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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7)화 (117/139)
  • 117화

    끼이익, 끼이익.

    이게 무슨 소리지? 오래된 나무가 마찰하는 불쾌한 소리를 들은 베르나가 감은 눈을 떴다.

    곧 물결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검은 강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돛단배에 자신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 그러니까…….

    누워 있던 배에서 일어난 베르나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방에 붉은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자신이 탄 배가 어디론가 향해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안개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배의 속도가 제법 빨랐다.

    여기가 어디지?

    베르나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필리프와의 결전이었다. 어차피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느니, 차라리 목숨을 잃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베르나였다.

    ‘이제 네가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어. 아,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네 남편인 타론이 너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을 포기했어. 이제 너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이곳에 남아있을 수도 없는 가련한 처지가 되었다는 말이야.’

    필리프의 말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패전으로 입은 막심한 손해에, 짐 하나를 더하기는 싫었겠지. 애초부터 제 남편의 깜냥은 거기까지였다.

    분명 승리로 돌아갔어야 마땅한 전쟁이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어야 할 장면은 제 발 앞에 무릎 꿇고 있을 필리프의 뒤통수였다.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에 칼집으로 손을 뻗는 필리프의 모습을 보며 베르나는 꾸역꾸역 울분을 삼켜냈다.

    베르나는 필리프가 검을 뽑기 전 미리 손바닥 안에 감춰둔 화살을 빼냈다. 필리프는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다행히 갑옷 중간 틈을 공략할 수 있었다.

    필리프가 몸을 움직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늘 갑옷에 숨은 구멍을 만들어놓는다는 사실을 첩자에게 들어 성공할 수 있었던 작전이었다.

    이제 됐다. 이러면 억울함을 조금은 풀 수 있다.

    모든 이에게 필리프의 천한 정체에 대해 알리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지만, 그가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게 되리란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구석 통쾌함이 번졌다.

    눈에 보이는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은 짧겠지만, 진짜 고통은 신체의 상처가 사라질 다음일 터.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손 쓸 수도 없이 독이 온몸에 퍼진 이후일 것이다.

    어리석은 당신은 그제야 자신의 패배를 뼈저리게 통감하게 되겠지.

    하하하하하.

    아마 웃으며 눈을 감았던 것 같다. 편안하게 웃는 얼굴을 필리프의 기억 속에 평생 남기기 위해, 부러 더 소리 내어 커다란 웃음소리를 뱉었다. 기묘하게 일그러지던 필리프의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아마 지금쯤 제 승리에 도취되어 찰나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으려나? 내가 지옥 불에 영원히 고통받을 모습을 상상하면서? 하, 그럴 수야 없지. 천하의 베르나 마티어스의 마지막이 그리 초라하게 장식되어서는 안 되지.

    내가 아무런 대비 없이 초라한 죽음을 맞을 줄 알고?

    베르나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주시하는데, 배 끄트머리에서 누군가가 부지런히 노를 젓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희끗희끗한 머리의 여인은 베르나의 인기척을 듣고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만, 어딘가 낯이 익은데.

    노를 젓는 여인의 등 뒤로 바짝 다가가 선 베르나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천천히 돌아가는 어깨와 얼굴.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한 여인이 베르나에게 스쳐 지나가는 시선을 주었다.

    이레네 유모? 아니 유모가 여긴 왜.

    베르나의 얼굴을 짧게 응시한 이레네가 다시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설마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것인가? 자신의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했던 이 여자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필리프의 머리통을 잘라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엣가시 같던 이레네를 없애버리려 한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요리조리 자신이 파 놓은 함정을 피해갔던 이였다.

    베르나가 이레네의 등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건 내 계획에 포함되지 않는 것인데.

    ‘당신은 오직 길을 열어 주는 만큼만을 내놓았습니다.’

    노인의 말을 떠올린 베르나가 이레네를 배 밖으로 밀어버리려 뻗은 손을 느릿하게 거두었다. 노인이 말했던, 길에 도달할 때까지 허튼 행동을 삼가야 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베르나가 이레네의 등에서 손을 거두기가 무섭게, 어둠만이 가득했던 강물 저 멀리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내내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던 이레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한 계약을 맺으셨더군요.”

    자신을 태운 작은 배가 희미한 빛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조금씩 빛이 가까워지면서, 검은빛이었던 강물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맑아진 강물에 제 모습을 비춰본 베르나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물에 자신의 그림자가 비치질 않았고, 강물 어디에서도 푸른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이곳은 내가 들은 곳이 아니야. 이건 내 계약과는 달라!

