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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2)화 (122/139)
  • 122화

    예상했던 대로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뒤따르는 호위병들에게 멀찌감치 물러서라 지시한 필리프가 삐걱거리는 나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창문은 색이 어두운 커튼으로 막혀 있었고, 어두운 내부에는 매캐한 연기가 흩날렸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오래된 나무가 마찰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요하네스 더글러스.”

    켜켜이 쌓인 고서들 틈에 껴서 술을 들이켜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어깨 아래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과 정돈하지 않은 수염 위로 술 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많이 변했군. 다른 건 몰라도 책에 손자국 하나 나는 것도 끔찍하게 생각했던 사람 아니었나?”

    요하네스에게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싸구려 증류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제 앞을 가로막고 선 필리프의 모습을 그제야 제대로 인지한 요하네스 더글러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시퍼렇게 죽은 입술 사이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화, 황태자 전하?”

    “아니, 더는 황태자가 아니지. 카마르 제국의 황제 필리프 마티어스야. 이제야 내 얼굴이 기억나는 건가.”

    잠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죄 풀린 눈동자를 두어 번 깜빡거린 요하네스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술에 떡이 된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필리프가 손을 내저었다.

    “자네에게 물을 것이 있었는데, 당장은 이야기 나눌 상태가 아닌 것 같군. 다시 오겠네.”

    “아, 아닙니다, 폐하. 저, 정신 차렸습니다, 폐하.”

    요하네스 더글러스는 선황 시절 황궁에 머물며 서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던 자였다. 황족을 비롯한 귀족 가문의 혈통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는 모든 것을 적고 기록하는 것에 과할 정도로 집착이 심했다. 그가 제 자리를 잃은 것은, 우연히 카마르 제국 혈통에 대한 글을 읽음으로써 황태자를 향한 의심을 키워나갔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 조사를 했던 것뿐이라는 요하네스의 애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요하네스가 필리프를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황은 요하네스를 강제 노역장에 유배했고, 작업 중 다리를 다친 그는 노역장 근처 골방으로 보내졌다.

    “죄, 죄송합니다. 부,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요하네스가 제 앞에 산처럼 서 있는 필리프의 발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오랫동안 황궁의 사람이 되어 일해왔다는 것을 생각해 자비를 베풀려는 선황의 의견에 강력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십 대 시절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망할 놈의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감히 황궁의 비밀에 손을 대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두 손목을 모두 잘라내서라도 황실의 비밀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이 나네.”

    요하네스가 필리프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릎걸음으로 느릿느릿 기었다. 웃음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가 정수리에 떨어졌다.

    “제국의 모든 역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 홀대하면 안 될 것이라고.”

    요하네스가 살며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조금의 주름도 없이 반듯한 바지 밑으로 드러난 날카로운 구둣발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언제라도 허튼짓을 할 가능성이 있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폐하. 저, 저는 이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미, 믿어주십시오. 정말입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내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는데?”

    “…예?”

    무엇을 원하는 거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머리가 삐걱거리며 굴러갔다.

    사고로 다리 한쪽이 잘려나간 이후 버러지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던 요하네스였다. 간간이 서민들의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며 받은 돈으로 산 술을 마시며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나를 찾은 것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터, 어쩌면 내 삶의 마지막일 수 있는 이 동아줄을 움켜잡아야만 한다.

    “폐, 폐하께서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목석처럼 서서 요하네스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필리프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마치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한 황제의 눈동자를 마주한 요하네스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하이젠 부르크 가문. 이 가문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말해.”

    “…하이젠 부르크 가문…….”

    필리프는 마지막으로 이레네를 마주했을 때 그녀가 제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하이젠 부르크 가문. 이 가문의 이름을 기억하십시오.’

    제국 황실, 귀족 가문의 역사를 누구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을 인물. 제 앞에 널브러져 귀신 같은 몰골로 삶을 낭비하고 있는 이 남자가 문제를 풀 열쇠가 되어 줄 것이다.

    “대답을 아주 신중히 해야 할 거야. 네 그 대답이 이 구역질 나는 곳을 벗어나게 할 유일한 희망이 되어 줄 테니.”

    생각에 잠겨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던 요하네스 더글러스가 엉망으로 흩어져 있던 고서로 손을 뻗었다.

    * * *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기다란 나뭇가지로 무언가를 젓고 있던 마샤가 인기척에 바로 등을 돌렸다.

    “아, 벌써 일어나셨어요?”

    그녀는 커다란 나무 그릇에 잔뜩 담긴 가루에 물을 섞는 중이었다.

    “마샤. 둘이 있을 때는 말 편하게 하라니까.”

    “아… 그게 익숙해 지지가 않아서.”

    여전히 마샤가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지만, 당연히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안나가 마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스테판이 마샤가 만들어준 이유식을 아주 좋아해. 벌써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잠들었어. 아, 그건 뭐야?”

    “아, 머리를 염색할 재료예요. 수행원님께서 며칠 발품을 팔아서 구한 거라고 하셨어요.”

