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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1)화 (111/139)
  • 111화

    서둘러야 한다. 서둘러야 해.

    굳게 감긴 두 눈과 핏기없는 얼굴. 미약한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마치 얼어붙은 인형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생명이 소실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안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레네는 안나가 정신을 잃기 직전, 제게 남겼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유모님… 부디 이 아이를… 이 아이를 무사히 그분의 품에 안겨주십시오. 이 아이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도록… 부디…….’

    “두 사람 전부 그분의 품에 안전히 안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창밖 달이 빛깔을 바꾸기를 기다리던 이레네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안나의 얼굴에 드리운 싸늘한 죽음의 기운에 마음이 조급해져,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에 빠르게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휘이잉.

    주문의 마지막 구절을 읊기 무섭게 눈앞이 암흑으로 완전히 뒤바뀌고, 곧 이레네의 얼굴 위로 눈발 섞인 차가운 바람이 내리쳤다. 온몸을 그대로 두 동강 내 버릴 기세의 사나운 바람이었다.

    “네가 나를 먼저 찾는 것이, 이번이 두 번째였던가?”

    한참을 불어오던 바람이 조금씩 잠잠해지기 시작했지만, 눈보라는 여전했다.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를 해치며, 이레네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나를 찾았지?”

    쑥 발밑이 꺼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오피르수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땅 밑까지 닿는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 있었고, 싱그러운 젊음으로 가득하던 얼굴이 깊게 팬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피르수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본 이레네가 추위에 얼어붙은 입술을 떼어냈다.

    “최근에는 요물과 상대하는 이를 찾기 힘든 모양이지?”

    이레네의 말에 코웃음을 뱉은 오피르수스의 오른손이 우측으로 이동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한번 피어오른 불길이 점점 그 크기를 키워나갔지만, 그럴수록 주변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레네의 곁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오피르수스가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잔뜩 검버섯이 낀 쪼글쪼글한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묻지. 왜 나를 찾았지?”

    “당신이 원했던 것을 들어주기 위해서.”

    “흐음…….”

    그가 불길을 향해 손가락을 뻗자 타오르던 불꽃이 사라졌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 완전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온몸을 싸늘하게 얼어붙게 했던 추위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내가 원했던 것이라…….”

    “그래.”

    오피르수스의 검붉은 눈동자가 이레네의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녀가 자신을 떠보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음, 그것을 내게 호의로 덥석 내어 주진 않을 테고. 그 대가로 네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목숨을 살려내.”

    “누군가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다는 건,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을 텐데. 난 오직 중계자의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야.”

    “당신이 그녀에게 건 주문을 깬다면, 그녀는 이곳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어.”

    오르피수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난 그저 모든 이에게 선택권을 주었을 뿐이야. 주문이 깨진다면, 그녀는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돼. 시간의 방의 문이 영원히 닫혀 버릴 테니까.”

    “어차피 다시 돌아갈 생각으로 이 세계로의 귀환을 선택한 이가 아니야.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이레네의 태도는 단호했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주름으로 뒤덮인 제 손등을 내려다보던 오피르수스가 이레네가 들고 온 꾸러미를 주시했다.

    “내가 네 말을 순순히 들어주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당신에게 걸었던 결계를 풀어주는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소박한 부탁이니까. 이 결계가 깨진다면, 당신은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될 거야.”

    오피르수스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걸렸다.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으려다가 다시 이레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 아닌가? 그 여자와 피가 섞인 것도 아닌데.”

    오피르수스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피가 섞인 갓난아이의 안전만 확인하면 그만인 것을.”

    이레네의 가는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어려 있었다. 비웃음이 서린 표정으로 오피르수스를 응시하던 그녀가 입술을 떼어냈다.

    “피가 섞인 사이가 전부 특별한 것은 아니지. 당신과 나의 관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지 않나? 설마 당신, 나와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빈정거리는 이레네의 말투에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던 오피르수스가 빠르게 본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어색한 웃음기가 스민 오르피수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레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제안하지.”

    “제안?”

    “당신에게 득이 될 제안이야. 당신의 제안에 승낙한 사람 중 한 명이 나와 함께 가게 될 것이니.”

    “내 제안에 승낙한 사람을 네가 어찌 알고 있지?”

    “당신이 내게서 그토록 앗아가고자 했던 능력, 예지력 때문이지.”

    오피르수스의 눈썹이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내가 그 여자와 함께 간다면, 당신은 힘들이지 않고 한 명의 영혼을 얻게 되는 거야. 곧 그 주름진 얼굴에 젊음의 활기가 끼얹어지겠지.”

