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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00)화 (100/139)
  • 100화

    “자, 여기입니다.”

    안나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에 매단 리본을 떼어 낸 사내가 천막으로 가려진 공간을 가리켰다.

    천막이 내려지자 완벽한 어둠이 시야를 가렸다. 안나가 드레스 치맛단을 무릎 위로 들어 올리고 계속해서 발을 재촉했다. 무언가에 긁힌 것인지 종아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안나가 손등으로 뜨끈한 핏방울을 닦아냈다.

    “아앗!”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에 안도감을 느낀 것인지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질척이는 바닥에 그대로 몸이 잠겨버린 것처럼 팔다리 그 어디에도 힘을 실을 수가 없었다.

    “아, 안 돼! 절대, 안 돼!”

    종아리에만 느껴지던 통증이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에 의식마저 몽롱할 지경이었다. 온몸이 서늘해지면서, 차디찬 한기가 살갗을 뚫고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혼란한 정신 속에서 안나는 다시 제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조금만 더. 그래.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아가야. 엄마한테 힘을 줄 수 있겠어?

    질척한 바닥을 기듯이 걸으며 악착같이 몸을 움직였다. 안나 자신도 놀랄 정도의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는 느낌이었다. 코끝에 비릿한 바닷물 냄새가 풍기며 차츰 어두웠던 공간에 조금씩 희미하게 빛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다 왔어. 이제 다 왔어.

    안나가 밝은 빛 사이로 고개를 내밀려는 순간, 어마어마한 폭음에 이어 다급한 군병의 외침이 들려왔다.

    “적의 공격이다! 즉시 맞대응하도록!”

    병사들이 내지르는 고함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안나가 즉시 상체를 낮추고 시선만을 위로 끌어 올렸다. 필리프의 지시에 각자의 비밀 진지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대열을 갖춰 진격하고 있었다.

    둥둥둥둥.

    방향의 전환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조금씩 그 울림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열의 최상단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그 뒤에는 황궁 소속으로 훈련을 받아온 최정예 군사들이 자리했다.

    “으아아아!!!”

    사방에 흙먼지가 피어 오르고, 수십 개의 깃발이 허공을 갈랐다. 아직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니, 육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은 듯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곧 몸을 움직여야 할 것이다.

    군사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린 안나가 가슴 안쪽에 간직한 꾸러미를 꺼냈다. 군사들의 마지막 행렬이 조금씩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오십시오.”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던 병사 두 명이 차례로 대열을 이탈해 안나가 대기하고 있던 곳으로 다가왔다. 뻗은 손을 잡은 안나가 모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얼굴을 가렸다.

    “이제 곧 호각이 울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몸을 숨겨야 합니다.”

    “네.”

    군사 한 명은 안나의 앞에, 한 명은 안나의 등 뒤에 서며 그녀를 호위했다. 절대 그들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지친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사방에서 흙먼지가 이는 바람에 앞을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의지할 것이라곤 간간이 시야에 들어오는 아군의 깃발뿐. 사방을 신중히 살피던 호위병 한 명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화살 한 대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발사된 화살이었다.

    “자, 몸을 낮추십시오! 어서 말에 올라야 합니다!”

    해상을 통해 제국에 넘어온 적군이 수도 근방에 진입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황제의 뜻에 반하는 반역자들이 적국과 손을 잡은 것이 분명했다.

    안나의 앞뒤로 바짝 밀착한 호위병이 검집의 검을 뽑아 들었다. 호위병들의 군마가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반역자들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자, 먼저 올라타십시오.”

    군마의 고삐를 잡은 호위병이 안나가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필리프와 함께 말을 모는 연습을 했던 안나가 조심스럽게 말에 올랐고, 그녀를 뒤따르던 호위병이 그녀의 등 뒤에 자리했다.

    “가자.”

    호위병이 가볍게 박차를 가했다. 시야를 어지럽게 희롱하던 흙먼지는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저쪽이다!”

    말이 향하는 곳 멀리에서 군사들의 기합 소리와 놀란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훈련이 잘된 명마라 하더라도, 예민해진 말이 놀라 원래의 방향을 이탈하게 된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피어오르는 공포에 안나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말은 아주 예민한 동물이야. 큰 소리를 내어 놀라게 해서는 안 되고, 조바심에 발을 세게 굴러서도 안 돼. 고삐를 쥘 때는 이렇게 갈기와 함께 쥐고, 같은 세기의 힘을 주어야 해. 양해를 구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다고 생각해.’

    필리프와 함께 처음으로 말에 올랐던 순간을 떠올린 안나가 결심한 듯 등을 돌렸다. 그래, 그가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고삐는 제가 잡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적들에게 위치를 노출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시야를 흩뜨려놓은 이후 틈을 노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호위병이 안나의 손에 고삐를 넘겨주고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뽑아 들었다.

    “연속해서 열 발을 쏘겠습니다. 화살이 비면 즉시 박차를 가할 테니, 방향을 고정하십시오.”

    말을 마친 호위병이 활시위를 당겼고, 화살은 일정한 간격으로 허공을 갈라놓았다.

