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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8)화 (118/139)
  • 118화

    전쟁 이후 남은 국고와 군사 자원을 꼼꼼히 검토한 필리프가 서류에 인장을 찍으며 입을 열었다.

    “유민 구제 대책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겠지.”

    “예, 폐하.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였습니다. 파이만 제국으로부터 인계받은 영토에 유민 상당수가 안착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권력의 최상단에 있는 이들의 이권 싸움으로 죄 없이 피해를 받은 유민들의 규제 대책을 위해 국고의 상당수를 차출했던 필리프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비어가는 국고를 채울 대책 역시 마련해 놓았다.

    “지금 황궁 내 분위기는 어떠한가.”

    “아직 입을 열지 않은 무리가 있다는 사실이 귀족들과 대신들 사이에 조금씩 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말이 전해지도록 해야 해. 여전히 베르나가 심어놓은 심복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어. 지금 심문을 받는 자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이에도 사실을 고하지 않는다면 그 즉시 그자의 가족, 일가 친족 모두를 잡아들이도록. 그리고 전 재산을 몰수해 국고로 치환해.”

    “알겠습니다, 폐하.”

    엄하게 이른 필리프가 집무실을 나섰다.

    황궁에 머무는 귀족과 황족 전체를 자신의 무리로 끌어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상대방의 목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니.

    하지만 정확히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었다. 제국의 황제인 자신이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런 자신과 척을 진 대가가 얼마만큼인지를 모두에게 똑똑히 알려야 했다. 다시 또 추한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될 전쟁을 치르지 않기 위함이었다.

    “폐하. 전실에 케이든 기사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음. 그녀는 어디에 있지?”

    “시장에 들렀다 돌아오시는 중이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돌아오면 즉시 전실로 안내하고 케이든을 들이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전쟁 이후 큰 공을 남긴 기사들에게 수여한 훈장을 받기를 거절한 케이든은 여전히 사라진 연인에 대한 답을 찾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출산 이후 많이 약해져 있던 안나의 몸 상태가 거의 회복되었다는 판단하에, 필리프는 세 사람이 모일 자리를 마련했다.

    수행원의 안내로 전실에 들어온 케이든이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앉지.”

    열흘 만에 보는 케이든의 얼굴이 한층 수척해져 있었다. 필리프의 허락에 의자에 앉으면서도 케이든의 눈동자는 내내 전실 문을 향해있었다.

    “곧 그녀가 도착할 거야.”

    “…예.”

    케이든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전실 문을 응시하던 그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차를 들이겠습니다.”

    “그래. 들어와.”

    기다렸던 이가 입장하는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하는 케이든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만히 케이든의 얼굴을 응시하던 필리프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흔적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았을 자. 만일 그가 베르나의 감언이설에 속아 완전히 그녀의 사람이 되어버렸더라면? 아마 전쟁에 이리도 쉽게 승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차를 들지.”

    “차는 그분이 오시면 함께 들도록 하겠습니다.”

    케이든의 완곡한 거절에 더 청하지 않은 필리프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찻물을 머금었다. 필리프가 찻잔을 반 이상 비울 때까지 필리프도 케이든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예상하지 못한 필리프의 제안이었다.

    “나는 자네가 완벽하게 내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해.”

    “…예?”

    “그녀가 자네에게 약속했던 이야기를 전부 들려줄 거야.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자네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이지.”

    케이든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필리프의 무덤덤한 시선이 케이든의 의문 가득한 눈동자와 맞닿았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절대 찾을 수 없는 망령을 찾아 헤매며 시간을 낭비하거나.”

    필리프가 몸을 앞으로 당기며 케이든과의 거리를 좁혔다.

    “아니면 그대의 능력을 펼치며 조국에 충성을 약속할 수도 있겠지. 나는 그대의 선택이 후자가 되었으면 해.”

    케이든이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벌리려는 순간, 다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수수한 차림을 한 안나가 전실 안에 들어섰다. 내내 기다렸던 이를 맞이하기 위해 앉은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케이든이 안나가 테이블로 걸어오는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안나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시종을 물린 필리프가 직접 의자를 빼주며 안나의 등을 쓸었다.

    “그래. 일은 잘 마무리한 거야?”

