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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8)화 (98/139)
  • 98화

    “하아… 이렇게 몸이 무거우면 제대로 말을 타지 못할 텐데.”

    안나가 한숨을 내쉬며 볼록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전 내내 몸이 나른하고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녀가 팔목에 찬 보호대와 테이블에 올려 놓은 보호구를 번갈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문밖 인기척이 들려왔다.

    “오셨어요?”

    완벽한 승마복 차림을 한 필리프가 자신이 직접 준비해 준 승마복을 입은 안나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보통 카마르 제국 여인들은 말을 탈 때도 정식 승마복이 아닌 드레스를 입는 것이 관례였지만, 필리프는 안나를 위해 여성용 승마복을 제작할 것을 명했다. 눈부시게 하얀 테일러드 재킷과 품이 넉넉한 남색 바지가 안나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한데?”

    “아, 아니에요. 근사하긴요, 뭘.”

    여과 없는 필리프의 칭찬에 머쓱해진 안나가 고개를 저으며 보호구를 챙겨 들었다.

    “그럼 다 준비된 건가? 나가도 괜찮겠어?”

    “그럼요. 폐하가 오시기 전부터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 놓았는걸요.”

    다소 들뜬 표정을 한 안나가 필리프가 내민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전쟁이 시작되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컸다. 필리프 자신이 내내 안나를 곁에 품고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니, 그녀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수단을 익히는 것이 좋았다.

    승마도 그중 하나였다.

    “말을 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었지?”

    “…네.”

    잡은 안나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실은 필리프가 밝은 목소리를 냈다.

    “막상 타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여섯 살 때부터 말을 탔는데 뭘.”

    “아니, 그래도 말은 엄청 예민한 동물이잖아요. 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도 있고.”

    흥분에 날뛰며 등에 앉은 자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아닐까, 아이의 안전을 위해 이제라도 승마는 무리일 것이라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승마를 배우기로 한 공간이 가까워지면서 안나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날뛰었다.

    “걱정할 것 없어.”

    “아니, 그래도요.”

    “내가 너와 함께 탈 텐데 뭐가 걱정이야?”

    “…네?”

    필리프가 잡은 안나의 손을 끌어와 그녀의 손등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그럼 내가 설마 너를 혼자 말에 태울까 봐? 숙련된 조교가 네 등 뒤에 내내 자리할 테니 이제 그 이마에 주름을 좀 풀지?”

    필리프의 기다란 손가락이 안나가 저도 몰래 만들어낸 이마 주름을 훑어냈다.

    “아…….”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필리프라면 눈을 감고도 능숙히 말을 몰 줄 아는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안나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떼어 냈다.

    안나와 조금 더 안전하게 승마할 수 있도록 황궁 중앙 정원 앞 산책로 주변으로 많은 수의 호위병을 배치하라 명한 필리프가 정원 입 출구를 철저히 살피며 수행원을 돌아보았다.

    “주변을 철저히 통제하도록 해.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릴 수 없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안나와 대화할 때 내었던 살랑이는 봄바람 같은 목소리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하고 차가운 음성이었다.

    “자, 저기 우리가 함께 탈 말이야.”

    필리프가 정원 한쪽에서 풀을 뜯고 있는 검은색 말을 가리켰다. 그가 외출할 때 주로 타던 백마가 아니었다.

    “내가 황궁에 들어와 처음으로 정을 붙였던 말이 저놈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었어. 그 말이 죽고 훨씬 더 훌륭한 종자의 말을 많이 대했지만, 이상하게 첫정을 떼기가 어렵더군. 계속해서 그놈과 닮은 말을 찾게 되는 것을 보면.”

    필리프가 씁쓸함이 남은 표정으로 말에게 다가섰다. 필리프의 인기척을 느낀 말이 그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친근감을 표했다. 익숙한 손길로 말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그가 안나가 앉을 안장을 정리했다.

    “저 먼저 타나요?”

    “내가 말을 안정시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곳을 밟아.”

    막상 혼자 말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돋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식당 사람들과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 조랑말이라도 한번 타 보는 건데. 역시 사람은 기회가 닿았을 때 무엇이라도 경험을 해 놓아야 해.

    “괜찮으니까 몸에 힘 풀고.”

    고삐를 잡은 필리프가 긴장감에 잔뜩 굳은 안나의 등을 쓸어내렸다. 안나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등자를 밟고 기어 올라가듯 느릿하게 안장에 올랐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필리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리는 것이 보였다.

    “흐아.”

    필리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안나의 등 뒤에 자리했다. 필리프는 안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말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그가 낯선 이를 태우지 않으려 고개를 비트는 흑마의 반항을 가볍게 잠재웠다.

    “자, 힘 풀고 내 가슴에 등을 기대.”

    안나의 어깨는 여전히 빳빳하게 굳어 얼굴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한 손으로 고삐를 잡은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를 힘으로 내리며 그녀의 허리를 제 가슴 가까이 끌어당겼다.

