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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06)화 (106/139)
  • 106화

    햇빛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안나가 어렵사리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간밤 쪼그려 잠을 자서 그런지 온몸이 뻐근했다. 길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서 창가로 다가갔다.

    “아… 좋다.”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따뜻한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셨다. 어느새 들이켠 공기에 눅눅함이 섞이기 시작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겨울의 끝자락과 찰나 같았던 봄이, 차례로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

    제국의 최남단에 있는 카밀 섬에 도착하여 생활한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커다란 버드나무가 시야를 가려주어 섬 주변에서는 쉽게 오두막을 발견할 수 없기에 몸을 숨기기에는 제격인 곳이었다. 

    “이제 너와 만날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너도 좀 답답하지? 조금만 참아. 곧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될 거야.”

    배 속 아이에게 다정한 말을 건넨 안나가 창가 옆 안락의자에 앉았다.

    “몸은 괜찮습니까.”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눈꺼풀을 내리감는데, 등 뒤로 다가온 이레네가 안나의 손에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들려주었다.

    “아, 몸은 너무 좋아요. 계속 잠이 오는 게 좀 문제지만요.”

    “몸이 무거워도 조금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를 마시고 잠시라도 산책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유모님.”

    고개를 끄덕인 이레네가 부지깽이를 들고 창가 옆 벽난로의 불씨를 살리기 시작했다. 오두막 안은 아직 훈훈했지만, 바닷가 바로 옆에 지어진 탓에 불이 꺼지면 바닷바람에 오두막 전체가 금세 싸늘해지곤 했다.

    “어제 설치해 놓은 올가미에 토끼 한 마리가 잡혔습니다. 저녁으로 고기 수프를 먹으려면 미리 물을 끓여 놓아야 하겠네요.”

    “아, 수프는 제가 준비할게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안나와 함께 갔던 산행을 떠올린 이레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나는 이레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올가미에 새끼 토끼 한 마리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고, 이레네가 시선을 돌린 틈에 토끼의 발을 감은 덫을 풀어 주었다. 자유의 몸이 된 토끼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며 풀숲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그날 저녁 둘은 호밀빵으로 저녁을 때우고 말았다.

    풀과 빵만 먹어서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달래려면 고기를 먹어야 했기에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토끼 손질을 안나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할 테니 지금은 앉아 있어요.”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한 벽난로 주위로 뜨거운 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찻잔을 깨끗하게 비운 안나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다시 배 안쪽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흣!”

    만삭이 되며 느끼게 되는 태동은 초반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이가 있는 힘껏 발로 배를 밀어내고 배 속을 휘젓기 시작하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이레네가 빠르게 안나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크게 심호흡하십시오. 자, 제 손을 잡고 먼저 크게 숨을 들이쉬고, 좋습니다.”

    안나의 출산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느낀 이레네가 식은땀을 흘리는 안나의 이마에 손등을 얹고 손목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체온도, 맥도 모두 정상이었다. 건강하게 아이가 태어나는 데 필수 요건은 산모의 건강이었다. 안나의 배에 손을 얹고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이레네의 눈초리가 그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아직 산통을 느낄 시기는 아닌데… 아무래도 조금 이르게 출산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아…….”

    조산이라는 말인가? 아이가 예정보다 일찍 태어나면 아무래도 건강하지 못할 텐데 괜찮은 걸까? 인큐베이터도 없는 이곳에서 무슨 수로 아이의 건강을 장담할 수 있지? 근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무래도 제 아비를 꼭 닮은 모양입니다.”

    걱정스러운 안나와는 달리, 이레네의 얼굴은 침착하고 평온했다.

    “예?”

    “폐하께서도 예정보다 이르게 세상 빛을 보셨습니다. 아마 답답하셨던 모양이지요. 어미의 배 속에 갇혀 있는 것이.”

    필리프가 태어났던 순간을 떠올리듯, 이레네가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두 가지 세상을 경험한 아이입니다. 누구보다 강인한 아이로 자랄 테니, 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네.”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이가 문제없이 태어나고 건강하게 살아가리라는 말. 소중하게 배를 끌어안은 안나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리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산에 다녀올 테니 쉬고 계십시오.”

    “산에요?”

    “필요한 약초가 있습니다.”

    출산을 도울 때 필요한 물건은 이미 준비해 놓았지만, 출산 시 통증을 줄여 줄 수 있는 약초를 구하기 전이었다. 안나를 홀로 남겨 두고 산을 나서는 것이 염려스러워 내내 미뤄두고 있던 일이었지만, 안나의 상태를 보니 여유를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자, 이것을 받으십시오.”

    “무엇입니까?”