    “네. 잘 만나 뵙고 이야기 나누었어요.”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고?”

    “네. 내내 마차에 앉아 있었던 걸요.”

    눈을 맞추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필리프와 안나의 모습을 바라보던 케이든이 고개를 떨구었다. 사랑하는 이를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미치도록 부럽게 느껴졌다.

    “기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안나가 케이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함께 묵례하며 자리에 앉은 케이든이 안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서 초조함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부터 제가 들려드리는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먼저 전하겠습니다.”

    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 이 세계에 와 눈을 뜨게 되던 순간, 절로 글씨가 쓰이고 지워졌던 수첩에 관한 이야기, 꿈과 머릿속에 떠오른 환상을 통해 알게 된 안나의 언니와 황녀 사이의 관계까지.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케이든은 안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담담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던 안나가 케이든과의 첫 만남에 대해 털어놓던 순간, 테이블을 향해 있던 케이든의 고개가 처음으로 들렸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낯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분명 머리로는 이 남자를 밀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건 기사님이 안나 스완에게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 분이셨기 때문이었겠죠.”

    안나의 이야기를 듣던 필리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안나의 의지가 아니었던 만남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와 다른 남자와의 만남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케이든의 얼굴을 향해 있던 안나의 시선이 슬쩍 제게로 돌아오는 것을 느낀 필리프가 헛기침하며 미간에 힘을 풀었다. 다시 시선을 돌린 안나가 말을 이었다.

    “괜히 기사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고자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한때 빙의해 있던 안나 스완은, 기사님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안나 스완이 다른 이의 영혼을 빌리는 것에 기사님이 도움을 주셨다는 것뿐이죠.”

    안나는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안나 스완에게 보따리를 건네며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일이든 하겠다던 케이든의 모습, 그에게서 받은 보따리를 노인에게 건넸던 안나 스완의 모습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피르수스. 기사님께서 이 이름을 이야기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안나의 꿈속에 나타났던 노인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서점에서 만났던 노인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도 실제로 이 사람을 만났고, 그를 통해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는 길을 찾았습니다.”

    케이든이 무겁게 닫혀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아버지께서 도축업을 하셨습니다. 시기가 다른 아이를 밴 짐승의 간을 구하는 일쯤, 제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피르수스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황궁 소속 기사로 일하며 번 돈의 전부를 쏟아부었다. 안나 스완을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기꺼이 해낼 자신이 있었다.

    “저도 어떻게 이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안나 스완은 자신의 언니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황제 폐하가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고, 이에 대한 복수로 저의 영혼을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필 당신의 영혼을.”

    “원래 세계에서의 제 삶이, 너무나 볼품없었기 때문이겠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의지를 찾지 못하리라 예상했을 테니까요.”

    안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필리프가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안나가 제 곁을 떠나고 최면을 통해 확인했던 불우한 그녀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다시는 그때처럼 울게 하지 않으리라.

    필리프가 다짐을 새기며 테이블 밑으로 내려온 안나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저의 영혼을 멋대로 이용한 안나 스완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녀도 황녀에게 농락당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케이든이 입을 벌렸지만, 목구멍이 조여 바로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내었다.

    “어쩌면 당신이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심장을 내줄 정도로 사랑했던 이를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기억을 잃어 자신을 완전히 잊었다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언젠가는 그녀의 기억이 돌아와 자신이 내미는 손을 맞잡아 주는 순간이 오리라 확신했다.

    그녀를 마주 대할수록 그녀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아니었다는 의심이 크기를 키웠지만, 케이든은 애써 그 의심의 싹을 잘라내며 자위했다.

    분명 그녀가 제게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제 생각에는.”

    허탈과 실의에 빠진 케이든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나 스완이 기사님께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고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은 이유는, 기사님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좌절감을 추스르지 못한 케이든의 입가에 실소가 번졌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기사님께 사실을 이야기했다면, 기사님은 안나 스완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 망설임 없이 폐하의 목에 칼을 들이대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기사님이 위험에 처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기사님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숨겼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자신인 안나 스완의 입장이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녀와 온전히 다른 선택을 했으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떤 당신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을지 잘 생각해 보세요. 적어도 지금 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라,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케이든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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