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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1)화 (121/139)
  • 121화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허락을 구하는 시종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머무는 집무실과 침실 근처에 소속된 시종 몇 명만이 안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 황제는 이 시종들 모두에게 안나를 극진히 모실 것을 엄히 명했다.

    “아, 예. 들어오세요.”

    여전히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는 극존칭에 붉게 얼굴을 물들인 안나가 요람 앞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엄마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잠시 칭얼거리던 스테판이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바로 투정을 멈추었다.

    방문 앞에 선 마샤가 고개를 숙였다. 황제에게 은혜를 입어 곧 황후의 자리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인물. 황궁 시종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안나에 대한 소문이었다.

    도대체 저 사람이 왜 나를 찾은 거지? 궁금증과 긴장감이 섞여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샤 카밀.”

    “…예?”

    “네가 없었으면, 나는 아마 이곳에서 버텨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

    마치 친구를 대하는 듯한 편한 말투였다. 처음 안나를 만났을 때도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마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내가 정말 누군지 모르겠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마샤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지만, 그녀가 제 말을 믿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안나가 마샤에게 사실을 말하려는 이유는, 마샤는 안나에게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앉아. 내게 있었던 일을 전부 얘기해 줄게.”

    안나는 필리프가 제게 넘겨 준 저택에서 일할 시녀로 마샤를 선택했다. 필리프는 마샤가 안나를 한 번 배신했던 적이 있었다는 이유로 안나의 선택을 만류했지만, 안나의 의지는 확고했다.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어차피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고. 저는 마샤가 처음 제게 보여주었던 진심을 믿어보고 싶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뽑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차피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니 오랜 시간 면담한 이후에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을 뽑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

    ‘저는 어쩔 수 없었다는 마샤의 말을 믿어보고 싶어요. 만일 저도 제가 가장 아끼는 사람을 두고 협박을 받게 되었다면, 그 말을 거스르기 힘들었을 거예요.’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던 학창 시절과 가슴 속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찾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이십 대. 마샤는 제게 별것 아닌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안나가 마샤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누었던 비밀 이야기를 담담히 읊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알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마샤는 안나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듯 경계하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믿기 힘들 거라는 걸 알아. 내가 너였어도 아마 쉽게 믿지 못했을 거야.”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말도 안 돼…….”

    “내가 너에게 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 이유는 단 하나야.”

    잠시 말을 멈춘 안나가 손을 뻗어 마샤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안나 스완이 아닌 서안나로서 부탁하고 싶었어. 내 친구가 되어 달라고.”

    “…치, 친구?”

    “응. 친구. 이제는 너를 속이지 않아도 되니까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하고 싶어서.”

    마샤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안나 스완을 친구로 생각한 마샤에게 처음부터 진실하지 못했던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나에 대한 소문이 살을 붙여 황궁 밖으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그래서 다음 주에 바로 황궁을 떠나기로 했어. 폐하께서 내 거취에 대한 반대 의견을 완전히 잠재우실 때까지.”

    필리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나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리라 호언장담했지만, 그날이 이른 시일 내에 올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안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 정체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너를 포함해 단 네 명뿐이지만,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나는 그 저택에 너와 함께 가고 싶어.”

    확신 없는 마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너는 내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거든.”

    누구에게나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안나가 함께 생활하며 보았던 마샤는 진심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안나가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니까 네가 나와 꼭 함께 가줬으면 좋겠어.”

    반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마샤가 안나와 눈을 마주했다. 살짝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미간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 * *

    저택으로의 이주를 앞둔 안나는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라며 필리프의 도움을 거절한 안나였지만, 그런 그녀를 그대로 두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의자에 앉아 안나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듣던 필리프가 이어서 황궁에서 열릴 무도회에 관련한 보고를 받았다.

    “일정을 한 달 정도만 늦추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한 달. 전쟁에 승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귀족과 관료들만이 초대되는 무도회인 만큼 더 시간을 끄는 것은 좋지 않았다.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을 설득시켜 안나의 황후 책봉 의결안을 통과시켜야 했다.

    “주치의는 뭐라고 하던가.”

    “예, 폐하.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고 의견을 주었습니다.”

