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6)화 (116/139)
  • 116화

    오후 일정을 모두 마친 필리프가 수행원에게 내일 일정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만찬 참여 이후에는 대사제님과 만남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에 오후 국무 회의는 모레 오전으로 미뤄두었습니다. 정확한 시간이 정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내일은 오전 일정을 서두르는 것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폐하.”

    서둘러 집무실을 나선 필리프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쁜 일정 탓에 안나와 자주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자 함이었다. 공식적인 업무를 마무리한 지금, 남은 것은 안나와의 오붓한 시간이었다. 필리프가 내딛는 발걸음에 경쾌함이 섞여들었다.

    빠르게 황궁 복도를 가로질러 침실로 다가서는데, 수행원의 뒤를 따라붙는 누군가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 발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니 이레네의 수색에 관한 지휘를 맡긴 수색 대장의 얼굴이 보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예, 폐하. 이레네 유모님의 수색과 관련한 소식이 있습니다.”

    황궁에 돌아와 즉시 이레네의 수색을 지시했지만,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지부진한 수색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레네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자취를 감췄고, 전방위로 확대한 수색에도 자그마한 단서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그게 정말인가.”

    “발견된 편지입니다. 유모님이 남기신 편지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필리프가 수색 대장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그의 손에 있는 편지지를 낚아챘다.

    “그래. 유모의 글씨체가 확실해.”

    필리프는 첫 단어를 다 읽기 전에도 편지에 적힌 글씨가 이레네의 필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하며 외로워하던 필리프를 위해 이레네는 매일 밤 다정한 글귀가 적힌 노트를 필리프의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두었다. 그녀가 써 준 글귀를 내내 되뇌며 잠을 청하던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잠시 숨을 멈춘 필리프가 낡은 종이에 적힌 그녀의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내내 미뤄두었던 수련을 위해 저는 잠시 먼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이제 폐하의 곁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이가 둘이나 생겼으니, 떠나는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부디 다시 뵙게 될 때까지 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

    필리프가 이레네의 짧은 편지를 반복해서 몇 번이고 읽어내려갔다. 안나를 만나기 전까지 이레네는 필리프에게 의지가 되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대의 뜻에 따라 주어야 하겠지.

    씁쓸한 미소를 지은 필리프가 이레네의 편지를 재킷 안쪽에 넣으며 수색 대장을 돌아보았다.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수색을 중단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수색 대장에게 새로운 임무를 전한 필리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창문 바로 옆에 놓인 테이블에 고개를 묻은 안나가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 결 좋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흩날리게 했다.

    “왜 또 저렇게 불편하게.”

    혹시 잠든 안나를 깨울까 봐 발끝에 힘을 준 필리프가 조심스럽게 안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촛불 하나가 유일하게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고 있었다. 필리프가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창문을 닫고, 안나의 얼굴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도대체 편히 쉬지를 못하는군.

    무언가를 적고 있었는지 한 손에는 펜대를, 다른 한 손으로는 스테판이 잠들어 있는 요람 손잡이를 꼭 잡은 채였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필리프가 요람 손잡이를 쥔 안나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 손에 힘을 풀게 했다.

    “…어?”

    손에서 펜을 놓게 하려 안나의 오른손을 잡으려던 필리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엄지와 검지, 중지를 모두 사용해 펜을 쥔 모습을 보자, 그녀가 자신이 사랑했던 이었음을 확신하던 순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으음…….”

    차마 안나의 손에 손을 대지 못하고 멈춰서 있는데, 기척을 느낀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잠긴 목소리를 냈다.

    “으응… 어, 언제 오셨어요?”

    “왜 또 이렇게 불편하게 자고 있어. 졸리면 침대에서 편하게 자라니까. 자, 이리로 손을 뻗어봐.”

    안나를 안아 침대로 옮길 생각으로 손을 뻗는데 그녀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여전히 잠기운이 남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잠을 자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방 안이 너무 더워서 깜빡 잠들었나 봐요. 이제 일어나야죠.”

    느릿하게 고개를 든 안나가 앉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꽤 오래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잔 것인지,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종이 한 장이 그녀의 뺨에 붙어 함께 딸려 올라왔다.

    입꼬리를 틀어 웃은 필리프가 안나의 뺨에 붙은 종이를 떼어내며 속삭였다.

    “혹시 침이라도 흘리면서 잔 건가? 이게 왜 붙어 있지?”

    필리프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 화들짝 놀란 안나가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며 빠르게 변명의 말을 뱉어냈다.

    “치, 침이라뇨! 아,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 땀이에요, 땀.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 방이 너무 덥다고. 너무 더워서 땀을 좀 흘렸나 봐요.”

    “그래, 그렇다고 해 두지.”

    “아니, 그렇다고 해 두는 게 아니라 진짜라니까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껏 솟아오른 필리프의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필리프의 손에서 종이를 획 낚아챈 안나가 다시 항변의 말을 뱉었다.

