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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4)화 (114/139)
  • 114화

    필리프의 몸의 회복력은 실로 놀랄 만한 정도였다. 반나절 만에 완전히 정신을 차린 그는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의 귀환을 결정했다.

    복부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이 염려스러워 안나는 황궁에 도착하기 전 그의 상처를 치료하길 원했지만, 황궁으로의 조속한 귀환을 원하는 필리프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고단한 여정이었다. 베르나가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을 향한 위협이 모두 사라졌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험한 산을 내리고, 바다를 건너는 내내 필리프는 안나와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가슴을 졸이던 필리프가 마음을 놓은 것은, 항구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부대를 발견한 이후였다.

    “폐하.”

    “쉿. 먼저 이들을 안전히 황궁으로 모시도록.”

    아물었다고 생각한 복부에서 붉은 핏방울이 솟아나고 있었다. 안나가 보지 못하게 황급히 복부를 손으로 감춘 필리프가 수행원에게 지시사항을 일렀다.

    “황궁 내부 상황은 내가 말한 대로 정리해 놓았겠지.”

    “예, 폐하.”

    “미리 말한 곳으로 여자와 아이를 데려다 놓고, 다시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 누구도 방에 들여서는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황궁을 떠나기 전 안나와 아이가 지낼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놓으라 지시했던 황제였다. 전쟁이 끝났지만, 황궁 내부에 첩자가 남았을 가능성이 있기에 최소 인원만이 관련 사항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

    “폐하.”

    아이를 품 안에 안은 안나가 필리프를 향해 등을 돌렸다.

    “먼저 상처를 치료하세요. 최대한 빨리 의원을 만나보셔야 해요.”

    “안 그래도 먼저 의원을 만나보려던 참이었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항구에 의원을 대기시켜 놓았거든.”

    필리프가 복부를 잡지 않은 반대 손으로 안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불안을 걷어내 주어야 했다.

    “나는 이제 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사람이 두 사람이나 생겼어. 너와 우리의 아이를 위해 소중히 지켜야 할 삶이야. 절대 함부로 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내려다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다정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안나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서 가. 너도 아이도 너무 지쳤을 테니 조금이라도 빠르게 기력을 회복해야지.”

    “하지만…….”

    두 눈으로 필리프의 상태를 지켜보려 했지만, 등 뒤 수행원의 소리 없는 독촉에 결국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발을 떼어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타면서도 안나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 출발해.”

    “예.”

    마차의 출발과 동시에 안나가 창문 너머로 길게 고개를 빼냈다. 빠르게 멀어지는 시야 너머로 필리프가 복부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 *

    “옳지, 옳지. 이제 다 먹은 거야?”

    젖을 물었던 아이가 고개를 물렸다. 크게 하품하는 아이의 눈망울에 잠기운이 가득했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우리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몽실몽실한 아이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안나가 부드러운 비단 이불이 깔린 요람에 아이를 눕혔다.

    “하아…….”

    내내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편 안나가 창문 밖을 응시했다. 오늘은 전쟁에 참여했던 군사들과 기사단이 수도로 귀환해 사열식을 여는 날이었다.

    “와아!!! 카마르 제국 만세!”

    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시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수도로 집결한 듯했다. 황궁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함성과 휘파람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혹시 잠든 아이를 깨울까 살짝 창문을 연 안나가 멀리 보이는 기사단의 행렬을 응시했다.

    카마르 제국의 표식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전쟁에 사용했던 검과 창을 가슴 위로 올리고 느리게 전진했다. 군사들이 지나갈 자리를 열어둔 시민들은 어마어마한 함성을 지르며 전쟁의 승리와 해방감을 만끽했다.

    “이제 정말 끝난 건가.”

    끝없이 이어지는 개선 행렬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함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놀란 아이의 울음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아, 어쩌나. 미안, 스테판.”

    황급히 우는 아이를 안아 들고 달래보았지만,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소리를 키웠다. 창문 밖에서 울리는 함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 되겠다.”

    지금 아이를 재우지 못하면 잠투정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아이를 안은 채 황급히 창문을 닫으려 창가로 다가가는데, 목청을 높여 울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울음을 멈추었다.

    “응?”

    “바바… 바바…….”

    꼼지락 허공으로 올라간 아이의 손가락이 창문 밖을 가리켰다.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안나가 나지막한 감탄사를 뱉었다.

    “아…….”

    두 개로 갈라진 기사단 틈에서 필리프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끼는 흑마에 몸을 실은 그가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검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검 이곳저곳에 검붉은 핏자국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가 하는 말이 들리지는 않았다.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시민들이 다시 우레와 같은 함성을 뱉었다.

    “아, 그랬구나. 우리 아기, 아빠가 보고 싶었던 거였어?”

    “우우… 우우…….”

