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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0)화 (120/139)
  • 120화

    필리프는 베르나 황녀의 소유로 제국 내 유일하게 남아있는 저택을 허물고 더 크고 화려한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저택의 소유권을 안나에게 넘겨주었다. 소유권을 이전하는 문서를 내려다보던 안나가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이렇게 큰 저택이 필요하지 않은데요.”

    “왜, 가끔 혼자 있고 싶어질 때가 오지 않겠어?”

    “어, 폐하는 가끔 혼자 있고 싶으신가 봐요?”

    “나는 당연히 늘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아직도 모르겠어?”

    매번 놀림만 당하는 것이 억울해 필리프의 말꼬리를 잡아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상대는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하게 덫을 빠져나갔다.

    “저택에서 일할 고용인은 네가 원하는 사람으로 꾸리도록 해. 황궁에 있는 사람을 선택해도 좋고, 직접 시녀를 뽑아도 좋아.”

    “그럼 진짜 혼자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와 함께 하는 삶에서 온전히 혼자 있는 것은 불가능해.”

    필리프가 안나의 뺨에 입술을 묻으며 말했다. 입을 떼려던 안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부른지 스테판이 오래 자네요.”

    “아무래도 우리 아이가 효자는 맞는 것 같아.”

    “네?”

    아이가 잠든 요람을 흘끔 내려다본 필리프가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우리 두 사람이 편히 즐길 시간을 주려는 것 아니겠어?”

    “아, 저기.”

    “저녁 회의까지 시간이 넉넉히 남았는데.”

    필리프의 음성에 진득함이 섞이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허리를 감아오는 손과 동시에 뺨을 쓰다듬는 손바닥. 정신을 놓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기 직전,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가 볼 수도 있는데…….”

    “보면 뭐? 당신은 저 나이 때 있었던 일을 전부 생생하게 기억해? 걱정할 것 없어. 자.”

    “아, 아뇨. 아무리 그래도.”

    안나가 진득하게 몸을 밀착해 오는 필리프의 가슴을 밀어내며 난감해했다. 황궁에 돌아온 뒤 잠시 시장에 들렀을 때 이외에는 스테판과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고, 필리프와 함께 있는 침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깨면 바로 안아 달래기 위해 요람 옆에 간이 침대를 설치해 잠을 자는 안나였기에, 제대로 된 온기를 나눌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요즘 당신의 관심은 온통 그 아이에게 쏠려 있는 기분이군.”

    필리프의 목소리에 현재 그의 기분이 여실히 드러났다. 불만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불퉁한 목소리를 들은 안나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샜다.

    “아니, 그 아이라뇨. 우리 아이죠.”

    “그러니까 그 말이 맞는다는 얘기잖아.”

    “예?”

    “당신의 관심이 아이에게만 쏠려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거지?”

    어이없는 그의 반응에 다시 실소가 터지려 했지만, 안나는 아랫입술을 꾹 베어 물며 웃음을 삼켰다.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

    “질투? 하,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질투하시는 거 맞는 것 같은데요. 그것도 친자식에게 말이죠.”

    필리프의 뺨이 미세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안나가 잽싸게 다음 말을 뱉었다.

    “폐하가 저를 정말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이렇게까지 좋아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 말이죠.”

    분명 얼굴이 더 붉어지거나, 아니라면 당황스러움에 쉽게 반응해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둔한데?”

    “…네?”

    “내 가슴 속을 열어 훤히 내보이고 싶은 생각이야. 너에 대해 품은 내 마음을 안다면, 차마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었을 텐데.”

    잘생긴 눈가에 짓궂은 웃음기가 서려 있었지만,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

    손을 뻗어 필리프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린 안나가 까치발을 들고 제 손등 체온이 남은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종류가 다른 사랑이니까 말도 안 되는 질투는 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다 알고 있잖아요. 제 심장이 유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누군지.”

    필리프의 커다란 손을 잡은 안나가 제 가슴 위에 그의 손을 얹었다. 그에게만 반응하는 심장이 여전히 어지럽게 뛰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심장의 울림을 느낀 그의 미간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하지만, 아이가 지켜보는 곳에선 절대 안 돼요. 왠지 그건 좀 부끄러워서.”

    단호한 안나의 말에 소리 없이 웃은 필리프가 다시 흘끔 요람에 시선을 주었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하기에 부끄럽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안나의 손을 잡아 끌어 올린 필리프가 허락을 구하듯 그녀의 손등 바로 앞에서 입술을 멈추었다. 안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뜨거운 온도를 지닌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

    단단한 필리프의 몸이 안나의 몸을 가두었고, 손등에 머물던 그의 입술이 안나의 입술로 옮겨졌다. 필리프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던 안나가 빳빳한 그의 옷깃을 따라 손을 미끄러뜨렸다.

