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며칠째 이어지는 큰비로 바닷물이 불어난 것은 파이만 제국의 공격에 악재가 되고 있었다. 전시 상황에 대한 보고를 듣던 베르나가 손에 쥐고 있던 서신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래서, 아직 수도에는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야?”
“예, 황후님. 불어난 바닷물로 물살이 예상보다 너무나 강해졌습니다. 해상 공격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어, 수도로의 진격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반드시 성공할 계획이라고 하이만 제국에서 호언장담하지 않았었어? 이렇게 밀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해상 전술에 능한 하이만 제국과 손을 잡기 위해 파이만 제국 국경에 인접한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 오로지 전쟁의 승리만을 위해 지난 시간 잠 한숨 편히 자지 못하고 버텨왔는데.
“카마르 제국이 유인 작전에 성공했습니다. 해상전을 치른 경험이 거의 없는 그들이 어찌 이런 작전을 구상했는지…….”
“듣기 싫어! 고작 한다는 소리가 적들의 작전이 우리보다 나았다는 말이야?”
상대의 기만 전술에 철저히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분명 군사력과 병기의 양과 질 모두 카마르 제국보다 월등한 상황이었다.
설마, 하이만 제국에 끄나풀을 심어놓은 것이 아닌가? 아니야. 첩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수 개월간 주의를 기울였지만 의심스러운 상황은 포착되지 않았어. 그리고 전쟁에서 패한다면 하이만 제국 쪽의 손해가 막심할 텐데, 섣불리 카마르와 손을 잡았을 리 없잖아?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간밤 보고를 위해 적진을 나선 작전 사령관이 고개를 떨구었다.
“황제께서는 지금 무얼 하고 계시는가.”
“임의로 마련한 진지에 피신 중이십니다.”
“하, 피신?”
베르나가 코웃음을 뱉으며 모아쥔 주먹을 책상에 내리쳤다. 응당 최전방에 서서 군사들을 지휘해야 마땅한 자가, 군사들을 방패 삼아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소리인가?
“황후 폐하. 아무래도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대치 상황이 계속된다면 군량과 마초가 바닥날 것이고, 원조가 없다면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발이 묶여 장병들이 사지로 몰릴 가능성이 큽니다.”
그깟 장병들의 죽음 따위 베르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장병 수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갈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역사는 패자가 아닌 승리자만을 기억할 뿐.
“해상 공격에서 반전을 가져간다면,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는 없을 거야. 지금 불어난 물 때문에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했지? 혹, 제방을 허무는 것은 어떤가.”
“생각해 보았지만, 카마르 쪽에서 이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각 제방과 항구 인근에도 수많은 군사가 배치된 상황입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작전 사령관은 군대가 진퇴양난의 지경에 처해있다는 소리를 뱉으며 베르나에게 결단을 내리기를 촉구하고 있었다. 그런 사령관 뒤에는, 지금이라도 당장 퇴각하기를 고대하는 무능한 남편이 자리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한시라도 빨리 우리가 백기를 들기를 원하시는 모양이군.”
사령관이 답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차피 모든 결정권은 제국의 황제에게 있었으니 베르나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았다. 타론은 결정을 내리기 직전 베르나에게 이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시키려 했을 뿐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그럴 수는 없어. 하,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카마르 제국의 속국이 된다? 평생 필리프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황실의 적통도 아닌, 미천한 후레자식에게? 천만에. 절대 그럴 일은 없어.
“직접 폐하를 뵙고 말씀드려야겠어.”
“…예?”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베르나가 문을 바라보며 외쳤다.
“밖에 누구 있는가!”
“예, 폐하.”
“당장 카마르 제국으로 갈 테니, 차비를 시작하도록.”
“예? 아… 예. 알겠습니다, 폐하.”
가만히 앉아서 필리프의 개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직접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제 손이 되어 대신 칼을 뻗을 자를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아야 할 거야. 내 칼이 언제 네 목을 노릴지 모르니까.
* * *
“폐하! 적군의 함선 한 척이 격침되었습니다!”
“더 몰아붙여라! 한 대도 남기지 말고 전부 격침시키도록!”
“예, 폐하!”
카마르 제국의 해상 작전이 파죽지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파상 공격을 견디다 못한 파이만 제국의 적함은 하나둘 깊은 바닷물 속으로 잠겨 들었지만, 아직 항복 선언은 들려오지 않았다. 적군의 시체가 떠다니는 바닷물에서 풍기는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러댔다.
“육군 상황은 어떤가.”
“적군은 여전히 수도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군이 방어 태세로 전환한 이후에는 산발적인 공격만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적군의 진지는 방어선 근처에 구축되었습니다.”
“상황이 좀 더 잠잠해지면 바로 두 번째 작전을 실행할 테니 준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필리프는 승리의 그림자가 짙게 내비치고 있는 해상 공격이 마무리되는 대로 무장한 군사들이 대치하고 있는 북부 외곽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행히 적군이 수도에 발을 들이지 못했으니 아직 안나의 안전은 보장된 상황이었다.
