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09)화 (109/139)
  • 109화

    안나의 고통스러운 중얼거림을 들은 이레네가 미리 준비해 놓은 약초 다발을 그녀의 몸 곳곳에 뿌리기 시작했다. 액막이 풀이 제 역할을 하기를 기다려야 했지만,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안나의 몸부림이 약초를 죄 흩뿌렸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몸을 가만히 두고!”

    “아아… 필리프… 필리프… 이제야 와 줬군요… 우리 아이… 우리 아이가 저기 있어요. 어서… 어서 안아 보세요. 너무… 너무 예쁘죠?”

    멍한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본 안나가 아이가 누운 요람을 향해 정신없이 팔을 흔들어 보였다. 황급히 안나의 뺨을 잡은 이레네가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환상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자, 제가 하는 말이 들리십니까!”

    이레네가 환상을 보는 안나의 어깨를 흔들고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이레네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속절없이 흔들리던 안나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삶에 대한 희망을 온전히 놓은 자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허탈한 미소였다.

    “유, 유모님… 아이를… 아이를 부탁드려요. 이 귀한 아이를… 필리프의 품에 안겨 주세요… 필리프의 품에…….”

    이레네의 손등 위에 힘없이 제 두 손을 올려놓은 안나가 잔뜩 쉬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쥐어짰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안 됩니다! 눈을 떠 보십시오!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정신을 놓으면 안 됩니다! 정신 차려!”

    안나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는 것을 확인한 이레네가 축 늘어지는 그녀의 몸을 힘주어 껴안았다. 이대로라면 오피르수스를 소환하기까지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었다.

    오피르수스를 소환해, 안나의 생명을 구할 미끼를 던질 때까지 어떻게든 혼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한다.

    “떠올리십시오.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사람의 얼굴을.”

    * * *

    “헉!”

    황급히 상체를 일으킨 필리프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집무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아 선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긴 한숨을 뱉었다. 소파 주변이 자신이 흘린 땀에 젖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간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한꺼번에 어깨 위에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며칠째인지도 희미했다. 안나를 남겨 두고 떠난 이후 처음으로 그녀가 제 꿈속에 나타나 주었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에 몸서리치는 자신을 위로하듯, 꿈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달콤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아쉽게도 자신이 내민 손을 맞잡아 주지는 않았던 그녀였지만.

    ‘필리프. 필리프.’

    그녀가 불러 주었던 제 이름만큼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사랑해주세요. 꼭 사랑해주신다고 약속해요. 영원히 사랑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녀는 계속해서 사랑해 달라고 애원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도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던 그녀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당연하잖아. 너를 향한 내 사랑은 평생 변함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마음을 가져간 이는 이제껏,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 하나뿐이었다.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그녀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어보았지만, 그녀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니, 아니에요.’

    ‘뭐라고? 안나? 안나!’

    그녀는 내내 사랑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겠다고, 절대 그녀를 향한 사랑이 변할 일은 없으리라고 소리 높여 외쳤지만, 그녀는 한층 더 슬픈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조금만 더 오래 꿈을 꾸었으면 좋았을 텐데. 슬픔에 잠긴 표정이었지만, 잠깐이라도 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득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무섭게 치밀어 올랐다. 괴로웠다. 토해 내지 못한 처절한 울음이 배 속 장기를 할퀴는 느낌이 들었다. 필리프가 책상 서랍 깊이 숨겨 놓았던 궐련 갑을 꺼내 들었다.

    “하아…….”

    안나를 되찾게 된 이후 단 한 번도 손에 들지 않았던 궐련에 불을 붙이고 폐 속 깊이 들이마셨다. 천천히 뿌연 연기를 뿌리며 꿈에 보았던 그녀의 얼굴과 그녀가 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잠깐. 분명히 그녀가 다른 누군가를 불렀던 것 같은데…….”

    들어 올렸던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감은 필리프가 꿈결에 들었던 안나의 목소리를 자세히 떠올리려 온 정신을 집중했다. 눈부시게 밝은 빛에 휩싸여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며 그녀가 뱉었던 말은.

    우리… 우리 아가… 아가?

    설마 아이가 태어난 것인가? 그녀는 무사한가?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난 것일까?

    필리프가 궐련 개비를 바닥에 내던지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자신을 찾아와 안나를 만나게 해달라 청했던 케이든과 여전히 자취를 찾을 수 없는 베르나를 떠올린 필리프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안나의 안전이 완전히 보장되었다고 판단하기 전에는, 성급한 움직임은 무조건 삼가야 했다.

    안나가 있는 곳 주변에 이레네와 연락이 닿을 믿을 만한 사람 몇 명을 배치해 놓았으니 괜한 불안감에 시달릴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안전할 것이다. 아니, 안전해야만 한다.

    흐른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를 벗어 내린 필리프가 차가운 물로 몸을 씻어내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말씀하신 지도를 준비하였습니다.”

