹한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끌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간 총 1,000명이 넘는 무고한 여성들이 마녀로 적발되어 화형 또는 참수당했다.

    “하이젠 부르크 가문의 장자 피터 파슨스의 아내가 처음으로 마녀라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얼핏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미망인이 아닌 귀족 중에 처음으로 마녀로 지목당한 인물이 있었다고.”

    잠자코 요하네스 더글러스의 이야기를 듣던 필리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술이 찌들어 흐리멍덩했던 요하네스의 눈동자가 조금씩 원래의 총명함을 찾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하이젠 부르크 가문이 황실 세력과 결탁하는 것을 경계한 타 귀족 가문들이 일을 꾸몄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미 눈덩이처럼 불어난 의혹을 잠재울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 부인의 외모가 제국 내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특이한 외모였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마녀로 몰린 주된 이유였다고 합니다.”

    황제의 면책권만이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황제는 황실의 세력이라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가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그렇게 허무하게 아내를 잃은 피터 파슨스는 어느 날 홀연히 제국을 떠났다는 소문이 퍼졌고, 아들과 며느리를 동시에 잃은 노부부는 독극물을 마시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요하네스가 먼지로 가득한 고서를 덮으며 말했다. 그런 요하네스를 바라보는 필리프의 미간에 강하게 금이 갔다.

    고작 이런 이야기가 전부일 리 없어. 분명, 이 가문의 비밀이 있을 텐데.

    “그런데 폐하. 하이젠 가문에서 끝까지 일했던 시종 한 명이 시장 노파에게 흘리듯 했다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

    “피터 파슨스의 아내가 화형이 행해지기 며칠 전 아이를 낳았다는 말입니다.”

    “아이?”

    “예.”

    요하네스는 우연히 들렀던 시장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당시에는 몰락 가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이유가 없기에 그저 흘려보냈던 이야기였다.

    “끝까지 임신 사실을 숨겼던 것은 아마 딸을 낳게 될까 염려했던 것이겠지요. 자신과 꼭 닮은 검은 머리를 한 딸이 헛된 누명을 쓰게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요.”

    검은 머리를 한 딸? 머릿속에 번갯불이 이는 느낌이었다. 필리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딸은 지금 어디 있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제국에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피터 파슨스와 함께 제국을 떠났을 수도, 제국에 남아 미천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사실 아이가 딸이라는 것도 소문에 불과하니까요.”

    이레네. 당신은 이런 눈속임으로 나를 도우려 했던 것인가.

    요하네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필리프가 허탈한 탄식을 뱉었다. 그때 허공에서 희미하게 이레네의 목소리가 울렸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정말 그녀의 목소리인지, 자신이 만들어낸 환청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녀의 말대로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어쩔 수 없을지도. 이것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더는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늘 자네와 내가 만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거야.”

    빠르게 생각과 표정을 갈무리한 필리프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탁.

    필리프가 발밑에 두툼한 꾸러미를 떨어뜨렸다. 요하네스의 눈빛이 바로 떨어진 꾸러미로 이동했다. 발치에 나뒹구는 오래된 술병을 구둣발로 쳐낸 필리프가 말을 이었다.

    “더는 이 싸구려 술병에 둘러싸여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을 정도는 되겠지.”

    “폐, 폐하.”

    “오늘 밤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거야. 필요한 물건 몇 개만 챙기고 앞으로 영원히 내 눈에 띄지 말도록 해.”

    “며,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용건을 전한 필리프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요하네스를 본체만 체, 그대로 등을 돌려 오두막을 벗어났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병들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한 그가 급히 마차에 올랐다.

    “폐하. 황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 그녀에게로 가. 지금 당장.”

    마차의 덜컹거림이 시작됨과 동시에 필리프가 두 눈을 내리감았다.

    * * *

    “스테판, 벌써 다 먹은 거야?”

    순식간에 빈 접시를 바라본 안나가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아니, 이 많은 걸 그렇게 한 번에 다 먹으면 어떻게 해. 이러다가 또 토하면 어쩌려고.”

    날로 먹성이 좋아지는 스테판은, 최근 심하다 느낄 정도로 많은 음식을 먹고 토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에 스테판에게 밥을 먹일 때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잠시 물컵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난 사이, 스테판은 접시 안 음식을 모두 해치우고 말았다.

    “하아… 내 잘못이야. 잠시도 눈을 떼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만, 그런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안나가 귀환 전 닥치는 대로 읽고 외워 두었던 육아 관련 서적의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근심이 가득한 엄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테판은 태평한 표정으로 누워 볼록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하, 정말 못 말려.”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 안나가 스테판을 안고 천천히 등을 두드려 주었다.

