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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0)화 (110/139)
  • 110화

    “음, 그러니까 내가 막 다섯 살 생일이 지났을 때였던가.”

    창가 앞 낡은 안락의자에 앉은 베르나가 눈을 감으며 처음 이 오두막에 발을 디뎠던 순간을 떠올렸다.

    다섯 살 생일 선물로 아름다운 드레스와 보석함을 선물 받고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던 순간, 아버지는 느닷없이 함께 나들이를 가자며 베르나를 불러냈다.

    설마 나를 위해 또 다른 선물을 준비한 건가? 베르나는 냉큼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아버지. 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해요?’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을 한 베르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아버지가 향한 곳은 산 깊은 곳에 있는 오두막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단다, 베르나. 자, 저기 오두막이 보이지?’

    베르나의 아버지가 홀로 사냥을 즐길 때 이용하던 오두막 중 하나인 이곳은 깊은 산중, 지대가 높고 험한 곳에 요새처럼 지어져 매일 산을 드나드는 사냥꾼들에게도 쉽게 발견되지 않을 곳이었다.

    하늘이 찢어진 것처럼 비를 퍼부어댄 탓인지 오두막 안은 서늘한 찬기만이 가득했다. 마차도 오를 수 없는 험한 산길을 지나느라 있는 대로 화가 난 베르나가 볼멘소리를 뱉었다.

    ‘아버지, 여긴 대체 어디예요? 여기에서 좀 이상한 냄새가 나요. 나가고 싶어요.’

    ‘베르나. 우리는 오늘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렴. 응?’

    베르나가 여전히 화를 감추지 못하고 불만을 표하고 있을 때, 오두막 뒤쪽 쪽문이 열렸다. 쪽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자신보다 두세 살 정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소년의 눈꺼풀 아래로 은실처럼 환한 속눈썹이 드리워졌다.

    ‘베르나. 어서 오빠에게 인사해야지.’

    ‘오빠요?’

    ‘그래.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나지 않지? 이제부터 우리 베르나를 든든하게 지켜줄 오빠란다.’

    오빠? 저 멍청한 시골 촌뜨기 따위가 내 오빠일 리 없잖아? 내 오빠는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를 알 수 없는 열병에 시달렸다고 했잖아. 조산아로 태어나 내내 비실비실 앓다가 병에 걸렸던 오빠가, 저렇게 건강하게 되살아왔다고?

    ‘뭐 하니, 베르나. 먼저 오빠에게 인사해야지.’

    환한 미소를 지은 소년이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 훑어내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꼭 닮은 곱슬머리를 늘 원망해왔던 베르나였다.

    당장이라도 제 앞에 선 사내아이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잡아 뜯어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베르나는 아버지 앞에서 늘 짓곤 했던, 예의 그 ‘천사 같이 환한 미소’를 꾸며냈다.

    ‘아버지. 그런데 오빠는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예요? 어머니가 오빠 방 다 치우시지 않았어요?’

    ‘어… 그거야 오빠에게 새 방을 만들어 주려고 그런 거지. 베르나는 이제 오빠가 돌아왔으니 참 좋겠구나. 함께 공부하고 비밀 얘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나눠 먹고. 안 그래?’

    ‘아버지.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에요.’

    ‘오빠가 어렸을 때 많이 아파서 황궁을 떠나 있었단다. 이제 몸이 회복되었으니 가족과 함께 지내야지. 자, 필리프. 이리 와서 동생과 인사하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제 눈을 피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당황의 빛을 읽어낸 베르나는 아버지가 제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엉망으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단속한 베르나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와 선 사내아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이답지 않게 커다란 손을 잠시 내려다보던 베르나가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싱긋 웃었다.

    ‘반가워, 오빠.’

    어젯밤 유모의 말을 듣지 않고 손톱을 깎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손가락을 끝을 구부린 베르나가 제 오빠라 주장하는 사내아이의 손바닥에 바짝 손톱을 세웠다. 멍청한 촌뜨기가 분명 당황한 표정을 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래. 반가워, 베르나. 앞으로 잘 지내보자.’

    소년의 입가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자신이 진짜 오빠라는 듯한 태도에 분노가 치솟았다.

    베르나가 안간힘을 쓰며 잡은 손끝에 힘을 실었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는 거두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릴 때까지.

    마치 자신의 수를 전부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평온하기만 한 필리프의 검은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 사람인지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첫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였다. 잘못 꿴 단추를 맞추려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했지만,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엉망이 된 옷은 그저 잡아 뜯어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잘못 꿴 단추 따위 다시 처음부터 맞출 필요가 없었다.