    “너무 위험한 행동 아닌가?”

    열독이 오른 듯 붉게 달아오른 안나의 뺨을 매만지며 필리프가 다시 깊게 입을 맞췄다. 안나가 입은 드레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그의 손이 허리를 매만지고 천천히 올라가 가슴에 닿았다. 민감한 부분에 그의 손바닥이 스치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숨을 앗아갈 듯 격렬한 입맞춤 이후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안나가 드레스를 파고든 필리프의 팔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어 간신히 뱉어낸,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그의 이성을 돌려놓기엔 턱없이 나약했다.

    “하아,”

    “쉿. 곤히 자는 아이를 깨울 생각은 아니겠지?”

    안나의 귓가에 낮게 속삭인 필리프가 부드럽게 그녀의 귓불을 머금었다. 안나가 빠르게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며 간신히 신음을 삼켜냈다. 귓가에 질퍽한 숨과 타액이 마찰하는 소리가 번갈아 울려댔다.

    그의 손길과 입술의 움직임에 경련하듯 몸을 떨며 반응하면서도, 안나의 시선은 바삐 요람을 향해 움직였다. 그런 안나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은 필리프가 고개를 틀어 다시 그녀의 입술을 깊이 머금었다.

    “으으응…….”

    앓는 듯 가느다란 신음이 빨간 입술 사이를 가르고, 가늘게 뜨고 있던 눈꺼풀이 꽉 닫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그래야지. 지금은 나한테만 집중해야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필리프가 안나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하으…….”

    안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가끔은 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낯선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그녀의 눈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안나…….”

    그녀를 향한 욕망은 날이 갈수록 부피를 키웠다. 그녀의 눈이 나만을 바라봐 주었으면. 그녀의 손길이 오직 나만을 향했으면.

    그녀는 장난 섞인 반응으로 넘기려 했지만, 그녀의 온 신경을 독점한 아이에게 이따금 치졸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다만 온 힘을 다해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못난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으니까.

    “읏, 아으…….”

    그녀의 목 안쪽을 빨아들여 붉게 자국을 남겼다.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미간마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필리프…….”

    살짝 젖은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인 안나가 필리프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래. 이제 네 눈에는 오직 나만이 담겨 있는 것이겠지.

    포악한 욕망에 심술궂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 미안해, 그녀의 얼굴 곳곳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남겼다. 바르르 떨며 반응하는 몸의 진동이, 맞닿은 제 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 잠깐.”

    몸이 공중으로 뜨는 것을 느끼는 것도 잠시, 안나의 등이 침대에 닿았다.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즉시 상체를 세우려다가 침대가 크게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즉시 움직임을 멈춘 두 사람의 눈동자가 동시에 아이가 누운 요람을 향했다.

    하나, 둘, 셋.

    숨을 참고 요람을 들여다보았지만, 다행히 스테판은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까 정말 맞는 것 같아.”

    “…예?”

    “우리 아이 말이야. 정말 효심이 지극한 것 같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안나를 내려다보는 필리프의 눈동자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여전히 굳어 있던 몸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도 좋을 것 같았다.

    “당연하죠. 누구 아들인데.”

    바스락바스락. 옷자락이 급하게 부대꼈다. 접착력 강한 신음이 연이어 입술 사이를 가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하게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사랑해.”

    늘 그랬듯, 필리프는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온몸이 휘청일 정도로 달콤한 미소를 지은 그가 진심이 담긴 마음을 표현했다. 이번에는 자신도 제대로 마음을 담아 답하고 싶었지만, 부끄러움에 시선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아니, 제대로 답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평소와 달리 물러설 마음이 조금도 없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뜨거운 그의 손길이 바르르 떨리는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있었다.

    “하아… 사랑해요, 필리프.”

    충만한 사랑의 감정 사이로 피어오르는 달콤한 수치심. 안나의 마음을 정확히 읽은 것인지 필리프가 빠르게 안나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두 팔로 안나의 다리를 단단히 고정한 필리프가 천천히 그녀의 안을 파고들었다. 평소보다 훨씬 느리고 느긋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압박감과 버거움을 조금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필리프는 내내 눈을 뜨고 안나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가 어떤 움직임을 좋아하는지, 어디를 만져 주었을 때 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는지.

    내가 아닌 상대의 만족스러움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행위로 이토록 충만한 감정을 느끼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필리프가 가볍게 허리를 튕기며 안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아… 필리프…….”

    “안나… 안나…….”

    서로의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흥분감에 위아래로 격하게 움직이는 안나의 가슴 위로 선물 같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몸과 몸이 완벽하게 결합하는 순간의 짜릿한 희열을 느낀 안나가 만족스러운 신음을 길게 뱉어냈다.

    다음 일정을 알리기 위해 수행원이 침실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스테판은 단 한 번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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