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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05)화 (105/139)
  • 105화

    “자, 이제 움직여야 합니다.”

    바람 소리에 섞인 긴 휘파람 소리. 출발 신호를 들은 안나와 이레네가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토굴 짚단을 걷어냈다. 두 사람 모두 이미 한참 전부터 이동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후였다.

    토굴 안으로 뻗은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온 안나와 이레네가 자신들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후 단발 비명을 내뱉었다.

    “…폐하!”

    “아니… 어떻게…….”

    모든 것이 힘에 부치고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필리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버텼던 안나였다.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이제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감이 거짓말처럼 한꺼번에 사그라들었다.

    “이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말이지.”

    얼굴 위로 내려앉는 시선이 서슴없이 따뜻했다. 어둠 속에서 말없이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필리프가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안나가 깊게 호흡하며 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담백하고 따뜻한 그의 살 냄새가 두꺼운 외투를 뚫고 희미하게 콧속을 파고 들어왔다. 살짝 고개를 낮춘 그가 안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뭘 그렇게 놀라.”

    “…그냥… 이렇게 무사하시다는 게 너무 다행이어서.”

    뜨거운 그의 숨결이 안나의 귓속과 귓바퀴를 번갈아 스쳤다. 잠시 고개를 떼어낸 그가 웃음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를 뱉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니. 설마 내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을까 봐?”

    태연한 그의 목소리에 발끈한 안나가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장난이라도 절대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제가 말씀드렸죠? 폐하께서 잘못되시면 앞으로 절대, 아니 죽어서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래. 네게 미움받을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잠시 품을 벗어났던 안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거친 바람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되어 준 그의 품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해후가 너무 길어지는 것 아닙니까.”

    차분하게 가라앉은 이레네의 말투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붙어 있던 필리프와 안나의 몸을 떨어지게 했다. 슬금슬금 필리프의 등 뒤로 자리를 옮긴 안나가 이레네의 눈치를 살폈다.

    “흐음, 그래. 일단은 어서 몸을 피해야 해.”

    헛기침을 뱉으며 바로 표정을 굳힌 필리프가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첫발을 내디뎠다. 정체가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함인지, 그의 손에는 횃불도 들려 있지 않았다.

    “자, 이쪽으로.”

    앞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 속, 안나가 앞서 걷는 필리프와 뒤따르는 이레네와 보폭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라이젠 산 동남쪽 출입구였다. 이 출입구를 따라 걷다 보면 두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은 산의 정상을 향하는 길이었고 왼쪽은 제국 남단의 작은 항구와 통해 있는 곳이었다. 필리프의 발이 출입구 좌측으로 향했다.

    “산을 좀 타야 해. 괜찮겠어?”

    “그럼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너무 지쳐 그대로 눈을 감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안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이슬이 마르지 않았는지 숲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음이 급했지만, 성급히 발을 놀리다가는 그대로 미끄러져 비탈을 구를 수도 있었다. 세 사람이 걸음의 보폭을 줄이며 신중하게 발을 움직였다.

    “이쪽으로.”

    갈림길에 선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끌었다. 여기서부터는 완만한 내리막길이었지만, 길 끝자락에는 탁류가 흐르는 계곡이 있었다. 먼저 빠르게 내려가 계곡물을 내려다보던 필리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미리 폭이 좁은 지점에 밧줄을 연결해 놓았지만, 며칠 전 확인했을 때보다 물살이 거셌다. 허리까지 잠길 정도로 불어난 계곡물과 이끼가 끼어 미끄러운 바닥. 안나를 업고 건너다가 혹시라도 발을 헛디딘다면 오히려 그녀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비로 물이 많이 불었어. 자, 이 밧줄을 받아.”

    필리프가 계곡 반대편 커다란 돌에 연결해 놓은 밧줄을 안나의 손에 쥐여 주며 그녀의 등 뒤에 바짝 몸을 밀착했다. 시간이 좀 지체되더라도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유모는 잠시 기다려.”

    “저는 혼자 건널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필리프를 안심시킨 이레네가 밧줄 끝을 당겼다.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야 해.”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거침없이 계곡물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계곡물 온도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찼다. 몸이 빳빳하게 얼어붙었지만, 발끝에 힘을 주어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을 내디뎠다. 입가에서 허연 입김이 쉴 새 없이 뿜어졌다.

    “아앗!”

    계곡을 거의 다 건너 커다란 바위 위에 발을 올려놓는데, 미끌미끌한 바위가 그대로 발을 밀어냈다. 몸의 중심을 잃은 안나가 계곡물에 입수하기 직전, 필리프의 손이 안나의 허리를 낚아챘다.

    “자, 어서 내 몸을 밟고 올라서.”

