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5)화 (115/139)
  • 115화

    “왜 그런 표정을…….”

    필리프가 다급히 입을 여는 수행원을 저지하며 안나의 등을 감싸 안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제 얼굴이… 좀 이상한가요? 아… 화장을 이렇게 해 본 적이 없어서…….”

    평소 그녀답지 않게 두꺼운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실수가 있었던 듯 보였다. 입술에 바른 붉은 염료가 턱밑으로 주욱 흘러내려 있었지만, 신하들을 앞에 두고 그녀에게 창피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다니. 너무 아름답기만 한데?”

    “네? 아, 무슨 그런 말을.”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물든 코끝이 사랑스러웠다. 내딛으려던 걸음을 멈춘 필리프가 뒤따르던 수행원과 호위병들에게 모두 등을 돌리라 지시했다.

    등 뒤 사람들의 눈이 자신과 안나를 향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뺨을 감싸며 입술을 겹쳤다. 살짝 마른 입술 표면은 따뜻하고 폭신했다.

    “읍.”

    그녀가 신음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며 뺨을 간지럽혔다. 그녀의 입술은 너무나도 달았고, 향기로웠다.

    “하아…….”

    필리프가 입술을 떼기 직전 안나의 뺨을 감싸던 손을 내려 그녀의 턱을 쓸어 염료 자국을 지워냈다.

    “아… 갑자기.”

    “아이는 내가 안도록 하지.”

    예상하지 못한 입맞춤에 당황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당장 다시 침실로 돌아가 격렬하게 입술을 겹치고 온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그녀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했다.

    안나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든 필리프가 먼저 발을 움직였다.

    “자, 이제 가지.”

    “예, 폐하.”

    그때까지 등을 돌리고 있던 신하들이 일제히 등을 돌려 황제의 뒤를 따랐다.

    “어, 이곳은.”

    필리프가 향한 곳은 안나가 처음 그와 입맞춤을 나누었던 황궁 중앙 정원이었다. 정원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그와 처음 숨결을 교환했던 순간이 어김없이 떠올라, 얼굴에 뜨겁게 열이 몰렸다.

    “자, 이쪽으로.”

    정원 우측으로 테이블이 옮겨져 있는 것도 그때와 같았다.

    “다시 부를 때까지 정원 밖으로 물러나 있어.”

    “예, 폐하.”

    필리프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인 수행원과 호위병이 일제히 정원 문을 빠져나갔다. 기다란 약초들로 빼곡하게 메워진 정원 문이 완전히 닫히자 공간에 필리프와 자신, 그리고 아이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지금 상태에서 황궁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할 것 같아서.”

    “네. 전 이곳도 좋아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손을 뻗어 찻잔을 집었다. 안나가 자신에게 달라며 손을 뻗었지만, 그가 어느새 안나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찻잔에서 하얀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자신들이 도착하기 직전 준비해 놓은 듯했다.

    “왜 그렇게 보지?”

    “아, 한 손으로 그렇게 안정적으로 아이를 안는 것이 신기해서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이를 자신은 이제 두 손으로도 오래 안고 있는 것이 벅찰 지경인데, 그는 마치 천 뭉치를 안은 듯 가볍게 한 손으로 아이의 몸을 받쳐 안고 있었다.

    “뭘 고작 이 정도를 가지고.”

    대수롭지 않게 답한 그가 안나의 손에 직접 찻잔을 들려 주었다. 찻잔을 받아든 안나가 찻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틀었다. 살짝 열린 창문을 통과한 바람이 그의 멋스러운 백금발을 부드럽게 흩트려 놓았다.

    아이를 안은 채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그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니 그림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와. 진짜 잘생겼다.”

    “응? 뭐라고?”

    “에? 아, 아닙니다.”

    분명 속으로만 생각했다고 여겼는데, 속마음이 슬쩍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흐른 모양이었다. 제대로 못 들었겠지? 안나가 다급하게 필리프에게서 떼어낸 시선을 찻잔에 고정했다.

    그냥 넘어가 주세요. 빨리 다른 이야기를 해요. 그냥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낼까? 무슨 얘기를 하지? 아, 그래. 스테판이 옹알이한 것을 얘기하면 되겠다.

    “저.”

    다시 그에게 시선을 주는데, 그의 표정이 어째 심상치 않았다. 안나가 익히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아, 역시 들었구나.

    “오늘 새삼스러운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저, 그게요.”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이 얼굴 말이야.”

    필리프가 태연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제 말은.”

    “아무래도 좀 가까이에서 보는 편이 낫겠지?”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었나? 제 얼굴 가까이 죽 얼굴을 들이민 필리프와 눈을 마주하며 안나가 허탈한 탄식을 뱉었다.

    그래요. 당신 잘났어요.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네요.

    이번에는 속마음을 꾹 삼켜낸 안나가 필리프의 뺨에 손을 얹어 가볍게 힘을 주었다.

    “그래도 아이는 꼭 두 손으로 안아야 해요. 갑자기 발버둥을 치거나 하면 놀라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바로 수긍한 필리프가 안나에게서 얼굴을 물리고 아이의 몸을 단단히 받쳐 어깨로 올려 안았다.