    한 바퀴, 두 바퀴, 산책로를 돌다 보니 긴장했던 어깨에서 조금씩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같이 고삐를 잡아 볼까?”

    안나의 손에 고삐를 넘겨준 필리프가 그녀의 손등 위를 덮어 잡았다.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은데.”

    바짝 맞댄 몸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진동처럼 전해졌다.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고삐를 잡은 손에서 가볍게 힘을 풀었다. 긴장이 풀리니 그제야 주변 상황이 시야에 들어왔다.

    넓은 정원을 빙 둘러싼 수십 명의 호위병 무리. 그들의 눈동자 수백 개가 안나와 필리프 두 사람을 향해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저… 이제 조금 떨어져도 괜찮을 것 같아요.”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와 안나가 편안하게 기대고 있던 필리프의 가슴에서 등을 떼어 내려는데, 그가 물러난 공간을 다시 바짝 채우며 입을 열었다.

    “오늘 승마가 처음인데 조심해야지.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떨어질 것 같진 않은데요. 말도 너무 순하고.”

    “아니. 네 말대로 말은 몹시 예민하거든.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돼.”

    아니, 이래서야 제대로 승마를 배울 수가 없잖아요. 항의하려 고개를 돌렸던 안나가 빠르게 숨을 삼켰다. 그의 얼굴이 바로 코앞이었다. 스치듯 입술이 맞닿고, 곧 그의 입술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앞을 봐야지. 말했잖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니까?”

    “밖에서 이러지 마세요. 저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잖아요.”

    “아, 그게 문제였어? 불편하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태연하게 안나의 말을 받은 필리프가 하늘을 바라보며 긴 휘파람 소리를 냈다. 황제의 신호를 들은 호위병들이 일제히 정원 밖을 향해 등을 돌렸다.

    “자, 이제 됐지? 보는 눈이 전부 사라졌잖아.”

    필리프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안나의 귓바퀴에 입술을 내렸다. 귀와 목덜미에 흩어지는 뜨거운 숨결에 놀라 고삐를 잡은 안나의 손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더운 거야? 좀 쉬었다가 탈까? 목덜미가 아주 붉게 물들었는데.”

    당장 고개를 돌려 뻔뻔한 그의 얼굴을 쏘아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쉰 안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까 이제 제대로 된 승마를 가르쳐 주세요. 저 혼자서도 말을 모는 것이 가능해야 하잖아요.”

    안나가 혼자 말을 몰아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을 낙관할 수 없었다. 필리프가 얼굴에 피어있던 웃음기를 한꺼번에 거두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을 놀라게 하지 않아야 해. 청력이 아주 예민한 동물이거든. 혹시라도 말이 놀랄 상황이 오면 침착하게 말을 먼저 다독이도록 하고.”

    “네.”

    필리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탈 때의 주의점과 긴박한 상황에서 말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데, 다리는 가볍게 내려놓는다고 생각해. 자.”

    혹시나 말에서 떨어질 것을 염려해 본능적으로 말의 배를 꽉 감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나의 다리 사이로 뻗어온 필리프의 다리가 그녀의 다리에서 힘을 풀게 했다.

    “이제는 혼자 고삐 잡는 것도 문제없어 보이는데?”

    “…네?”

    안나가 화들짝 놀라며 고삐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내 자신의 손등을 덮고 있던 필리프의 손이 어느새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 잘 해낼 거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다정한 웃음기가 가득했다. 느린 손길로 안나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필리프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붙어 있던 가슴을 떼어 냈다.

    말에 올라탄 내내 평소보다 훨씬 장난기 어린 말투와 표정을 지은 것이, 결국은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필리프가 가르쳐 준 대로 고삐를 움직이며 말을 세운 안나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이제는 내 외모가 익숙하게 느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품은 오후 햇살이 그의 얼굴을 눈부시게 밝혔다. 안나가 불어온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손을 뻗는데, 필리프가 불시에 안나의 허리를 감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여전히 한 손에는 고삐를 잡은 채였다.

    “이제 혼자 몰아도 충분할 것 같은데, 어때?”

    “아직, 아직은 안 돼요.”

    말의 고삐로 방향을 바꾸는 것, 가볍게 박차를 가하며 말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그의 품이 주는 온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몸은 괜찮아? 피곤하면 그만 돌아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

    안나의 허리 즈음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끝이 볼록 나온 그녀의 배 위로 이동했다.

    “괜찮아요. 오히려 말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걸, 아이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제가 고삐를 잡고 움직여 볼게요. 잘하고 있는지 지켜봐 주세요.”

    “그래. 그전에.”

    “네?”

    필리프가 부드럽게 안나의 어깨를 휘감으며 입을 맞췄다. 안나가 턱을 살짝 위로 들어 올리며 뜨거운 그의 입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격하지 않은, 가볍고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자, 이제 해 보실까요?”

    한참이나 안고 있는 안나를 놓아준 필리프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고삐를 잡고 말을 몰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조금씩 색을 바꾸고 있는 하늘 아래 떨어지는 금빛 노을을 받은 그녀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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