    “따로 물을 것이 있으니 주치의를 오후에 집무실로 부르고.”

    “예, 폐하.”

    홀로 힘든 출산을 감당해 낸 안나의 건강이 염려스러워 하루에 두 번, 주치의에게 검진을 일러둔 황제였다. 다행히 지금 그녀의 건강 상태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너무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그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안나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던 일 중 하나는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여자를 만나는 일이었다. 여전히 그 여자에 대한 경계를 풀지 못한 필리프였기에 만남이 달갑지 않았지만, 안나의 의견에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전부 말한 대로 준비해 놓았겠지?”

    “예. 만남이 있을 방 안에 세 명, 방 밖에 세 병의 병사를 배치했습니다. 모두 폐하께서 직접 고르신 병사들입니다.”

    “그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안나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고, 스테판을 황태자로 임명할 때까지 두 사람의 안전히 완벽히 보장되어야 했다. 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최대한 막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안나를 저택에 보내는 것에 동의했지만, 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저택 관리 상황은 어떠한가.”

    필리프가 눈을 뜨지 않고 물었다.

    “예. 길게 자란 나무 뒤로 임시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저택으로 진입하는 모든 이의 움직임이 파악되는 곳이며, 24시간 순번제로 운영될 계획입니다.”

    “저택에서 일할 시종은?”

    “아, 그것이…….”

    눈을 뜬 필리프가 우물쭈물 확답을 내리지 못하는 수행원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황제의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에 번쩍 정신을 차린 수행원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제가 몇 번이고 여쭈었는데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셔서…….”

    “누구에게 여쭈었지?”

    “…예?”

    “이게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질문인가? 저택에서 일할 시종에 관한 내용을, 누구에게 여쭈었느냔 말이야.”

    기대고 있던 의자에서 등을 뗀 필리프가 수행원에게 가까이 상체를 기울였다. 최근 평소보다 많이 유해진 황제의 모습에 다소 느슨해졌던 정신줄이 바짝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를 가다듬는 수행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흠씬 흘러내렸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 그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말씀해주지 않으셔서 호칭을 제대로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음. 그래?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내가 말해 주지 않았다?”

    되묻는 황제의 말투에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했다. 어깨를 들썩인 수행원이 고개를 깊게 조아렸다.

    “그대는 내가 어떤 연유로 안나를 곁에 둔다고 생각하는 거지?”

    “…예? 그야 당연히.”

    “그래. 곧 나와 혼인할 사람이야. 황제의 정혼자를 어찌 불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아둔한 것은 아닐 테고. 그녀의 호칭을 생략하는 데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는가.”

    “아, 아닙니다, 폐하! 제가 어찌 감히!”

    짜증이 역력한 필리프의 시선을 마주한 수행원이 두 팔을 내저으며 호소했다.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폐하. 용서해주십시오.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실수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원 한 명에게 주의를 시킨다고 끝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안나가 더는 이 황궁을 겉도는 주변인이 아닌, 황궁의 주인임을 알려야 했다.

    “다시는 같은 문제로 인상을 쓰고 싶지 않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평온한 목소리였다. 수행원이 수그린 고개를 더 깊이 조아리며 답했다.

    “…예. 말씀 이해했습니다, 폐하.”

    “그럼 나가 봐.”

    어깨를 들썩이던 수행원이 방을 나서자 필리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황족, 귀족이 아닌 여자를 황후로 맞이하는 일은 카마르 제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기껏 첩으로 삼으리라 생각하는 것일 테고.”

    황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황궁 안팎으로 널리 퍼진 사실이었지만, 그 누구도 황제가 그 여인을 황후로 맞이하리라고는 확신하지 않았다.

    “아이가 더 자라기 전에 결정하는 것이 좋겠어.”

    필리프가 급하게 황태자가 탄생했음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하나, 안나와 아이에 대한 완전한 안전이 보장되었다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겁을 먹고 물러서기만 해서는, 절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까.”

    자신의 일정이 적인 달력과 앞둔 무도회 일정이 적힌 서류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심하던 필리프의 머릿속에 순간, 이레네가 제게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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