    “스테판 말이에요. 아무래도 보통 아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달라? 어떻게?”

    “글쎄, 벌써 옹알이를 하는 거 있죠? 그냥 옹알이도 아니에요. 단어랑 매우 흡사한 옹알이에요. 제 생각에는 조금만 있으면 금방 말을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렇다니까요. 아니 어제는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흥분한 것인지 안나의 말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아이의 천재성에 대해 말하던 그녀는 필리프의 반박에 목에 핏대를 세우기까지 했다.

    “그 정도는 그냥 평범한 거 아닌가?”

    “아니, 평범한 게 아니라니까요! 이거 정말 대단한 거예요.”

    “음. 뭐.”

    필리프가 호들갑을 떨며 반응해 주길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심심한 그의 반응에 힘이 빠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스테판. 너는 이렇게나 칭찬에 인색한 아빠가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이번에는 정말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은데?”

    “아뇨, 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필리프와 안나의 입가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그런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던 스테판도 까르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찻잔을 모두 비우고 다시 채워진 찻잔을 반 이상 비울 때까지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잠시 이야기가 멈춘 틈을 타, 안나가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저, 폐하. 이레네 유모님은.”

    이레네의 이야기에 필리프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웃음기가 걷혔다. 오두막을 떠나기 전 안나에게 이레네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필리프는 항구에 도착함과 동시에 이레네의 수색을 지시했지만, 아직 유의미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아직 수색 중이야.”

    “무사하시겠죠?”

    “유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니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불쑥 안나의 곁을 떠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강한 사람이다, 분명 안 좋은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마음속으로 위로해 보았지만, 걱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답답했지만, 군사들에게 그녀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고 수색 결과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수색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오면 바로 말을 전할 테니 그때까지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려 주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안나의 등을 쓰다듬은 필리프가 화제를 바꾸었다.

    “네가 이야기했던 그 노파 말인데.”

    “예, 폐하.”

    “아무래도 병환이 깊어 보이더군.”

    “…….”

    안나가 다시 황궁에 돌아와 필리프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에는 시장 선술집 사장인 헬렌의 도움이 컸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 안색이 좋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낸 안나는 전쟁이 있기 전 특별히 필리프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내일 네가 시장에 가 보는 건 어때.”

    “…네?”

    “그 노파도 네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황궁 밖으로 나가도 되나요?”

    “물론 호위병들이 변장하고 네 뒤를 따를 거야.”

    제 목숨을 살려주신 분입니다. 안나가 노파를 도와줄 것을 청하며 뱉었던 말이었다. 안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도 중요한 사람이었다. 필리프는 전쟁 동안 헬렌을 안전한 곳으로 도주시켰다.

    “그래도 스테판과 함께 가는 건 위험해. 시장에 보는 눈도 많을 테고.”

    “하지만 폐하와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길 수는 없어요.”

    “그래. 그러니까 내가 데리고 있겠다는 말이야.”

    태연하게 답한 필리프가 스테판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필리프를 바라본 아이가 다시 얌전히 필리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너무 순한 게 걱정이야.”

    “…네?”

    “이것 봐. 조금도 칭얼거리지 않잖아. 사내아이가 이렇게 물러빠진 성격이면 곤란한데.”

    안나가 필리프의 품에 안긴 이후 칭얼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스테판의 뒤통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시도 때도 없이 잠에서 깨어 보채는 통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지난 며칠 간의 밤이 떠올랐다.

    그래. 너도 그 사람이 칭얼거림 따위 통하지 않을 사람이란 걸 깨달은 거겠지.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아무래도 제 성격보다 폐하의 성격을 더 많이 닮은 아이 같아서요.”

    “음, 칭찬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힘든데?”

    필리프가 제품에서 곤히 잠든 스테판을 테이블 옆 요람에 눕힌 후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최대한 빨리 당신을 황후 자리에 앉힐 생각이야.”

    “저는.”

    “물론 당신의 정체에 대해 완전히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어. 믿을 사람도 없겠지만, 자칫하다가는 당신이 마녀라는 의혹이 제기될 수도 있으니까.”

    필리프는 안나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자신이 세워 놓은 계획에 대해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날이 올 때까지 안나가 지치지 않기를 당부했다.

    “먼저 허무맹랑한 마녀사냥을 온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중요해. 혹 이후에 당신의 정체가 알려지더라도 절대 위험해지는 일이 없도록.”

    필리프의 계획은 오로지 안나와 스테판을 안전히 지키기 위해 세운 것들이었다. 차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그의 사랑이 전해지자 가슴이 빠듯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케이든 기사도 만나봐야 하겠지. 공수표를 날리며 그를 이용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네.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해 드릴 테니까요.”

    해야 할 일을 차례로 정리하며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창가에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럼 그만 방으로 돌아갈까요? 오늘 피곤하실 텐데.”

    “잠깐.”

    “네?”

    “추억의 장소잖아. 기억을 되살려 봐야지.”

    뜨거운 혀끝이 닫힌 입술을 쓸었다. 저항 없는 입술을 가른 그의 혀끝에서는 쌉쌀하지만 달콤한 찻잎 향이 풍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