“황궁 상황은.”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황궁 내에 첩자가 숨어 있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첩자가 활동을 시작했고, 황궁 시종을 비롯해 총 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자를 체포했는가.”
“투항 요구 즉시 자결했습니다.”
신중한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필리프가 등 뒤에 선 전투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통치권을 자네에게 넘기겠어.”
“예?”
“완전한 투항이 없다면 절대 공격에 머뭇거림이 있어서는 안 돼.”
“폐하. 벌써 육지전을 준비하시려 합니까.”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적군이 기댈 곳은 아직 큰 피해가 없는 육지전뿐이야. 어쩌면 이미 원조를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어. 그들보다 한발 빨리 움직여야 해.”
무엇보다 안나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토굴 내에 열흘 정도를 버텨낼 수 있는 음식과 체온을 유지할 옷가지를 준비해 놓았지만, 며칠 내내 계속되는 비로 더는 토굴에서 지내는 것이 수월치 않을 수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육지 전투가 시작되지 않은 만큼 일반 저택에 머무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지만, 임신한 그녀의 몸이 얼마나 더 버텨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배를 준비하겠습니다. 폐하. 자, 너희 넷은 폐하와 함께 항구로 향하도록.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를 안전히 호위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육지 전투에 적합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필리프가 성인 다섯 정도만이 몸을 실을 수 있는 작은 배에 올라탔다. 커다란 함선에 가려져 적군에게 움직임을 들킬 염려는 없었지만, 바닷길을 건너는 내내 적군의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몸을 웅크렸다.
무사히 바다를 건너 항구에 도착한 필리프가 항구 끝에 마련된 군마에 올라탔다. 군마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필리프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사합니다.”
“음. 이레네 유모는.”
“지금 함께 계십니다.”
“근처에 있는 인력은?”
“토굴 바로 아래 연락병 한 명과 정찰병 두 명이 상시 대기 중입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씩 적군의 진지가 가까워지며 낮은 탄도로 포격하는 소리와 화살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 상황을 파악하려 군사들이 앞장선 틈을 타 수행원이 필리프의 곁에 바짝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폐하. 먼저 안전한 곳에 들러 상처를 치료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별것 아니야.”
해상 전투에서 적군이 쏜 포탄이 갑판을 맞췄고, 하필 튄 갑판 파편이 필리프의 배 중앙 갑옷 틈 사이에 와 박혔다. 승선한 의료 대원이 즉시 응급 처치를 했지만, 생각보다 흐른 피의 양이 많았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처가 다른 부위로 감염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폐하.”
“먼저 그곳으로 갈 테니 앞장서도록.”
필리프가 우려를 보이는 수행원의 말을 단박에 잘라냈다. 당장 한가로이 상처를 치료할 시간 따위 없었다.
안나가 몸을 숨긴 토굴의 정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필리프의 측근 여섯 명뿐이었다. 필리프는 황궁 내 안나에 대한 의심의 싹을 자르고, 황궁이 함락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안나의 도주를 계획했다.
흙먼지를 가르며 쉼 없이 달려 토굴 아래 산기슭에 다다른 필리프가 말에서 내림과 동시에 허리춤의 칼을 뽑았다.
“수색병과 둘만 움직일 테니 나머지는 모두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예, 폐하.”
파편이 튄 부분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몸이 무거운 느낌이 드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지만, 내딛는 발에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몇 발자국만 더 가면 다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나였다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지금 이곳에서의 삶 전부를 버리고 그녀를 따르겠다는 선택을 내렸을까? 확실하게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답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자만했었다. 자신이 그녀를 훨씬 더 많이 사랑했다고. 그녀가 자신과 사랑의 크기가 같았다면 절대 자신을 떠나는 선택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자신이 훨씬 더 그녀를 많이 사랑했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모든 것은 그저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
내딛는 발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뒤따르던 수색대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필리프는 오히려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조금씩 산맥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하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그래. 다 왔어. 다.”
용기를 내어 다시 제 곁에 돌아와 준 그녀였다. 이제 용기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다.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지켜내야 한다.
“폐하. 상체를 낮추셔야 합니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아 적들에게 움직임이 노출될 수 있습니다.”
배 중앙에서 시작되었던 아릿함이 조금씩 몸 전체로 번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등 뒤 수색병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이명처럼 울렸다.
“안나.”
눈앞에 자신이 직접 만들어 놓은 토굴의 위치를 표시한 나뭇가지 표식이 보였다. 웃는 그녀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한 발만 더. 마지막 한 발만.
다리의 보폭을 최대치로 넓혀 나뭇가지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르려던 순간이었다. 하늘에 섬광이 번득였고, 천둥이 치는 듯한 우렛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