    “들어와.”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수행원의 보고를 듣고, 전쟁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 회의에 참석하고 남는 시간에는 틈틈이 베르나의 수색 과정을 살펴야 했다. 안나와 헤어지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고 있는 일상이었다.

    “차출 받았던 군대와 관련된 사항은 명한 대로 처리했는가.”

    “예, 폐하. 각 지방 영주들이 차출한 군사 1명 단위로 계산해 처리하였습니다.”

    “그래. 자료와 지도는 거기 두고 나가.”

    집무실을 나서려던 수행원이 등을 돌리려다 멈추어 서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식사는 됐어.”

    최근 황제는 지나치게 업무에 집중하며 끼니를 거르는 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며칠째 부쩍 야윈 그의 얼굴을 보니 건강이 염려스러웠지만,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는 법이 없는 황제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던 수행원이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필리프가 수행원이 집무실을 나서는 것을 보지 않고 보고 있던 자료에 시선을 고정했다.

    필리프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황궁 관료들과 귀족, 지방 영주들에게는 그들의 예상보다도 후한 보상을 지급했고 제국에 등을 돌린 자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매서운 형벌을 내렸다.

    제국을 팔아넘겼다는 죄목하에 귀족 열 명이 목숨을 잃었고, 잘린 그들의 머리는 모든 시민이 볼 수 있는 황궁 입구에 걸렸다. 제국을 배신한 자들의 말로를 본보기로 전시해 놓은 것이었다.

    전후 남은 물자를 꼼꼼히 점검하고 서류마다 인장을 남긴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남은 곳은…….”

    베르나의 수색과 관련해 집무실 벽에 걸어 놓은 지도 가까이 다가간 필리프가 엑스 표가 그려져 있지 않은 구역을 신중히 살폈다. 그리고 문득 안나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분명 안나 스완의 언니와 베르나 황녀가 깊이 연관된 것 같았습니다. 두 사람이 황궁 밖에서 만나던 장소가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두 사람 모두 안심하며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공간이요.’

    ‘황궁 밖?’

    ‘안나 스완은 황궁 주방 시종이었어요. 베르나 황녀가 아무리 주변인을 포섭해 두었다고 할지라도 황궁 안에 폐하 쪽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경계했을 거예요. 황궁 안에서의 계속되는 만남은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음…….’

    ‘분명 베르나 황녀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제국 어딘가에 존재할 거예요.’

    두 사람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접선할 수 있는 장소이자 베르나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곳.

    황궁 시녀였던 안나 스완의 언니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날이 밝기 전 황궁으로 돌아와야 했을 테니, 황궁에서 거리가 그리 먼 곳은 아니었겠지. 오로지 베르나 쪽 사람들만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을 테니, 만남의 장소로 향하는 도주로는 황궁 내 별관을 이용했을 테고. 마차 소리를 경계하여 움직일 만한 곳은 별관에서 한참 떨어진 호수가 있는 쪽.

    차근차근 생각을 더듬은 필리프가 지도에 엑스 표식을 더해가기 시작했다. 안나가 제게 해 주었던 이야기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바탕으로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지도의 한 지점에 동그라미 표식을 그렸다.

    “그래… 왜 이 사실을 진작 떠올리지 못했을까.”

    필리프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기억이 조금씩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베르나가 자신이 가진 증거를 무기로 아버지를 협박하고 필리프의 폐위 약속을 받아냈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밤, 이레네는 급히 황궁을 찾았다.

    ‘유모. 베르나가 증거를 없앤 것이 확실한가.’

    ‘황제 폐하 앞에서 직접 증거를 없애시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원본이 불에 타 버렸으니, 만일 황녀님이 필사를 남겨 놓으셨다고 해도 황태자님께 크게 위협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대체 그 증거를 어디에 숨겨 두었던 거지?’

    ‘사람 대부분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남은 장소를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베르나 황녀님은, 그 반대였습니다.’

    그렇다면 베르나에게 가장 불행했던 기억으로 남았을 장소? 분명 자신과 깊이 연관이 되어 있을 장소였다. 그녀와 자신이 동시에 기억을 공유한 장소라면.

    필리프가 즉시 종 줄을 잡아당겨 수행원을 호출했다.

    “예, 폐하.”

    “오늘 회의를 미루도록 해. 다녀와야 할 곳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폐하.”

    다시 지도 쪽으로 시선을 돌린 필리프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장 갑옷과 검을 준비해. 마차는 필요 없어. 직접 말을 몰고 가겠네.”

    “예, 폐하. 즉시 호위병을 대기 시키겠습니다.”

    “아니. 일단은.”

    말을 멈춘 필리프가 표식을 그린 지도를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자네와 나, 호위 대장 이렇게 셋이 움직이는 것으로 하지.”

    “…예, 폐하.”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오직 자네와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할 것이야.”

    수행원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필리프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