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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9)화 (99/139)
  • 99화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금빛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같은 시간에 일어나 예정보다 일찍 준비를 마친 필리프의 표정에는 결연함이 깃들여 있었다. 거울 앞에 선 필리프의 곁에 다가간 안나가 그가 입은 재킷의 금빛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오늘이라고 확신하세요?”

    “확신할 수 있어. 그들의 수가 통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절호의 날이니까. 설사 내가 속셈을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필리프가 살짝 헝클어진 안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후 그녀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최대한 시민들의 피해가 없도록, 우리의 선상 작전이 꼭 성공해야 해.”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어느새 대수 임명식 당일이 돌아왔다. 필리프의 계획에 따라 안나는 두 번의 예행연습을 통해 도주로를 확실히 익혀 두었지만,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그의 안전이 걱정이었다. 안나가 필리프의 뺨에 손바닥을 얹었다.

    “무사히 다시 뵙게 되리라 믿어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뺨은 덮은 안나의 손등 위로 손가락을 얽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약속해 주세요. 반드시 무사하겠다고.”

    안나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필리프가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절박하게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살짝 바르작거리던 몸이 움직임을 멈추고 품속 깊이 파고들어 왔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래, 그녀가 내 품에 있다. 곧 다시 이렇게 그녀를 품에 안을 것이다. 더는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았다. 필리프가 안나를 안은 손에 점점 힘을 실었다.

    “수, 숨이…….”

    얼마나 그녀를 안고 있었을까. 숨이 가빠 헐떡이는 안나가 강하게 가슴을 밀어냈다. 품에서 그녀를 놓아준 필리프가 젖은 그녀의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자, 이것을 받아.”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 자그마한 꾸러미 하나를 쥐여 주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화살이 꾸러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독침이 묻은 화살촉이야. 위급한 상황이 오면, 상대의 얼굴 쪽으로 이것을 던져. 화살촉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고. 자, 힘을 실어 던지려면 깃대의 정중앙을 잡는 것이 좋아.”

    “이렇게요?”

    “잠깐, 설마 지금 내 얼굴로 던지려는 건 아니겠지?”

    지금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십니까? 겁을 먹은 표정을 꾸며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필리프의 모습에 헛웃음이 터졌다. 며칠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는 자신을 위한 그의 배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네 상황에서 사용할 만한 무기가 많지 않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안나는 필리프가 건넨 화살촉을 드레스 안쪽에 단단히 챙겨 두었다. 부디 이 화살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비는데, 문밖에서 시종들이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곧 그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와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이.

    “그럼 저 먼저 가 볼게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안나가 드레스 단을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며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을 더 바라보고 있다가는 영영 그의 손을 놓지 못할 것만 같았다.

    “잠시만.”

    안나의 손목을 잡아 붙든 필리프가 붉은 기가 스민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춘 뒤 확신을 주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의 손을 잡았던 그의 손이 그녀의 배로 옮겨졌다. 그가 볼록한 안나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스테판… 스테판 마티어스.”

    필리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안나가 살짝 까치발을 드는데,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의 노크가 들려왔다. 안나의 배를 쓰다듬던 필리프의 손끝이 어렵게 거두어졌다.

    “가 봐.”

    안나가 횃불과 두꺼운 망토를 챙겨 황궁 북쪽 계단으로 향했다. 필리프가 재임 기간 중 만들어 놓은 비밀 통로를 이용한다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감쪽같이 황궁을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통로 앞까지 길을 안내하던 필리프의 수행원이 안나를 바라보지 않고 말을 뱉어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움직이셔야 합니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날이 완전히 밝기 직전 문지기가 교체될 때 빠르게 통로를 통과해야 하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미리 통로 전부를 자세히 익혀 놓은 덕분인지, 길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야간 문지기가 도착하기 전 깜깜한 하늘에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올랐고, 불꽃의 정체를 확인하려 자리를 비운 경비병 덕에 잠시 시간을 버는 것이 가능했다. 재빨리 통로를 빠져나간 안나가 망설임 없이 모퉁이를 돌았다.

    “하아… 저기 있다.”

    필리프가 이야기했던 검은 리본을 단 사내들이 보이는 순간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잠시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은 안나가 바로 몸을 일으켜 사내들 앞에 준비된 마차로 향했다.

    “자, 옷은 이것으로 갈아입으십시오.”

    마차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안나의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던 사내가 두툼한 케이프와 허름한 모슬린 모자를 내밀었다. 그가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기 무섭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 입구를 벗어나 샤를 광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는데, 벌써 길 곳곳이 몰려든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마차를 멈춰 세운 마부가 고개를 돌려 곤란함을 표했다.