    이레네가 안나의 손에 쥐여 준 것은 손톱 크기 정도로 자그마한 조약돌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이 돌을 가슴에 품으십시오. 길진 않지만, 당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로부터 결계를 쳐 줄 것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얇은 망토로 얼굴을 가린 이레네가 급히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걸쇠로 문을 걸어 잠근 안나가 창가로 돌아와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이레네와 함께 생활한 이후 홀로 있는 것은 처음이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

    어서 바깥세상을 보고 싶다는 듯 최근 거친 움직임으로 안나를 힘들게 했던 배 속 아이가 뱃가죽을 쓰다듬는 듯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고 자신을 위로해주는 듯한 아이의 움직임에 가슴이 뻐근하게 부풀어 올랐다.

    “와. 우리 아가가 엄마보다 훨씬 더 용감하네? 고마워, 아가. 엄마 힘낼게.”

    배를 쓰다듬으며 침대에 누운 안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자동으로 필리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 전체에 내려앉는 따스한 눈망울, 온기 가득한 손길. 미치도록 그가 그리웠다.

    * * *

    “폐하. 수색 상황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음.”

    신중한 눈빛으로 보고서를 훑어본 필리프가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에 표식을 남겼다. 이제 남은 지역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 산간지역. 아직 베르나의 행적은 묘연했다.

    “파이만 제국으로부터의 서신입니다.”

    지상 공격에서 완전한 궁지에 몰린 파이만 제국은 카마르 제국에 맞서 격전을 치렀지만, 끝내 공격을 버텨내지 못해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에 패한 대가는 컸다. 타론은 필리프가 내민 전쟁 조약 합의서에 따라 국토의 절반을 포기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군사들을 전쟁 포로로 넘기는 내용에 서명해야 했다. 파이만 제국은 전쟁으로 보유하고 있던 군사의 절반을 잃었다.

    “음. 사절단은 꾸려졌는가.”

    “예.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구성하였습니다. 사절단의 규모와 참가 병력이 적힌 문서입니다.”

    “그래. 이만 나가 봐.”

    “예, 폐하.”

    몇 개월간 이어진 피의 전쟁이 이제 그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차분하게 수행원에게 건네받은 서신과 문서를 살피던 필리프가 벽에 걸린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파이만 제국이 항복을 선언했지만, 그것이 완전한 전쟁의 끝은 아니었다. 제 손으로 베르나의 목숨을 끊어 놓기 전까지는 절대 이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할 수 없었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건가. 대체 어디에.”

    해상전이 승리를 거둔 후 퇴각하는 함선을 가로막은 카마르 제국은, 함선에 있는 인원 전체를 낱낱이 조사했다. 하지만 함선 어디에서도 베르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사망한 시신에서도 그녀와 비슷한 인상착의는 발견되지 않았다.

    분명 베르나가 탄 함선이 포탄 파편에 맞아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확인했다. 즉시 포탄을 전부 쏟아부었으니 제대로 된 피신은 어려웠을 터. 전쟁으로 폐쇄된 항구를 통해 제국을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하니, 분명 그녀는 아직 이 제국 안에 있다.

    안나를 향한 그리움이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참다못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진지를 나서기 직전 필리프는 베르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베르나는 서안나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암시했다. 베르나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안나와의 만남을 미뤄두어야 했다.

    지도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베르나가 숨어 있을 만한 장소를 예측하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케이든 기사가 알현을 청합니다.”

    “들여보내.”

    기사단에 합류한 케이든은 카마르 제국의 지상전에 막대한 공을 세웠다. 눈치채고 있던 적의 퇴로를 막아서며 한 박자 빠른 항복 선언을 받아냈고, 이로 인해 해상전이 훨씬 여유롭게 전개될 수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자리에 앉지.”

    모든 것을 놓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실낱같은 희망.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케이든은 안나 스완의 생사 확인을 위해 목숨을 바쳐 전투에 임했다.

    필리프는 전쟁이 완전히 끝났을 때 안나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을 케이든에게 다시 한번 굳게 약속했다. 한 점의 숨김도 없을 것이라는 황제의 약조를 믿을 수밖에 없는 케이든은 그저 힘없이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그래. 전쟁 이후 그대의 거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가.”

    필리프의 질문에 즉답하지 못한 케이든이 굳게 입을 다물며 허공을 응시했다. 웃고 있는 것 같기도,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표정을 지은 그는 지금 자신이 사랑했던 안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듯 보였다.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한없이 기다린다는 사실이 어떤 감정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필리프였기에, 답을 독촉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케이든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거취에 대해 확실히 결정을 내리기 전, 먼저 그분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 거취는 그 이유에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분?”

    케이든이 필리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주쳐오는 눈동자에서 결연함이 읽혔다.

    “제가 원하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는 분, 서안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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