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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01)화 (101/139)
  • 101화

    밝은 빛을 모조리 집어삼킨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커다란 바위 더미 사이 깊은 토굴에 몸을 숨긴 안나가 허리를 웅크린 채 시끄러운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와스스 울리고, 이따금 사람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도주로를 지나 몸을 안전하게 숨길 만한 공간에 도착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안나를 지켜주던 호위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안 돼!”

    적군이 쏜 독화살이 목에 박혔지만, 끝까지 자신을 지켜내려 칼을 휘둘렀던 호위병의 마지막 모습이 안나의 머릿속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비명을 내지른 안나가 다리 사이에 깊게 얼굴을 묻었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전쟁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카마르 제국이 전쟁에 승리할 수 있도록 알고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뿐. 모두의 죽음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정말… 이게 최선일까. 응?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책에서 읽었던 전쟁과 실제로 마주하는 전쟁은 너무나도 달랐다. 삶과 죽음이 목전에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안나의 얼굴을 빗겨나간 파편은 안나를 위해 길을 안내하던 호위병의 머리를 관통했고, 그는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운 좋게 화살은 자신을 빗나갔지만, 그 화살을 맞을 이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식은땀이 그치지 않고 솟구쳤다.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필리프가 제게 준 독침을 손에 쥐었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을 실을 수가 없었다.

    화살을 쏘았던 적군은 안나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조금만 용기를 내어 필리프가 준 독침을 쏘았다면, 이곳으로 길을 안내하던 호위병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했을까. 검술을 조금이라도 익혀 두었다면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한 치의 아쉬움 없이 사용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공포에 떨며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들과 피범벅이 되어 바닥을 나뒹구는 시신, 포탄이 깨부순 참혹한 건물의 잔해 속에서 홀로 된 안나는 오직 제 목숨만을 위해 앞만 보며 내달렸다.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시신에서 흐른 검붉은 피가 신발을 물들이고, 드레스를 적셨다.

    필리프가 자세히 설명해 준 토굴 앞에서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발견한 순간, 안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왔다.”

    이제 됐다. 이제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안나는 자신이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후드득.

    거센 바람을 뚫고 굵은 빗줄기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토굴 가장 안쪽으로 몸을 움직여 간신히 빗줄기를 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는 바람과 섞인 빗방울이 몸을 때리는 것까지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 바람과 빗줄기는 아슬아슬하게 살아있던 횃불을 꺼뜨리고 말았다.

    “하아…….”

    한숨을 내쉰 안나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몸을 바짝 옹그렸다. 체온을 잃으면 큰일이었기에, 당장 몸을 따뜻하게 유지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필리프가 토굴 가장자리에 두꺼운 옷과 이불을 준비해 놓았다고 했는데…….”

    깜깜한 토굴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털끝만큼의 빛이 남아 있던 하늘이 완전하게 어두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빛을 잃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다! 누군가 이곳을 알아차렸다!

    무고한 두 사람의 목숨을 잃게 하며 이곳에 도착했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어.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독 화살촉을 힘주어 잡은 안나가 토굴 구멍으로 고개를 돌렸다.

    “…….”

    “독침을 거두시지요.”

    “…이레네 유모님?”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목숨을 걸고 도착한 이 토굴 안에 들어올 때 안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상체를 낮춰 토굴 안으로 들어온 이레네의 손에는 빚을 내는 얇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반딧불인가?

    이레네는 말없이 안나의 손에 꾸러미를 들려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묵직한 꾸러미에서 뜨끈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온기에 얼음장처럼 차갑던 몸에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늘 밤을 버티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배에 너무 가까이 대진 마십시오. 열전도율이 꽤 높은 암석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하는 안나를 보며 이레네가 미소지었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완벽한 대피처입니다.”

    “…네?”

    “해상과 인접한 산 높은 곳에 있어 전세를 훤히 파악할 수 있고, 말이 오르기 힘든 경사면 끝자락이라 포탄의 피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요. 조준이 조금만 엇나간다면 적군이 그 피해를 오롯이 감수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레네가 차분하게 토굴의 장점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말끝에 강단이 실려 있었다.