    “식사 다하셨어요?”

    “어, 마샤. 미안한데 전부 치워주겠어?”

    마샤가 깨끗하게 비워진 스테판의 접시와 음식물이 거의 사라지지 않은 안나의 접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잠시 안고 있을 테니 편히 식사하세요.”

    “응, 아냐.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아직 소화가 안 되네. 신경 쓰지 말고 치워줘. 난 스테판 목욕 좀 시키고 나올게.”

    “…네.”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안나는 절대 남의 손에 스테판을 맡기지 않았다. 마샤가 황궁을 나와 저택에서 안나와 생활한 지 한 달 반이 흘렀지만, 스테판을 품에 안아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럼 따뜻한 차 한잔 준비할게요.”

    접시를 치워 침실을 나선 마샤가 애써 밝은 소리를 내었다. 욕실 밖으로 고개를 쏙 내민 안나가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욕실 문을 닫았다.

    “안 돼, 스테판. 노는 건 나중에 해야지. 지금은 먼저 씻고.”

    “으으으응.”

    안나가 직접 만든 인형을 품에서 놓지 않은 스테판이 평소답지 않게 떼를 쓰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아빠가 보고 싶어?”

    “파파. 파파.”

    필리프의 모습을 떠올리며 천과 실을 오려 붙여 만든 인형이었다. 필리프의 생김새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한없이 어설퍼 보이는 인형이었지만, 스테판은 인형을 쥐여 준 이후 내내 품에서 인형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 그럼 아빠도 같이 목욕하자. 네가 하도 안고 있어서 때가 많이 탔을 거야.”

    “우우!!!”

    신이 난 스테판이 물 안에서 파닥거렸다.

    “또 다 젖었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스테판이 안나에게 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갈아입으려던 옷이었어. 어디 한번, 제대로 놀아 볼까?”

    양팔 소매를 한껏 걷어붙인 안나가 스테판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끼워 넣는데, 아이가 몸을 뻣뻣이 세우면서 품 안을 빠져나가려 발버둥 쳤다.

    “응? 갑자기 왜 그래?”

    “파파! 파파!”

    “그래. 이 인형도 같이 씻어줄 거야. 일단 너 먼저.”

    점점 목소리를 높이며 파파를 외치던 스테판의 검지가 안나의 등 뒤를 가리켰다. 안나가 그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익숙하고 따뜻한 체향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설마 그 이상한 인형이 나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언제… 오셨어요?”

    “방금.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필리프가 안나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이러면 옷이 다 젖어요.”

    “갈아입을 옷이라면 충분히 있어.”

    “그래도.”

    “자, 당신 힘들 텐데, 목욕 마무리는 내가 할까?”

    안나의 품에서 스테판을 받아 안은 필리프가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내내 품에서 놓지 않으려고 떼를 쓰던 인형을 욕조 안으로 내던진 스테판이 필리프의 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신이 그리웠나 봐요. 오늘은 오래도록 안아 주세요.”

    “음.”

    “생각보다 쉽지 않죠? 거기는 그렇게 세게 닦으면 안 돼요. 자, 이렇게 살살. 아이 살은 연약해서 금세 짓물러요.”

    답답함을 참지 못한 안나가 필리프의 손에서 세정용 천을 빼앗아 들었다. 이후로도 한참 안나의 잔소리를 듣던 필리프가 깨끗하게 씻긴 스테판의 몸의 물기를 닦았다.

    “처음부터 전부 잘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잘하셨어요.”

    “원래 내 전문은 아이를 씻기는 일이 아니라서.”

    “네?”

    “너는 아주 잘 씻겨줄 자신이 있는데. 어때, 한번 믿고 맡겨 보겠어?”

    제 앞에서만큼은 능글거리는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남자.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 앞으로 들이민 잘생긴 얼굴에 한점 거짓이 없었다.

    “자,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어서 일어나세요. 스테판 감기 걸려요.”

    숨기지 못한 서운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의 옆모습을 흘끔 바라본 안나가 까치발을 들었다.

    쪽 소리와 함께 필리프의 뺨에 안나의 입술이 와 닿았다. 선명한 분홍빛으로 볼을 물들인 안나가 쑥스러움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뱉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많이, 아주 많이요.

    필리프의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가 안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안나의 하얀 손이 필리프의 손바닥 위에 안착하는 순간, 그녀가 내내 기다렸을 말을 뱉었다.

    “이제 돌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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