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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7)화 (97/139)
  • 97화

    “으음…….”

    이마 위에 내려앉는 부드러운 접촉을 느낀 안나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흡!”

    필리프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안나가 화들짝 놀라 몸을 물리려 했지만, 허리를 감은 그의 손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내가 깨운 건가?”

    맵시 있는 그의 입술이 매끄럽게 말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몸을 물리려 힘을 주고 있던 등 근육이 자연스럽게 이완되었다.

    “깜빡 잠들었나 봐요. 언제 오셨어요?”

    필리프는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전쟁을 준비하느라 최근 어마어마한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언제나 안나보다 먼저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고, 깊은 밤 안나가 잠이 들 때까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를 돕지는 못할망정, 천하태평인 모습으로 잠들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얼굴 전체에 열이 몰렸다.

    “깜빡 잠이 든 정도가 아니던데? 베개 두 개를 모두 다리 사이에 끼우고 이불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내가 누울 공간은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대자로 누운 걸 간신히 제대로 눕혀 놓았는데도 눈을 뜨지 않았어.”

    “제가 언제!”

    항변하려 입을 벌렸지만, 스스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잠버릇이니 뭐라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근사하게 느껴졌던 그의 입꼬리가 어쩐지 얄밉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정도는 그냥 말 안 하고 넘어가도 좋을 텐데.”

    “응? 뭐라고?”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나를 내려다보는 필리프의 눈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시린 근사한 얼굴을 바라보던 안나가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단단한 가슴에 얼굴이 닿자 자연스럽게 뻗어온 필리프의 손바닥이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결전의 날,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켜주는 듯한 손짓에 긴장하고 있던 몸에 조금씩 힘이 풀렸다.

    “날이 좀 따뜻해지면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어디요?”

    “나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이 있어. 제국 황제로서의 짐을 잠시 내려놓아도 되는 곳.”

    안나는 문득 필리프와 함께 갔었던 저택을 떠올렸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소박한 음식을 먹고 평범한 연인처럼 서로를 품에 안았었다.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평범한 시간을 떠올리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안나의 얼굴로 뻗어온 필리프의 손이 그녀의 이마, 눈가, 뺨 입술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나와 함께 가 주겠어?”

    너무나도 근사한 손이었다. 길고 굵은 남자의 손. 손등에 군데군데 불거진 힘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코앞에 있던 필리프의 손이 안나의 배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

    처음이었다. 필리프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안나의 배를 쓰다듬는 것은. 그의 손가락이 세심하게 움직이며 아이의 움직임을 좇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와 자신, 배 속의 아이가 하나가 된 듯한 기분에 온몸에 짜릿한 전기가 일었다.

    “생각보다 배가 더 단단한 느낌이야. 훨씬 더 부드러울 줄 알았는데.”

    안나의 배에 닿은 필리프의 손가락이 춤을 추듯 유려하게 움직였다. 안나가 길게 심호흡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잠시라도 좋으니 아이가 필리프의 손길에 반응해 주기를 빌었다.

    “어?”

    간절한 안나의 바람이 배 속 아이에게 전달되었는지, 순간 배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물방울이 터지는 듯 움직임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각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바, 방금 아이가, 아이가 움직였어요!”

    “그래?”

    아쉽게도 필리프는 아이의 움직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조금 초조한 기색의 필리프가 다시 안나의 배에 손을 얹고 아이가 움직이기를 기다렸지만, 더는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실망한 기색을 한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안나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이 아이가 남자아이일지, 아니면 여자아이일지 상상해보신 적 있으세요?”

    “상상해 본 적은 없지만, 알 수는 있지.”

    “네?”

    필리프는 며칠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그 꿈속에서 제 손가락을 잡았던 아이의 꼬물거리는 손가락이 내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던 꿈속의 자신과 안나, 그리고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 한가득 뜨거운 물이 차올랐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알 수 있다니.”

    “음, 아무것도 아니야.”

    “있죠. 미래에는 배 속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미리 확인하는 방법이 있어요. 물론 알기를 원치 않는 부모도 있지만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배 모양이나 산모의 증상 여부로 판단하는 건가?”

    “아, 그건.”

    안나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이의 성별을 파악하는 검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니, 필리프의 질문에 정확한 설명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이럴 땐 그냥 뭉뚱그려 설명하자. 어차피 그가 알아챌 수도 없는 일이니까.

    “아, 그게.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죠? 미래에는 많은 기계가 발명된다고. 그런 기계들을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거든요. 아이의 성별도 포함해서요.”

