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9)화 (119/139)
  • 119화

    한참이나 소리 없는 눈물을 쏟아내던 케이든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안나가 원했을 자신의 모습. 케이든이 안나와의 추억을 차근차근 머릿속에 되살렸다.

    모두의 눈을 피해 만나왔던 둘만의 비밀 장소, 숨소리가 새어 나가던 것을 걱정하여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던 사랑의 언어들, 찰나같이 짧았던 떨린 숨결의 교환까지.

    생각을 되짚어가던 중 안나가 원했던 것을 전해 주던 밤,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기사님. 이생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의 영혼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죄? 글쎄. 하지만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당신의 영혼은 사후에도 신의 가호를 받게 될 테니까요.’

    씁쓸하게 웃은 안나가 케이든의 손을 맞잡으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었다.

    ‘약속해 주세요. 기사님은 꼭 신의 가호를 받게 될 삶을 살겠다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서 약속해 주세요.’

    그녀가 내밀었던 가느다란 손가락과 제 손가락을 얽었던 그 순간이, 그녀가 제게 이별을 고하던 때였음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약속하겠소.’

    케이든의 눈가에서 다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와 멋대로 이별을 고한 그녀를 원망해 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되면 편해질 줄 알았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기분이었다. 뚫린 가슴으로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사님께서 더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제가 언제든지.”

    “됐습니다.”

    안나의 말을 끊은 케이든이 의자에서 거칠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테이블을 잡은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폐하.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필리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케이든이 비틀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전실 문을 향해 걸었다. 그가 문손잡이를 잡기 바로 직전, 필리프가 그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잊지 말게. 내가 한 제안은 말미가 있는 제안이라는 것을.”

    끝내 답을 뱉어내지 못한 케이든이 전실을 나서자 필리프가 바로 안나에게로 바짝 몸을 밀착했다.

    “오랜만에 너무 무리했지? 이제 침실로 돌아가서 쉬도록 해.”

    안나를 홀로 시장에 보내고 내내 마음을 졸였던 필리프였다. 장시간 이어졌던 케이든과의 대화로, 안나가 조금씩 지친 기색을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저는 괜찮아요. 아, 스테판은 어디 있어요?”

    필리프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안나의 고개를 부드럽게 잡아 세웠다.

    “케이든이 전실에 들어오기 직전에 잠들었어. 자, 저기 보여?”

    필리프의 손가락이 전실과 연결된 작은 방문을 가리켰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스테판이 사용하는 요람이 보였다.

    필리프는 안나가 자리를 비운 이후 내내 스테판을 데리고 업무를 소화했다. 그녀는 마차에 오르기 전, 스테판을 돌볼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적힌 종이 열 장을 필리프의 손에 들려주었다.

    “내가 직접 돌보겠다고 해 놓고 남들 손에 맡겼다가는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아이가 눈앞에 보이면 당신이 대화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았어.”

    안나가 필리프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벌떡 몸을 일으켜 요람을 향해 달려 나갔다.

    아이에게 확실히 우선순위를 빼앗긴 느낌이 못내 서운했지만,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환한 미소를 짓는 안나의 모습을 보니 서운함이 좀 씻기는 기분이 들었다.

    필리프가 빠르게 안나의 등 뒤로 다가서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제 침실로 돌아가 볼까?”

    “하지만 오늘 카르멘 아닐을 만나보기로 했는데요.”

    이레네의 꿈을 꾼 이후, 안나는 자신과 같이 미래에서 원치 않는 시간 이동을 경험했던 카르멘 아닐을 찾았다.

    그녀는 황궁에 초대받은 인물이 주로 머무는 카이소 성에서 생활하며 오랜 감옥 생활로 지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이레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간 이동의 길이 앞으로는 절대 열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안나는 카르멘에게 진실을 말해 주려 했지만, 내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길 기다렸을 그녀에게 차마 진실을 말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이제는 준비가 된 거야?”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라도, 그 진실을 꽁꽁 감추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녀도 알아야 할 사실이니, 더 늦기 전에 말해 주고 싶어요. 그래야 그녀도 좀 더 빨리 삶의 차선책을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의지를 다잡는 안나를 바라보며 필리프가 소리 없는 감탄사를 삼켰다. 안나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하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필리프가 무릎을 굽히며 다정하게 시선을 맞춰 주었다. 내내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던 안나의 시선이 필리프에게로 옮겨졌다.

    “그래. 그럼 함께 가는 것으로 하지.”

    “아직 공무가 전부 끝나지 않으셨잖아요.”

    안나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는데, 양순하게 잠을 자던 요람 안 스테판이 갑작스레 온 전실 안이 떠나가라 울음을 뱉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기 싫어하는 분이 계셔서 내가 아이를 볼 수밖에 없어서 말이야. 잠시 미뤄도 되는 일이니, 걱정할 것 없어.”

    필리프가 빠르게 요람 속 아이를 꺼내 안고 부드럽게 아이의 등을 도닥였다. 빽빽 소리를 지르며 울던 아이의 울음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자, 가실까요?”

    필리프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고 전실 문을 가리켰다. 안나가 필리프의 품에 껌딱지처럼 매달린 스테판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 * *

    “이제야 자리가 났네. 어서 들어가세.”