    “이것 보세요. 깨끗하잖아요. 아무것도 안 묻어 있잖아요. 정말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 알았다니까?”

    “아니, 제 얼굴이 아니라 이 종이를 보고 말씀하시라니까요. 자, 여기요!”

    결국, 참을 수 없어 소리 내어 웃은 필리프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안나의 뺨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어쩜 이렇게 한 군데도 빠짐없이 사랑스러울 수가 있는지.”

    “…에?”

    별생각 없이 조금 놀려 주려 꺼낸 이야기에 화르르 반응하는 것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그제야 필리프가 장난을 친 것이라는 걸 깨달은 안나가 제 볼을 감싼 필리프의 손을 뿌리쳤다.

    “아, 정말. 매번 왜 그러세요.”

    “정말 피곤한 거 아니야? 꽤 곤히 잠든 것 같던데.”

    “아니에요. 계속 방에 있었는데 피곤하긴요.”

    아, 그래… 말끝을 흐리는 필리프의 눈동자가 어쩐지 밝게 빛나는 것이 수상하게 느껴져 입을 벌리려는데, 그가 한 박자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뭘 그렇게 열중해서 쓰고 있었어? 궁금한데.”

    “아, 이거요.”

    안나가 손에 들린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스테판에 관한 거요. 오늘은 활동량이 얼마나 되는지, 먹은 음식은 어제와 얼마나 다른지, 어떨 때 칭얼거리는지. 사소한 것이라도 적어 두면 나중에 아이가 몸이 안 좋을 때 증상을 미리 파악할 수가 있으니까요.”

    “아, 그럼 나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는 건가?”

    “…네?”

    안나가 필리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운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눈동자가 어이없어 그저 말없이 그의 얼굴을 응시하는데, 그의 손이 빠르게 안나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아니, 왜.”

    “좀 섭섭한데? 생각해 보면 이제껏 단 한 번도 내게 무언가를 써 준 적이 없었잖아.”

    “그건…….”

    옴짝달싹할 수 없게 안나의 허리를 감싼 필리프가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를 안나의 오른쪽 허벅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다리가 안나가 입은 드레스 안쪽을 느리게 마찰하며 힘주어 버티고 있던 그녀의 다리 사이를 벌어지게 했다.

    “잠깐…….”

    “내가 섭섭해하는 게 이해가 안 돼?”

    “그, 그게 아니라요.”

    완벽하게 밀착한 몸에서 화르르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안나가 거칠어진 숨을 그에게 들킬까 봐, 서둘러 기품 없이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분명 피곤하지 않다고 했었지?”

    아니요, 저는 그런 의미로 피곤하지 않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으앗!”

    방심한 사이, 안나의 몸이 결국 공중으로 들렸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안나의 겨드랑이와 무릎 사이에 손을 넣은 필리프가 그녀를 안은 채 침대로 향했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기가 무섭게 위태롭게 타들어가던 촛불이 꺼지고 방안에 완벽한 어둠이 깃들었다.

    “촛불도 준비를 마친 것 같지?”

    어둠 속에서도 안나의 붉은 입술은 선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매끄럽고 부드러운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틈을 기다렸다가, 부드럽게 혀를 밀어 넣었다. 입가에 닿는 그녀의 입술은, 온도가 높은 물처럼 뜨거웠다.

    “아아…….”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솔직한 반응을 담은 흐린 신음이 터졌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 하나에, 온몸에 전기 같은 전율이 흘렀다. 그녀가 침대 시트를 잡고 있던 손을 움직이며 필리프의 어깨를 잡았다.

    “으음…….”

    필리프가 안나의 드레스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납작하게 가라앉은 배를 부드럽게 쓸고 가슴 근처로 움직이자,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는 소리가 필리프의 귓가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쉬이.”

    예민하게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 위에 입술을 내리고, 긴장한 그녀의 몸 곳곳에 입맞춤을 남겼다. 자신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솔직하게 반응해오는 모습이 못 견디게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안나의 눈두덩이 위로 입술을 짧게 붙였다가 떼어내고, 그녀의 몸에 바짝 하체를 밀착했다. 잔뜩 참았던 숨결이 터지며 뜨거운 숨이 필리프의 얼굴을 촉촉하게 적셨다.

    다시 완전하게 느슨해진 그녀의 몸. 필리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안나의 입술에 제 것을 겹치려는데, 내내 잠잠히 잠을 청하던 아이가 벼락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어?”

    스테판의 울음소리를 들은 안나가 필리프의 가슴을 초인적인 힘으로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둠을 가르며 요람으로 달려간 그녀가 황급히 우는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 그랬어? 엄마가 스테판을 속상하게 했구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자신에게는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다정한 톤으로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에 얼마나 행복한 미소가 걸려있을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 이제는 이런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

    피식, 웃음을 뱉은 필리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안나에게로 다가갔다.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있던 필리프의 얼굴에 조금씩 행복한 미소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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