    * * *

    필리프와 안나가 예상했듯 파이만 제국은 해상과 육지의 동시 공격을 선택했다. 카마르 제국의 지리적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베르나가 군사 작전에 힘을 보탰을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익숙하지 않은 만큼 베르나가 머리를 쓸 가능성이 적은 해상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가야 했다.

    오랜 전쟁으로 각종 전술에 능한 카마르 제국의 군사들을 쉽게 물리칠 수 없으리라 생각할 테니, 적군은 대부분의 전력을 해군에 집중할 것이 분명했다.

    카마르 제국은 해상전을 치른 경험이 현저히 적기 때문이었다.

    “폐하. 아직 적이 움직임을 보이지 않습니다.”

    “적이 먼저 공격을 해 올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폐하.”

    해상 공격에 능통한 지휘자들은 적의 뱃머리가 보이는 순간 즉시 공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뜻을 모았지만, 황제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잠잠한 바닷물을 바라보며 각자의 자리에서 기다리기를 한참, 드디어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군사들이 동쪽 베뉴 강 인근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군사들에게는 다시 한번 작전을 똑똑히 일러두었습니다.”

    “그래. 절대 수도 중심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해야 해. 공격이 산발적으로 흩어져서는 안 되니, 첫 공격에서 일제히 총력전을 펼치도록.”

    수년간 이어지는 전쟁을 겪으며 무수히 많은 백성의 죽음을 목격했다. 더는 헛된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종전을 선언했지만, 평화가 계속되리라 낙관한 적은 없었다.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필리프는 언젠가 베르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너무 자만하지 마세요. 이 제국이 영원히 폐하의 것이 될 것이라 확신하십니까.’

    ‘이 제국을 나만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 황녀는 제국을, 마치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내 것으로 생각해야 손에서 놓기가 싫어지는 법이지요. 더는 제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기는 싫어서요.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과욕을 부리는 자의 최후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을 거야.’

    어쩌면 그 순간 이미 이런 날이 오리라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손끝에 힘을 주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관계. 이제는 악연의 사슬을 끊어내야 한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폐하! 함선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수십 선이 넘는 군함이 줄을 이어 카마르 해상에 침입해왔다. 앞선 함선의 뱃머리에 파이만 제국과 하이만 제국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역시 하이만 제국을 끌어들였군.

    필리프가 안나의 체취가 남은 손수건을 얼굴에 묻고 짧게 그녀의 향을 들이마셨다.

    약속했어. 반드시 웃으며 돌아가겠다고. 그러니까 너도 살아남아.

    필리프가 손수건을 내리며 가슴 속 감상을 말끔히 지워냈다. 결연함이 깃든 그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몄다.

    “당장 후퇴하라!”

    적의 기습에 당황한 척, 가장 선두에 있던 군함을 뒤로 물리라 지시한 필리프가 물살의 세기를 확인했다. 해상 우측 끝단, 물살이 세고 좁은 앞바다로 적의 군함을 유인하는 작전을 펼칠 시간이었다.

    빠른 속도로 필리프가 이끄는 군함을 뒤따라온 적들이 위협적으로 대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전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지금이다! 당장 뱃머리를 돌려!”

    적의 눈을 피해 대기하고 있던 군함이 해상 양쪽에서 한꺼번에 출격하며 적들의 군함을 둘러쌌다. 선두에 있던 필리프의 군함이 뱃머리를 돌리는 순간, 몰려든 카마르 군대의 파상 공격이 시작되었다.

    “후, 후퇴하라!”

    적들이 우왕좌왕하며 공격이 아닌 방어로 태세를 전환했지만, 퇴로 역시 필리프의 군대가 장악하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상태가 된 적군의 군함이 당황하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첫 함선을 격침해야 한다! 계속해서 공격하라!”

    필리프의 군함이 가장 앞선 적군의 군함을 향해 집중 포격을 퍼부었다. 적군의 뱃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포탄과 폭격기가 우르르 바닷물로 잠겨 들었다.

    파이만 제국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깃발이 바닷물 속으로 잠겨 드는 것을 확인한 필리프가 즉시 다음 작전을 지시하는 박격포를 쏘아 올렸다.

    쿠쿵!

    군함이 둘로 갈라지는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하늘 높이 흙먼지가 휘날렸다. 앞선 적군의 군함이 완전히 파괴되며 검은 연기가 치솟아 뒤쫓던 적군의 시야를 가려놓았다.

    “전진하라!”

    필리프의 군함이 함몰된 적군의 군함 가까이 다가갔다. 함선이 가까워지면서 끝까지 무기를 놓지 않던 적의 군사들이 하나둘 뱃머리에서 물러나며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사공을 잃은 배의 운명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적군의 함성과 울부짖음이 한데 섞여 고막을 때려댔다.

    “단 한 놈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모조리 없애라!”

    적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그의 칼이 자신의 목을 노리게 될 것. 전쟁에서 살생이 없을 수는 없었다. 상대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비 없이 칼을 휘두르고 폭격해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지켜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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