    황, 납 그리고 생석회를 갈아 만든 분말이었다. 안나의 머리카락은 제국 내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필리프 황제는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 안나의 머리카락 색을 바꿔줄 것을 지시했다.

    “아… 맞다.”

    “이것으로 염색을 하면 머리카락 색이 밝은 갈색빛을 띠게 될 거예요. 대부분 천연 재료를 사용했다고 들었어요.”

    최근 들어 잠투정이 거의 사라진 스테판이 이제 막 잠들었으니 일어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준비되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바로 발라드릴게요.”

    “그럼, 지금 할까? 스테판이 잘 때 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인 마샤가 뒤돌아 앉은 안나의 머리카락에 개어 놓은 염료를 바르기 시작했다.

    “네가 함께 와 주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뇨, 제가 더 고맙죠. 우리 가족 빚도 모두 갚아주시고. 앞으로 제가 정말 잘할게요.”

    베르나에게 협박을 당했던 마샤의 사정을 들은 안나는, 영주에게 큰 빚을 지고 마음에서 쫓겨날 위치에 처한 마샤의 가족을 도왔다. 마샤는 안나와 함께 황궁을 떠나 저택에 도착했고, 저택에 도착한 이후 내내 성심을 다해 안나와 그녀의 아이인 스테판을 보살피고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말실수를 하면 안 되니까… 앞으로는 말을 편하게 하지 않아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난 괜찮은데.”

    “곧 제국의 황후가 될 분이시잖아요. 불편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요.”

    “응…….”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샤가 염료를 바른 안나의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고정했다. 안나가 마샤를 향해 등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호칭과 말투가 바뀐다고 우리 관계가 변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 네 마음이 편한 대로 해.”

    마샤의 표정이 한결 후련하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럼 이제 다음 주면 황궁에 돌아가는 건가요?”

    “음. 그렇게 될 것 같아. 황궁에 돌아가게 되더라도 다시 이 저택으로 돌아와야 해. 황후 책봉식이 열리기 전까지는.”

    “그런데 저택을 관리하는 시종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사람이 없으니까 혼자 청소도 하시고, 식당일까지 하시잖아요.”

    저택에서 일하는 시종을 최소 인원으로 구성한 안나는 스테판을 돌보는 것 이외에도 간단한 주방일을 직접 해내고 있었다.

    “어차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주방일 좀 하는 거야 별로 힘들지 않으니까.”

    “그래도.”

    “마샤, 벌써 잊었어? 우리 함께 주방에서 일할 때 이것보다 훨씬 많은 업무량을 소화했었잖아. 너 그때 나한테 일 잘한다고 칭찬도 많이 했었으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주방 시종 시절을 떠올린 안나와 마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정말 놀랐는데. 부주방장님이 주신 과실주를 한 번에 들이켰을 때 말이에요.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처음으로 의심했었어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는걸. 내가 마시던 술에 비해 이곳 술은 너무 도수가 낮거든. 그렇게 한 번에 들이켜도 별로 취하는 기분이 들지 않더라고.”

    안나와 마샤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머리에 바른 염료가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안나가 부엌 쪽으로 자리를 옮겨 염료로 단단히 굳은 머리를 씻어냈다. 깨끗하게 씻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고 작은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우와! 머리 색 하나 바꿨을 뿐인데 마치 다른 사람 같아 보여요.”

    “그래? 난 염색이 처음이라 좀 어색하네.”

    안나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머리카락 색을 확인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고루 염색되어 있었다. 매주 자라난 머리카락을 염색해야 하겠지만, 이 정도 수고로움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마워, 마샤. 오늘 저녁 메뉴는 산나물 볶음밥 어때?”

    “그게 뭐예요?”

    “응, 먹어보면 맛있다고 한 접시 더 달라고 할걸? 머리 해 주느라 수고했으니까 좀 쉬어.”

    “아니, 저녁은 제가 해도 되는데.”

    만류하는 마샤를 멀찌감치 물린 안나가 주방에 들어가 앞치마를 둘렀다. 사용할 접시를 찾아 찬장을 둘러보던 안나의 눈에 끝이 오목한 술병이 보였다.

    “어?”

    “아, 그것도 수행원님이 전해주고 가셨어요.”

    술병 입구에는 자그마한 쪽지가 걸려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마시고 싶었을 거야. 당신에게 향기로운 선물이 되길.]

    이제 어느덧 익숙하게 느껴지는 필리프의 필체였다. 술병의 뚜껑을 여니 진한 사과 향이 콧속을 부드럽게 적시며 밀려 들어왔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모유 수유가 끝나는 시점을 정확히 알고 이런 선물을 보내오다니. 필리프의 철두철미함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안나가 마샤를 돌아보며 밝은 목소리를 냈다.

    “마샤, 우리 술 한 잔씩 하자. 이거 엄청 귀한 술이래.”

    가만히 안나의 눈치를 살피던 마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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