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6)화 (96/139)

96화

‘자, 잔 받으세요.’

안나가 필리프의 손에 커다란 유리잔을 쥐여 주었다.

‘이게 뭐지?’

‘사과 과즙을 발효해서 만들어 놓은 양조주인데,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그녀가 뿌듯한 표정으로 양조주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필리프가 안나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입술에 댄 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미지근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조금씩 배 속에 고이는 느낌이 좋았다. 안나의 커다란 눈동자가 비어가는 술잔과 필리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 이제 저녁 식사 준비 거의 다 됐어요. 술은 한 잔으로 끝!’

필리프의 손에서 빈 술잔을 낚아챈 안나가 종종걸음으로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섰다. 주변에 조금씩 음식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무서울 정도로 허기가 치밀었다.

‘어때요?’

소금을 살짝 뿌려 화로에 구운 송이버섯과, 알갱이가 보이지 않을 정로도 오래 끓인 밤 수프, 말린 산딸기와 호두를 섞어 구운 빵이 오늘의 저녁 식사 메뉴였다.

‘너무 근사한데?’

‘오늘 바로 채취해서 그런지 송이 향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귀한 거니까 당신 많이 먹어요.’

‘당신?’

그녀가 가끔 자신의 이름을 부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불렀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필리프가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안나를 바라보는데 귓가에 희미하게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 스테판 일어났나 봐요. 당신, 그쪽에 있는 이유식 좀 데워 줘요.’

벽난로 근처에 놓아둔 자그마한 그릇을 필리프에게 건넨 안나가 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래, 그래. 우리 아가 착하지. 안 좋은 꿈 꿨어? 아니야? 그럼 배가 고팠어? 아, 그랬구나. 우리 밥 먹을까? 필리프가 들려오는 안나의 다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뭐 하고 있었어요. 빨리 뭐라도 먹여야 할 것 같은데.’

안나가 그릇을 손에 쥔 채 멍하니 굳어 있는 필리프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보랏빛 비단 보자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당신이 잠깐 아이 좀 봐 줄래요?’

안나의 품에 안겨 있던 비단 보자기가 필리프의 품으로 옮겨졌다. 스테판. 분명 안나가 이 아이를 그리 불렀던 것 같은데.

‘스테판.’

아이의 얼굴이 비단 보자기에 가려져 있었다. 필리프가 나지막하게 아이의 이름을 읊조리며 비단 보자기 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아니, 아빠가 그렇게 좋아? 펑펑 울다가도 너는 아빠한테만 안기면 늘 울음을 멈추더라.’

아빠? 필리프가 울음을 멈춘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동그란 얼굴, 울음기가 남아 발간 눈매, 흑색과 은색이 묘하게 섞인 유리구슬처럼 맑은 눈동자.

‘아무래도 우리는 또 식은 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죠?’

안나가 김이 올라오는 그릇을 든 채 환하게 미소지었다.

‘당신이 먹여볼래요? 아무래도 스테판은 아빠 말을 더 잘 들을 것 같은데.’

머뭇거리던 필리프가 아이의 볼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차마 아이의 볼에 닿지 못하고 그대로 손을 거두려는데, 꼬물꼬물 느릿하게 움직이던 아이의 손이 필리프의 검지를 꼭 움켜쥐었다.

가슴 정중앙에서 시작된 울림이 몸 전체로 퍼지는 순간, 필리프가 아이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 * *

커튼을 치지 않은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금빛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번쩍 눈을 뜬 안나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단단한 무언가에 꽉 고정되어 있었다.

“…음.”

살짝 고개를 돌리니 바로 코앞에 필리프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니, 아마 깊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제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 안나가 조심스레 필리프의 품을 빠져나왔다.

살짝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이 조금씩 곧게 펴지는 것이 보였다. 뭔가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매끄럽게 말려 올라간 그의 입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꾸물꾸물 매트리스 가장자리로 몸을 옮겼다.

며칠 사이 부쩍 몸이 무겁고 축축 처지는 기분이었지만, 열이 내려간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워만 있는 것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식으로든 몸을 움직여야 했다.

발끝을 세워 소리 나지 않게 창가로 다가간 안나가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며 간밤 필리프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첩보가 사실이라면 파이만 제국 왕위 임명식이 끝난 직후 바로 공격해올 가능성이 커. 왕위에 오른 뒤 첫 전쟁에 승리해 시민의 신임을 얻어보려는 계산이겠지.’

절대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필리프가 국경 경비 병력을 추가하지 않은 것은 파이만 제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주, 제국의 대수 임명식이 예정되어 있어. 중요한 행사이니, 시민들에게 황궁이 개방될 예정이고.’

황제가 머무는 황궁이 개방되는 날이니만큼 각지에서 시민들이 몰려 수도가 소란스러울 것이니, 적군은 이 소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려 들 것이 확실했다.

‘자, 이것을 받아.’

‘이게 무엇입니까?’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 쥐여 준 종이에는 그가 세운 자세한 계획이 적혀져 있었고, 정확한 이동 경로가 지도에 그려져 있었다.