    분명 내 영혼이 살아있을 곳으로 가게 된다고 했어. 푸른 달빛을 향해 몸을 던지면 그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아, 그래. 그곳으로 가는 중인 거야. 곧 무사히 그곳에 도착하게 될 거야. 그 누가 감히 베르나 마티어스에게 허튼수작을 부리겠어? 그래. 그런 거야.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문은 조금 전 제가 닫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은 앞으로 영원히 다시 열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뭐라고?”

    “이제 당신에게 남은 길은 하나입니다.”

    밝은 빛을 뿜는 곳이 뱃전에 닿았다. 잡고 있던 노를 강물에 던진 이레네가 베르나를 향해 완전히 등을 돌렸다.

    “저와 제 오라비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단 두 가지. 오라비는 두 개의 능력을 한꺼번에 사용했지만, 저는 남은 하나를 끝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제 결정이 틀리지 않아 다행입니다.”

    “뭐?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베르나가 악다구니를 쓰며 이레네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레네가 베르나의 양손을 가볍게 결박하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허점. 제 오라비는 그 틈을 억지로 벌리는 것에 성공했지요. 저는 제 마지막 능력을 사용해 벌어진 틈을 메꾸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앞으로 함부로 그 틈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입 닥쳐! 나는 분명히 그자와 계약을 맺었어! 나는 내 영혼이 살아있을 곳으로 가게 될 거야!”

    당신의 영혼이 살아있을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뜨거운 유황불에 몸이 타 재가 되고, 다시 빠르게 소생한 몸은 온도를 높인 유황불 속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당신이 소멸시킨 수많은 영혼이 반갑게 당신을 맞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 제가 길잡이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함께라면 그리 외롭지는 않을 테지요.”

    “아니. 아니야! 이건 아니야! 안 돼!!!”

    빛에 잠겨 들기 시작한 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베르나가 강물에 몸을 던지려 했지만, 누군가 그녀의 발을 힘주어 잡아끌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몸이 어깨부터 까맣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이게 뭐야! 안 돼! 유모, 유모!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나를 도와줘! 유모! 유모!!!”

    재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몸. 베르나가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쳐 봤지만, 소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베르나의 몸이 전부 사라지고 공중에 흩날리던 재가 빚을 내는 곳으로 완전하게 빨려 들어간 이후, 이레네가 공중으로 손을 들었다. 베르나와 대치할 때는 내내 표정 변화가 없었던 그녀의 얼굴에, 후련해 보이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신이시여. 때늦은 심판을 청하옵니다. 신성을 능멸하려 한 자를 막아내지 못한 저를 벌하여 주시옵셔서.”

    말을 마친 이레네의 몸이 빛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레네의 몸을 완벽하게 삼킨 곳에서 부르르 물거품이 솟아올랐다.

    암흑만이 가득하던 공간에 빛이 차오르는 순간, 필리프와 안나가 동시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헉!”

    “안 돼!”

    꿈이었나. 아니, 꿈이라고 하기엔 지독하리만큼 생생했다. 만약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이레네가 영혼이 되어서도 허튼짓을 부리려는 베르나의 존재를 영원히 소멸시키고,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것이라면.

    거칠어진 숨을 오랫동안 진정시킨 필리프와 안나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필리프.”

    안나가 필리프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의 등허리가 흐른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안나가 아직 다물리지 않은 입술 사이로 뱉으려던 말을 삼켰다.

    이레네가 필리프에게 끝까지 비밀로 남겨두려 했던 진실. 그 진실을 지금도 필리프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며 필리프를 지키려 했던 이레네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안나가 새 침의를 들고 고개를 숙인 필리프의 곁에 앉았다. 땀에 젖은 그의 침의를 벗겨내고 새 침의를 입힐 때까지, 그는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서 더 자요. 아직 날이 밝으려면 멀었으니까.”

    “설마… 이대로 유모가 떠난 것이라면… 그게 사실이라면.”

    필리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안나가 여전히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그의 어깨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뭐라 그를 위로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오늘은 자고, 우리 내일 다시 얘기해요. 네?”

    필리프가 간신히 몸에 힘을 풀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안나가 그의 가슴에 웅크린 몸을 밀착하고 여전히 잔 떨림이 남은 그의 몸 전체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쉽게 진정되지 못하던 필리프의 몸이 조금씩 안정적으로 가라앉고, 그가 내뱉는 숨소리가 느릿하게 규칙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더 필리프의 가슴과 어깨를 쓸어내리던 안나가, 그가 잠든 것을 완전히 확인한 후에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어두운 허공을 한동안 바라보던 안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꿈에서 보았던 이레네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서 되뇌던 안나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목소리를 내보았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주신 것이 아깝지 않도록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습니다.

    부디 계신 곳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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