    “대장님, 생각보다 모인 인파가 많습니다. 골목길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음. 큰길로 진입하게.”

    평소 같았으면 오래지 않아 도착하였을 거리였지만, 북새통을 이뤄 이동하는 시민들이 길을 내어 주려 하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날이 밝지 않았음에도 많은 이들이 흥건하게 취해 있어, 억지로 길을 내었다가는 소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그래. 전부 괜찮아질 거야. 전부 좋아질 거야. 걱정할 것 없어. 걱정하지 마, 우리 아가.”

    안나가 미약한 통증이 느껴지는 배를 두 손으로 꼭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열린 마차 창문 틈으로 필리프의 이름을 연호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카마르 제국 만세!”

    날이 완전히 밝을 무렵이 되어서야 마차는 샤를 광장 출입구에 도착했다. 임명식이 시작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지만, 출입구에는 이미 여러 대의 마차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잠시 대기하십시오.”

    사내들이 모두 마차를 빠져나가고 홀로 남은 안나가 다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열린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 시야 끝에 화려한 보석 장식을 한 마차 한 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때 마차의 휘장이 걷히며 필리프의 얼굴이 보였다.

    * * *

    광장을 가득 채우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대수 임명식이 성대하게 시작되었다. 화려한 금빛 재킷을 입은 황제 필리프가 단상에 올라서자 귀를 얼얼하게 하던 주변의 소란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귀족들과 백성들 모두가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자, 모두 고개를 드시오.”

    필리프가 광장을 가득 메운 백성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불안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평소 그답게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겠네.”

    황제 폐하를 연호하는 백성들의 함성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황제가 공중으로 손을 뻗어 멈출 줄 모르고 울려 퍼지는 환호를 잠재웠다.

    “그럼 오늘부터 제국의 대수 직을 수행하게 될 샤이크 에셀레드 공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지.”

    카마르 제국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대수 직은, 샤이크 영주의 군사 절반을 차출 받는 대신 그에게 씌워주기로 약속한 이름뿐일 감투였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샤이크는 잔뜩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빳빳하게 고개를 세우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화려한 임명식은 샤이크 영주가 전하는 소감과 황제의 훈장 전달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황제의 앞에 선 샤이크가 그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황제와 자리를 바꿔 단상에 선 샤이크가 자신을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이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입술을 떼어냈다.

    “자리를 빛내 주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겠소.”

    백성들의 입에서 일제히 비명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샤이크는 광장에 모인 시민, 광장 상석에 앉은 귀족과 황족에게 차례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황제 폐하께서 제게 대수 직을 제안해주셨을 때 처음에는 이 자리를 고사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너무나 무거운 감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오른팔이 되어 폐하를 안전히 지킬 수 있다면 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감투를 쓰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샤이크가 장황한 연설을 이어가는 동안 마차를 빠져나온 안나가 광장 우측, 귀족들이 드나드는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몸을 옮겼다. 한동안 이어지던 샤이크의 연설이 끝나고, 커다란 훈장을 든 필리프가 다시 단상에 올랐다.

    숨을 죽인 안나가 필리프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입에서 암호가 뱉어지는 순간 빠르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우리 카마르 제국의 대수가 된, 샤이크 에셀레드!”

    샤이크 에셀레드. 필리프가 에셀레드라는 이름 끝에 강세를 주었다. 미리 이야기했던 둘만의 신호였다.

    지금이다!

    순간 폭탄이 터지는 듯한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황제 폐하를 호위하라!”

    “황제 폐하!”

    “모두 물러서라!”

    필리프가 서 있던 단상 바로 밑에서부터 흰 연기가 퍼지고, 사방에서 크고 작은 폭발물 소리가 울려댔다. 당황한 시민들이 앞다투어 광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공포심이 키운 비명이 커다란 광장 가득 울려 퍼졌다.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이 귀족들이 앉은 단상 아래로 내려와 대피로의 문을 열었다. 허둥지둥 몸을 움직이는 귀족들 틈을 뚫은 안나가 필리프가 일러준 통로를 향해 바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익혀 놓은 그대로의 길이었다.

    “아악! 사, 사람 살려!”

    귓가를 때리는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을 무시한 채, 안나는 이를 악물고 발길을 재촉했다. 벗어나야 한다, 반드시.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지고, 얇은 드레스가 찢겨 나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시야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을 차렸을 때 다시 눈앞에 검은 리본을 매단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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