‘임명식에서 내가 단상에 오르고 얼마 뒤 소란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거야. 절대 당황하지 말고, 종이에 적힌 대로 움직이도록 해. 길목에 이 검은 리본을 매단 사내들이 보이면 그들의 지시대로 움직여. 믿을 만한 사람들이니 의심하지 말고.’

‘폐하.’

‘내내 너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무리야. 나는 이 제국의 황제로서 마땅히 적군과 싸워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임신한 안나를 데리고 군대를 이끄는 것은 불가능했다. 필리프는 안나와 배 속 아이를 지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안나가 필리프가 준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존재가 필리프에게 짐이 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이제껏 한 번도 전쟁에서 진 적이 없는 사람이야. 이번에도 당연히 이길 테니 아무 걱정 할 것 없어.’

자신만만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나는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에게 불안감을 더해주지 않아야 했다.

입고 있던 잠옷 안에 넣어둔 종이를 꺼내든 안나가 안에 적힌 내용과 대피로를 꼼꼼히 되새겼다.

“벌써 일어났어?”

종이의 내용을 외우느라 필리프가 어느새 제 등 뒤에 와서 서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안나가 필리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등을 돌렸다.

“깜짝이야.”

애 떨어지겠네. 습관처럼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눌러 삼킨 안나가 아침 인사를 전하려던 순간 따뜻한 그의 품에 얼굴이 닿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나 했더니.”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볍게 낚아챘다.

“아무래도 꼼꼼하게 외워 두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인 줄 몰랐는데? 새벽부터 공부라니.”

그가 일부러 더 느긋하게 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불안이 자리할 틈을 주지 않는 것. 이는 아마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원동력이 되어주는 사고방식일 터였다.

“새벽이라뇨. 이제 곧 공무를 보셔야 할 시간인걸요. 오늘 지방 영주들에게 줄 하사품을 준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곧 필리프의 수행원이 방문을 두드릴 시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잠옷 차림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돌처럼 딱딱한 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 안나의 허리를 잡은 그의 손이 불순한 의도를 담은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도 훨씬 영특한 여인이었어. 지나치듯 흘린 이야기도 똑똑히 기억하는 것을 보니.”

“제가 어려서부터 공부는 그다지 잘하지 못했지만, 기억력 하나는 괜찮은 편이었거든요.”

“아, 그랬어?”

위로 들린 안나의 팔을 가볍게 낚아챈 필리프가 그녀의 팔뚝 안쪽 연한 살을 간질였다. 간신히 몸을 비틀어 그와의 거리를 확보한 안나가 랩을 하듯 빠르게 뱉어냈다.

“저, 이제 준비하셔야 할 시간이에요. 곧 수행원도 올 테고.”

당황한 안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은 필리프가 양보하듯 몸을 뒤로 물려주었다.

“수행원은 내 허락 없이 침실에 들어오지 못해.”

“아니, 그래도…….”

“그리고, 수행원이 방문을 두드리기까지 아직 십오 분이나 남았어.”

“…네?”

“십오 분이면… 충분하지 않겠어?”

충분하다니, 뭐가요? 질문하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순간 입술이 부딪쳐 왔다.

“으응…….”

숨결을 죄 앗아가는 격렬한 입맞춤이 아닌, 다정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쪽쪽, 낯간지럽게 입술이 부딪치는 소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 남은 십 분은 뭘 하며 보내지?”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물었다. 다정한 웃음기가 가득 묻은 목소리였다.

“…먼저 잠옷을 갈아입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공무를 보셔야 하니까요.”

어색하게 말을 이으며 눈을 피하는 안나를 바라보며 필리프는 터지려는 웃음을 삼켰다.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려는 태도가 뻔히 눈에 보여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당황해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을 조금 더 감상하고 싶었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필리프가 허리에 간신히 걸쳐 있는 침의 자락을 잡아 벌리며 앞섶을 휑하게 드러냈다. 그제야 필리프의 의도를 눈치챈 안나가 있는 힘껏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착복 시종을 부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예전에는 직접 내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왔던 것 같은데.”

“제가 착복을 도와드리던 때와 착용하는 옷이 조금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필리프는 안나가 떠난 이후 사소하게 복장의 변화를 두었었다. 떠나간 연인을 되찾으려는 방법으로 알려진 오랜 미신 중 하나가, 착용하던 복장의 변화였기 때문이었다.

안나를 떠보려 꺼낸 말이 아니었기에 차분한 그녀의 반응이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아, 내 말은.”

필리프가 급히 변명의 말을 뱉으려는데 때마침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의자에 걸어둔 숄을 걸친 안나가 침실 안쪽으로 향했다. 수행원과 착복 시종을 방으로 들인 필리프가 안나가 향한 쪽을 향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드레스로 갈아입은 안나가 필리프가 있는 쪽으로 살짝 시선을 틀었다. 그가 제 눈치를 살피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안나가 웃음을 감추려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며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마른 웃음을 뱉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