    한동안 영업을 하지 않았던 헬렌의 선술집이 오랜만에 문을 연 날이었다. 문을 열기가 무섭게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손님들이 코끝에 풍기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군침을 삼켰다.

    “아니, 그래. 몸은 괜찮은 거요? 전쟁 전부터 몸이 안 좋아 오래 문을 닫았다고 하던데.”

    테이블에 내려놓은 맥주잔을 단번에 비운 사내가 헬렌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매일 맛 좋은 안주 준비할 테니, 언제든 편히 찾아와요.”

    “아, 그렇다면 우리야 좋지. 여기 안주가 이 근방에서 제일 훌륭하지 않소.”

    사내들의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작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종종걸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헬렌이 안나가 일러준 대로 미리 준비해 놓은 안주를 접시에 담았다.

    그저 오갈 곳 없는 여인이 안쓰러워 며칠 잠을 재워 주고 함께 밥을 먹은 것이 전부인데,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안나는 내내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해서 내뱉었다.

    ‘이제 편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장님, 몸도 좋지 않으시잖아요.’

    ‘무슨 소리. 내가 죽어야 할 곳은 이 가게 안이야. 아들 죽고 정붙일 곳 하나 없는 내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을 때가 가끔 들러주는 손님과 이야기할 때였어. 앞으로 며칠 못 산다고 해도 일하다가 죽는 게 젤 마음 편해.’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헬렌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뱉은 안나는 자신이 생각한 차선책을 내놓았다.

    ‘제 감사함을 표할 방법이 이것뿐이라 너무 죄송해요.’

    예기치 못한 전쟁으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작은 가게가 폐허가 되다시피 했지만, 안나의 도움으로 시장 안에 원래보다 커다란 가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시끌벅적하게 울리는 가게 안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니,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몸의 고통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렸다. 콧노래를 흥얼거린 헬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내의 테이블에 고소한 나물 튀김을 올려놓았다.

    “아, 고맙소.”

    깨끗한 기름에 갓 튀겨낸 튀김을 입에 넣으며 감탄사를 뱉은 사내가 맞은편 사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자네, 그 소문 들었는가? 황궁 안에 황제 폐하께서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다고 하던데?”

    “그래. 그런 소문이 들리더군. 소문으로는 그 여자가 귀족이나 황족 출신은 아니라고 하던데, 설마 그 여자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시지는 않겠지?”

    “아니, 귀족, 황족이 뭐 그리 대단한가? 호시탐탐 폐하의 목숨을 노렸다는 황녀님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차라리 폐하와 우리 제국을 노리려는 악독한 귀족들보다 별 볼 것 없는 신분의 여자가 더 나을 수도 있어.”

    “아, 뭐. 그거야 그렇지만.”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반쯤 남은 잔을 비웠다.

    “다행이야. 참 다행이야.”

    사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헬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가게를 찾는 이들의 주 관심은 황제와 황제가 마음에 품었다고 알려진 미스테리한 여인을 향해 있었다.

    조심스러운 안나의 고백으로 황제와 안나의 사이를 알게 된 헬렌은 가게 안 손님들의 이야기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철저한 가문의 결합이며 계약이었던 귀족간의 결혼이 최근에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참금 한 푼 없는 고아 신세인 안나와 제국 황제의 결혼을 반길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헬렌이 장사하며 듣게 된 시민들의 의견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아니, 그런데 얼마나 대단한 절세 미인이기에 황제 폐하의 눈에 든 거지? 대단한 가문의 자제들을 아무리 코 앞에 들이대도 콧방귀도 뀌지 않으셨다던 분 아닌가.”

    “그러게 말이야. 거, 아무래도 밤일에 능한 여자가 아닐까? 목석을 넘어뜨리는데 그만한…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요!”

    필시 들려올 음담패설이었다. 헬렌이 바닥에 미끄러지는 척, 들고 있던 맥주잔을 뒤집었다. 흐른 맥주가 사내의 바지를 흠씬 적시고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아직 몸이 성치 않아서…….”

    “아, 나 원 참.”

    “뭘 그리 화를 내는가. 기분 좋게 마시고 나가자고.”

    “옷이 이렇게 젖었는데 뭘 기분 좋게 마셔!”

    “자네 바지에 관심을 가질 사람 아무도 없네. 자자, 한잔하라고. 여기 맥주 두 잔 더!”

    바지를 적신 사내에게 마른 수건을 건넨 헬렌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덧붙였다.

    “아, 내가 가게에 온 황궁 사람들에게 들었는데, 그 여자분이 굉장히 똑똑하고 어진 분이라는 소문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지 않소? 우리 황제 폐하께서 어떤 분이신데 그런 세속적인 부분에 끌렸겠습니까.”

    들었나? 들었나 본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사내들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주방에 돌아와 그릇을 정리하던 손을 잠시 멈춘 헬렌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황금빛 노을이 깔려있던 하늘에 조금씩 어둠이 섞여들고 있었다. 새까만 어둠에 먹혀 들어가는 하늘이 어쩐지 곧 다가올 자신의 삶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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