    항구에 대기하고 있던 의원을 만난 필리프는 황궁이 아닌, 임시 진지에서 치료를 받았다.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기에 제국 밖 의원들을 쉽게 불러 모을 수 있는 곳에 수술실을 겸한 비밀 장소를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베르나는 죽기 전 마지막 일격으로 필리프의 복부에 독화살을 꽂아 넣었다. 그대로 목숨을 잃게 하는 독이 아닌, 서서히 사지를 마비시키고 목숨을 앗아가는 맹독이 함유된 화살이었다.

    성분은 비소, 납, 벨라도나 등 간단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증상이 바로 나타나지 않아 자연스러운 병사로의 위장이 가능했다. 필리프가 이 독성의 정체를 파악한 것은 안나 때문이었다.

    ‘제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을 때 가장 공을 들여 찾아보았던 것은 지금 이 시기에 사용하던 독극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독성을 이용해 암살을 노리는 자들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안나는 여러 종류의 독약 성분을 이야기해주었고, 각각의 독성이 인체에 들어갔을 때의 변화를 설명했다.

    ‘독극물을 해독할 방법은 많습니다. 인체에 퍼진 독성이 많지 않다면 천연 재료로도 충분히 독성을 빼낼 수 있어요. 지금 시기에 가장 유명한 독성을 해독하는 방법을 조사해 왔습니다.’

    베르나의 화살을 맞은 직후 필리프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안나가 직접 만든 약병 속 액체를 머금었고, 의료진의 세심한 진료를 받은 끝에 완전히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스테판, 저기 아빠 있잖아. 손 흔들어 봐.”

    “바바… 바바…….”

    임신 후 제대로 몸을 돌볼 새가 없었던 안나가 몸을 회복하는 사이, 필리프는 두 차례 안나를 찾아왔다. 완연하게 혈색이 돌아온 그는 안나의 곁에 누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스테판 마티어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마르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를 황태자의 이름이었다.

    “잠시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예.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온 수행원의 손에는 화려한 드레스와 자그마한 제복이 들려 있었다.

    “그게 뭐죠?”

    “황제 폐하께서 가져다주라 명하신 옷입니다. 개선 행사를 마치시고 함께 갈 곳이 있다고 전하셨습니다.”

    “함께 갈 곳이요? 오늘이요?”

    “그렇습니다.”

    황궁에 돌아오고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오직 두 번 아주 짧게 그의 얼굴을 본 것이 전부였지만, 안나는 조금의 섭섭함도 느끼지 않았다. 전쟁 직후 황제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얼마나 많을지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궁의 세력 구도는 얼기설기 얽혀 있었고, 황제에게 조금이라도 반하는 세력 전체를 제거했다가는 민심이 크게 흉흉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직전 전쟁이 있었을 때는 적당한 선의 숙청을 진행했던 필리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필리프는 반역에 조금이라도 책임이 있는 자들을 숙청하는 것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역모를 꾀한 수많은 이들을 전부 몰살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을 완전히 마친 이후 개선 행사를 진행했다.

    다시 황궁에 돌아온 이후 한순간도 쉼 없이 일을 처리한 필리프와 재회의 시간을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단장을 도울 시종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혼자 준비할 수 있어요.”

    들뜨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묵례한 수행원이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안나가 화려한 드레스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테판. 오늘은 아빠와 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지?”

    “우우…….”

    “그렇다고?”

    스테판이 안나의 품을 벗어나려 몸을 쭉 뻗었다. 기특한 아이가 엄마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려는 듯 보였다.

    “그래. 엄마가 빨리 준비할게.”

    방 한쪽에 있는 커다란 거울 밑에 단장에 필요한 각종 화장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안나가 각 재료의 사용법을 알 턱이 없었다.

    “그래. 어차피 그에게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수도 없이 많이 보였는걸. 그냥 평소처럼 간단히 하자. 간단히.”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얼굴에 분칠하고 색을 더할수록 점점 욕심이 생겼다. 은제 화장품 단지와 비단 정리함을 뒤지는 안나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어? 이건 뭐지? 입술에 바르는 건가? 와. 색 좀 봐. 꽃잎으로 만든 건가? 색이 엄청 예쁘네.”

    솜뭉치에 염료를 묻혀 뺨을 붉게 물들이고, 빻은 연지벌레 가루를 물에 묻혀 입술에 혈기를 더했다. 이후로도 한참을 화장대에 앉아 있던 안나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곧 폐하가 도착하십니다. 준비는 마치셨습니까?”

    “아, 네. 거, 거의 다 됐습니다.”

    안나가 헐레벌떡 화장대를 벗어나 곳곳이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된 상아색 폴로네즈 드레스를 입었다.

    “맞다, 우리 스테판.”

    선잠을 자던 스테판을 달래 인형 옷처럼 자그마한 제복을 입힌 안나가 아이를 업을 띠를 챙겼다. 머리를 다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다시 화장대에 앉을 시간이 없었다. 문밖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안나.”

    “…네. 나갈게요.”

    헛기침하며 떨리는 심장을 다잡은 안나가 방문을 열어 필리프를 맞이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필리프의 눈가에 묘한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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