    한 손으로는 밧줄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로 안나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안은 필리프가 그대로 계곡물에 입수하며 몸으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미안함을 느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필리프의 등을 밟아 힘껏 도약한 안나가 커다란 나무를 잡고 손을 뻗어 필리프가 계곡물을 빠져나오는 것을 도왔다. 잡은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힘주어 안나의 손을 잡은 필리프가 흠뻑 젖은 몸의 물기를 털어내며 이동했다. 다행히 계곡을 지나 남단 항구까지는 완만한 평지가 이어졌다.

    잠시 걸음을 멈춘 필리프가 등을 돌려 안나의 안색을 살폈다.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을 한 그녀가 애써 입꼬리를 틀어 올려 미소짓는 것이 보였다. 아이를 밴 몸으로 극한의 상황을 버텨내고 있는 그녀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괜찮아질 것이라 다독여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 줄 수 없는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거의 다 왔어. 몸은 괜찮은 거야?”

    어둠에 가려 필리프의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가 또렷이 그려졌다. 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안나가 부러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그럼요. 제가 어렸을 때 걸 스카우트 출신이라 산 타는 건 일도 아니에요.”

    “걸 스카우트?”

    “아, 아니에요.”

    필리프가 안나와 이레네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한 뒤 잠시 멈추었던 발을 움직였다. 물에 젖은 그의 몸 전체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흠뻑 젖은 옷이 몸에 한기를 전한 탓인지, 그의 너른 등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당장 그의 젖은 등을 꼭 안아 온기를 나눠주고 싶었지만, 집중한 그를 방해할 수가 없었다. 사방이 고요한 와중에 이따금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숲이 우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했던 공간에 희미하게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필리프의 발이 멈춘 틈을 타 빠르게 그에게 다가간 안나가 다급히 입고 있던 망토 끈을 풀며 필리프의 젖은 옷깃을 잡았다.

    “아, 옷이 너무 젖으셔서 안 되겠어요. 제 옷이라도 걸치세요.”

    “네 옷이 내게 맞을 리가 없잖아?”

    필리프가 안나가 내민 망토를 잡아 다시 그녀의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 망토 끈이 풀리지 않게 단단히 묶은 필리프가 안나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속삭였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이 정도 추위쯤, 내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이제 거의 다 왔어. 저쪽이야.”

    숲을 빠져나오기 직전 안나와 이레네를 멈춰 세운 필리프가 빽빽한 나무 틈 사이의 간격을 넓히며 주변을 살폈다.

    “자, 이것을 받아.”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 두툼한 종이 더미를 넘겨주었다. 안나와 이레네가 향하는 도주처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혹시 모를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때 도움을 청할 이의 위치가 적힌 자료였다.

    안나가 드레스 안쪽 미리 만들어 놓은 공간에 종이 더미를 넣는 것을 확인한 필리프가 말을 이었다.

    “전쟁은 이제 곧 끝날 테지만,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았어. 그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때까지는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

    필리프의 말에서 그가 아직 완전하게 베르나와의 마지막을 맞이하지 못했음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짐작할 수 없을 기다림. 안나가 그대로 힘이 빠져 쓰러지려는 몸에 가까스로 힘을 주며 버텨냈다.

    “그때까지 날 믿고 기다려 줄 수 있겠어?”

    안나가 금방이라도 터지려는 울음을 꾹꾹 삼키며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무 틈 너머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어쩐지 그의 따스한 시선이 얼굴에 내려앉는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기다릴 거예요. 돌아와 준다는 약속만 해 준다면.”

    “약속할게.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안나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찰나 같은 입맞춤이 못내 아쉬웠지만, 빠르게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울음을 참으려는 것인지 안나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 있었다.

    나무 틈 너머로 건너편 상황을 확인한 필리프가 몸을 움직이기 직전 이레네를 돌아보았다.

    “유모. 내가 그대를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말을 뱉는 필리프의 눈빛이 검광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안나를 안전하게 지켜내야 한다는 경고이자 부디 안나를 무사히 제 곁으로 돌려달라는 부탁이 섞인 말이었다. 말을 뱉는 필리프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란 감정이 진하게 서려 있었다. 그의 눈에서 두려움을 걷어 내주기 위해 이레네가 설핏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그럼.”

    “…폐하. 하이젠 부르크 가문. 이 가문의 이름을 기억하십시오.”

    이레네가 등을 돌리려는 필리프의 옷깃을 잡으며 말을 뱉었다. 그녀가 한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날이 밝기 전까지 진지로 돌아가려면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필리프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몸을 일으키며 수풀 사이의 틈을 넓혔다.

    다시 또 언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안나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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