    “음. 그렇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오르피수스가 흔쾌히 이레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 당신을 막지 못했던 것을 후회해. 요사한 방법으로 세상의 이치를 깨뜨리는 것만은 막았어야 했거늘.”

    오피르수스가 제 능력을 완전히 키워나가기 전, 어떻게든 그를 막았어야 했다. 힘의 균형이 이레네에게로 기울어져 있던 어린 시절이었다면, 그를 저지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은 일이었다.

    “이 모두 내 선택으로 초래한 결과이었음을.”

    말을 마친 이레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직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삶의 끝을 볼 수 있는 능력. 이레네는 그 능력을 오피르수스에게 사용했다. 그의 생의 소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오피르수스에게 걸었던 결계가 풀렸다.

    그래, 이것으로 되었다. 이것으로.

    “으읏!”

    이레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밝은 빛이 똬리를 틀고 앉은 오피르수스에게로 이동했다. 이레네는 정신을 놓기 직전까지 필리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네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다. 부디 행복해야 한다, 나의 아들.

    * * *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팔, 어깨, 허리, 엉덩이, 허벅지가 각각 다른 통증을 호소하며 욱신거렸다. 멀쩡한 것은 정신뿐이었다. 번쩍 눈을 뜬 안나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아아아…….”

    안나가 목소리를 내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목구멍 안쪽이 부어 잔뜩 쉰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이… 이레네…….”

    이레네의 이름을 내뱉는 것까지는 간신히 성공했지만, 목소리는 제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바짝 마른 입술이 따끔거려 그대로 입을 닫은 안나가 살짝 떴던 눈꺼풀을 내리감으려는데, 요란하게 귓가를 때리는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

    분명 손가락 하나도 꿈쩍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절로 몸이 움직였다. 한순간에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운 안나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요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가.”

    이를 악물고 요람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천근같이 무거운 몸을 질질 끌다시피 간신히 요람 앞에 도착한 안나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내려 아이의 얼굴을 마주했다.

    “우우… 우우…….”

    하늘이 떠나가라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안나와 눈을 맞추었다. 아이의 뺨을 향해 뻗는 안나의 손가락이 발작하듯 부들부들 떨렸다.

    차마 아이의 뺨에 닿지 못한 손끝이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데, 아이가 꼼지락거리며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왔다. 툭툭, 안나의 손끝을 건드려대던 자그마한 손가락이 안나의 손가락을 잡아 쥐었다.

    처음으로 맞닿은 아이의 체온.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강한 전율이 전신으로 번졌다.

    “…알아보겠어? 그래, 엄마야.”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흐른 눈물에 아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손등으로 눈물방울을 걷어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다시 샘솟았다.

    “그래… 그래. 엄마가 보여?”

    용기 내어 아이의 뺨에 손을 얹었다. 아이의 살결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했다.

    “차갑지? 미안.”

    뺨에 닿은 안나의 차가운 손가락 온도에 놀랐는지, 아이의 칭얼거림이 시작되었다. 미안함에 멀찌감치 손을 거둔 안나가 고개 숙여 아이와 눈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배 속에서부터 너무나 많은 고난을 겪은 아이였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마음이 벅찼다.

    “엄마한테 안겨 볼래? 그래, 잠깐만.”

    여전히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 온도에 아이가 놀랄까, 안나가 온도를 높이기 위해 손을 옷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자, 이제 됐어.”

    강보에 싸인 아이를 들어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편하지 않은지 작은 몸을 꼼지락거리던 아이가 이내 안나의 가슴팍을 깊게 파고들었다. 안나의 움직임에 헝클어진, 아이의 빛나는 백금발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아가. 아빠 머리색을 닮았네? 눈도 코도 입도 얼굴형도 모두 아빠를 닮았어. 정말 예쁘다. 예쁘다, 우리 아가.”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저 건강하게 태어나길. 그리고 하나만 더 바란다면 아이가 부디 필리프의 모습을 닮게 되길.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간절히 바랐던 소원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도 괜찮으니, 부디 아이가 필리프의 얼굴을 닮아 태어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마주한 아이의 얼굴 어디에서도 안나 스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찌푸렸던 얼굴을 완전히 편 아이가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제 딴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한참을 입술을 움직이던 아이가 벌렸던 입술을 닫고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바스락거리는 움직임도 느릿하게 멈추었다.

    “졸려? 그래, 피곤하지? 이제 코 자자.”

    제 품 안에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던 안나가 나직한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꼭 안은 아이의 무게감이 조금 더해진다 싶더니, 곧 아이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해 갔다.

    안나가 천사 같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공을 바라보며 감사의 말을 끊임없이 내뱉은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운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이제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 당신을 기다릴 테니, 너무 늦지 않게만 돌아와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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