    “그럼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있는 것 말고 또 어떤 기능이 있지? 현재 많은 임산부가 산욕열로 목숨을 잃는데, 그런 것도 완전히 치료할 수 있는 건가?”

    “아, 산욕열이요.”

    필리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어쩐지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생각에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미래에서 왔다는 안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신뢰하게 된 이후 필리프는 가끔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으로 안나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저번에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주사를 맞았다고 했었지.”

    “네? 아, 네. 그런데 폐하.”

    “그 주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질병을 예방하는 건지 궁금했어. 혹시 흑사병과 페스트도 예방할 수 있는 건가?”

    흑사병, 페스트.

    분명 익히 알고 있는 질병이지만, 정확히 어떻게 이 질병이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과연 뭐라고 얘기하는 것이 좋을까? 그냥 자연스럽게 없어졌다고 하면 믿을까? 그러다가 지금까지 쌓아 놓은 신뢰마저 허물어뜨리는 건 아닐까?

    점점 두통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시간을 투자해 공부해 놓는 건데.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한 안나가 소리 없는 후회를 곱씹는데, 필리프가 누워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안나의 설명을 듣겠다는 태도였다.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호기심 앞에 점점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저, 폐하. 아무래도 제가 의료 쪽으로는 전문 지식이 없어서…….”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아, 또 궁금했던 게 하나 있는데.”

    “또요?”

    “저번에 네가 말해 줬던 통치 체계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제 제발 그만 물어보라고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대한 뭉뚱그려 설명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안나가 석연치 않은 대답을 뱉을 때면 필리프의 추가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네 말은 백성들도 정치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지?”

    “저기, 그게 모든 나라가 그런 건 아닌데요.”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건 마음에 드는군.”

    그것도 전부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날아올 질문의 늪에 갇히게 될까 무서워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기분이 좋지 않은 거야?”

    필리프가 지친 기색을 한 안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어렸을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걸 후회하는 중이었어요.”

    안나가 한숨을 내쉬는 것이 맞닿은 필리프의 몸으로 전해졌다.

    “조금만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더라면 폐하의 질문에 훨씬 더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필리프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안나의 뺨을 쓸었다.

    “왜, 너는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던 모양이지?”

    “공부에 흥미가 있어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냥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그래? 나는 억지로 한 기억은 없었던 것 같은데.”

    태연히 답하는 필리프의 얼굴을 보며 안나가 소리 없는 탄식을 삼켰다. 그래요. 당신 정말 대단합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었죠? 이곳의 시간과 그곳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고.”

    “그랬었지.”

    “이곳에서 폐하와 지냈던 시간이, 그곳에서는 고작 하룻밤에 불과했어요. 다시 폐하의 곁에 돌아오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하루도 맘 편히 잠을 자지 못했어요. 제가 잠들어 있는 그 몇 시간이 폐하에게는 몇 달의 괴로움이 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가만히 안나의 이야기를 듣던 필리프가 자꾸만 수그러드는 그녀의 고개를 잡아 단단히 고정했다.

    “억울한 생각도 들었어요. 그곳이 아니라 이곳의 시간이 빨리 흘렀다면, 훨씬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볼멘소리를 뱉는 안나를 보며 필리프는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진 웃음을 뱉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미 넌 내게 말할 수 없이 큰 도움이 되어 주었는데.”

    “…아니에요.”

    “네 덕분에 적군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훌륭한 작전을 구상해냈잖아. 나 혼자서는 절대 생각해낼 수 없는.”

    “아니요, 분명 폐하도 충분히 구상해낼 수 있는 작전이었을 거에요.”

    쑥스러움에 발갛게 물드는 뺨 위로 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이름을 불러야지.”

    “…네?”

    “내 이름은 폐하가 아니잖아?”

    의식하지 않으면 백 번이라도 부를 수 있는 이름이었지만, 대답을 재촉하는 까만 눈이 코앞에 있으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는 안나의 얼굴을 보며 슬슬 미소짓는 것을 보니, 당황하는 표정을 보고자 일부러 꺼낸 말이 분명했다.

    “…나중에요.”

    도망치듯 말을 뱉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맞닿은 몸에 그의 웃음이 진동 같은 떨림으로 전해졌다.

    “안나.”

    “…….”

    세상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다정하게 안나의 이름을 부른 그가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서안나.”

    넌 안나 스완이 아닌 서안나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서안나 너 하나뿐이라고.

    “사랑해.”

    가슴에 뜨겁게 차오른 물이 눈가로 옮겨졌다. 눈물이 멎을 때까지 그가 불러 주는 제 이름이, 차곡차곡 귓가에 고였다. 안나를 한없이 불안하게 했던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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