    “이곳이 이런 쓰임새로 쓰일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쓰임새요?”

    토굴 밖을 향해 있던 이레네의 시선이 안나에게로 옮겨졌다. 여전히 온기 한 점 없는 차가운 눈동자였다.

    “나와 당신을 도왔던 상점의 노파, 이 두 명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폐하께 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안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따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폐하께서는 유모님을 도우려 하셨겠지만, 따로 말씀드린 것은 사실입니다. 저를 도와주신 분이시니까요.”

    “…내가 당신을 도왔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물론 알고 있었다. 이레네가 걱정하는 인물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필리프를 위한 일이었다고 해도, 당시 저를 도와주셨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벌써 깊은 바닷물 속에 잠겨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니까요. 그에게 아무런 말도 전하지 못한 채로요.”

    베르나의 계략으로 케이든에게 잡혀 제국을 떠날 뻔했던 일. 다시 필리프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며 바닷물에 몸을 던졌던 일. 어쩌면 그렇게 허무하게 그대로 목숨을 잃을 뻔한 자신에게 다시 삶의 기회를 준 이는 이레네 유모였다.

    품 안의 꾸러미에서 점점 열기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아릿하게 조여들었던 뱃가죽이 조금씩 느슨하게 풀어지면서 마음속 불안감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안나는 조금 더 당당하게 이레네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른 길이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필리프의 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곁에 머무는 내가 마땅치 않아, 당신이 일을 꾸몄던 것이 아닐까. 왜 나는 바보같이 당신의 말을 따랐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심하고 제 선택을 후회했습니다.”

    안나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고였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결연함과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더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어요.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 아이를 살리는 선택을 할 것 같아서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하니까요, 설사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던 이레네의 눈빛이 불안하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 당신도 온전히 이해하잖아. 당신이 나였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으리란 걸 알잖아.

    “다시 돌아오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오로지 제 욕심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유모님이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원래 있었던 곳에서는 아이를 훨씬 더 건강하게 돌볼 수 있는 시설이 많이 있으니까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숨겨만 왔던 두려움. 한 번 포문을 여니 마음속 생각이 거센 물살이 되어 흘러나왔다.

    “오로지 내 욕심으로 아이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면, 저는 그런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망설였어요. 하지만, 하지만 알려줘야 했습니다. 이 아이에게.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요.”

    이레네가 자신을 도우리라고 확신한 이유는 배 속 아이 때문이었다. 그녀가 절대 필리프의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리란 사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유모님과 제 목표는 같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게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고, 유모님은 이런 저를 도우셔야 합니다.”

    도움을 청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안나가 당당하게 이레네와 눈을 맞추었다.

    “많이… 강해지셨군요.”

    “아이가 생겼으니까요. 어떻게든 이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야 하니까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안나의 즉답을 들은 이레네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

    “앞으로 어떤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극복해낼 것입니다. 그 사람과 전, 반드시 살아남아 함께 아이를 키우기로 약속했습니다.”

    힘주어 내뱉은 안나가 이레네의 손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모님.”

    이레네가 잡아 오는 안나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안나는 이레네의 손목을 잡은 손에 가득 힘을 주어 제 배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세계의 시간을 모두 경험한 아이예요. 저는 이 아이가 정말 특별한 아이가 될 거라 확신해요. 유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이레네의 손바닥 안쪽으로 미약한 진동이 전해졌다. 분명한 아이의 움직임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강렬한 전율을 느낀 이레네가 질끈 두 눈을 내리감았다.

    “아이도 유모님이 좋은가 봐요. 어쩌면 당연하겠죠.”

    한참을 안나의 배에 손을 얹고 떼어내지 않던 이레네가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

    “다만, 제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뿐이지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레네는 깊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혹시 모를 순간을 위해 아끼고 아껴온 능력. 그 능력을 사용해야 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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