    베르나는 자라는 내내 끊임없이 필리프를 시험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낙상 사고를 꾸며냈고, 그가 치료를 받는 사이 그가 아끼던 말을 감쪽같이 처리했다. 유일하게 그가 신뢰했던 충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황궁에서 내쫓았고, 그가 아는 주변 모든 이들의 곁에 몰래 감시자를 붙였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필리프의 태도 앞에서, 베르나의 시험은 점점 대담해져 갔다. 독성을 가진 약초를 다루는 약초상을 알아냈고, 완벽한 성공률을 자랑하는 살수까지 끌어들였다. 하지만 필리프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덫을 피해갔다.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필리프가 끝내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베르나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를 눈앞에서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

    어차피 후손이 없는 그였으니, 그가 죽으면 응당 차기 왕위 계승권자인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황제의 자리였다. 내내 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황제의 감투를 쓰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 확신했다.

    “그냥 조용히 물러났으면 좋았잖아. 그럼 이렇게 수고로울 필요가 없었잖아.”

    필리프를 눈앞에서 없애 버리기 위해 꾸몄던 모든 일들이 베르나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 모든 일이 그저 이따위 결말을 보기 위한 헛수고에 불과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인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이것이 완전한 끝은 아니야. 너는 끝이라고 믿고 싶을 테지만.”

    베르나는 제 꿈에 나타나 마지막 동아줄과 같은 길을 내어준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당신에게 또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습니다.’

    ‘또 다른 세계?’

    ‘나는 오직 길을 열어주는 역할만을 할 뿐. 그 길에 들어선 이후의 삶은 오로지 당신 스스로 개척해야 할 것입니다.’

    어렴풋하게 들은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더라? 그래, 맞아. 내게 충성을 맹세하던 가련한 여인에게 들은 적이 있었어. 어떤 대가를 내어 주면 영혼의 이동을 꾀할 수 있게 돕는 자가 있다고.

    베르나가 이 말을 철저하게 무시했던 것은, 굳이 영혼의 이동을 꾀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했던 것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베르나의 꿈에 나타난 것은 패색이 한층 짙어진 전쟁에서 참을 수 없는 절망감과 분노를 느꼈던 순간이었다. 다른 길이 있다면 어처구니없는 노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더 나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길을 내게 공짜로 내어주진 않을 테고, 분명 대가를 원하겠지?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노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생명을 품은 생명체의 간을 구해오십시오. 같은 날 세 개의 간을 구해야 하며, 철저히 싱싱한 상태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생명을 품은 생명체의 간을 구하는 것. 베르나에게는 콧방귀가 절로 나올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노인은 제게 바칠 간의 상태에 대해 몇 가지 주문을 덧붙였다. 흔쾌히 노인의 요구를 받아들인 베르나는 잠에서 깬 직후 노인의 요구를 수행했고, 그날 밤 즉시 노인을 소환했다.

    ‘내가 당신이 사실을 말하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노인이 원하는 것을 내어 주기 전, 베르나가 노인의 멱살을 강하게 쥐고 다그쳤다. 베르나의 손길에 힘없이 나풀나풀 흔들리면서도, 노인은 입가의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제 말을 믿는 것 이외에, 다른 수가 있으십니까?’

    ‘…뭐?’

    ‘말씀드렸지만, 저는 당신에게 길을 열어드릴 것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제 말을 믿는 것뿐이겠지요.’

    노인이 베르나의 손에서 꾸러미를 낚아채는 순간, 주변에 숨어 있던 까마귀 떼들이 요란스러운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노인의 모습이 베르나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믿어보는 수밖에.”

    노인이 사라진 자리에 피어오르던 시커먼 그늘을 떠올린 베르나가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타닥타닥.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베르나가 창가로 다가갔다. 이제 곧 말이 오를 수 없는 지대에 들어서겠군. 시야 끄트머리에 흑마를 탄 필리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감쪽같이 없애 버렸던 그의 애마와 너무나도 닮은 모습의 말을 보는 순간, 베르나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스몄다.

    “드디어 제대로 찾아왔네. 기다리느라 슬슬 지루해지려던 참이었는데.”

    자그마한 망원경을 손에 쥔 베르나가 필리프의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말에서 내린 필리프가 천천히 산을 오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를 뒤따르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마지막일 테니까.”

    공중으로 두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켠 베르나가 메고 있던 목걸이를 풀며 창문을 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고하듯 날카로운 바람이 창문 틈 사이로 거세게 밀려들어 왔다.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잡아 정리한 베르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친 바람을 감당하지 못한 구름이 군데군데 찢겨 어지럽게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이제 열 걸음. 아홉, 여덟, 일곱, 여섯, 다섯.

    베르나가 조금씩 제게로 가까워지는 필리프의 얼굴을 진득하니 응시했다. 가파른 비탈길을 완전히 넘어선 필리프가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고 있는 베르나와 눈을 마주했다. 딱딱하게 다물려 있던 입매가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묵묵히 베르나와 눈을 맞추던 그가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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