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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5)화 (95/139)
  • 95화

    “1980년대… 음 그럼, 저와 살았던 시기는 비슷하네요. 제가 좀 더 먼 미래에서 왔지만요.”

    오랫동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여자와 안나는 숨 쉴 틈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부분이 필리프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안나와 여자를 마주 보며 허리춤에 찬 칼집에 손을 얹고 있던 필리프가 허탈한 탄식을 뱉었다.

    “네, 맞아요. 그 대통령이 당선되었어요.”

    “…아, 그, 그것 참 다행이네요.”

    대통령?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안나와 카르멘을 번갈아 바라보던 필리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춥진 않아요? 몸을 너무 떠는 것 같아서요.”

    “아, 아니. 괘, 괜찮아요.”

    한참 주변을 경계하며 안나에게도 쉽게 말문을 떼어놓지 않던 여자도 계속되는 안나의 노력에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하,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죠. 이, 이런 시대에 뚝 떨어지게 되리라고는.”

    여자의 이름은 카르멘 아닐. 살던 나라와 시기는 조금 다르지만, 원치 않게 먼 미래에서 과거로 오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정말, 아무런 전조 증상도 없었나요? 하루아침에 이곳으로 오게 된 건가요?”

    카르멘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너무나도 오래되어 말하고 싶은 바를 전부 표현해낼 수가 없었다.

    “하, 하루아침에 이, 이상한 숲에 떨어지게 된 거예요. 그리고 얼,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이들의 무지로 마, 마녀로 몰리게 되었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카르멘이 갑작스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아무도 없는 좁고 어두운 감옥 안에 갇힌 듯한 기분에 제대로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괜찮으세요?”

    “…고, 공기를, 바깥 공기를 좀 쐴 수 있을까요?”

    눈과 입을 단단히 가리고 운반용 수레에 의해 옮겨져 안나가 있는 곳에 도착했던 카르멘이었다. 혹시나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필리프는 창가에 모두 어두운 커튼을 쳐 두었었다.

    “안 돼. 함부로 움직이지 마.”

    필리프가 칼집에서 칼을 빼내려다 멈추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카르멘을 막아섰다. 안나가 카르멘의 등을 쓸며 물 잔을 건넸다.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현재 황궁은 방문한 영주들과 그들의 신하들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수상한 행동은 무조건 금해야 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혹시 배는 고프지 않아요?”

    안나의 시선을 피한 카르멘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필리프의 허락으로 준비해 놓은 빵 바구니를 카르멘에게 건네자, 그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빵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지금 카르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었다. 황궁 시녀로 빙의하지 않고, 현재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면 그 즉시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 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 여기 차도 같이 드세요.”

    입 안 한가득 빵을 넣고도 두 손에 빵을 쥐고 있던 카르멘이, 오른손의 빵을 내려놓고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바구니에 있던 빵을 모두 먹어 치운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가, 감옥에 갇혀 있는 내내 이건 모두 악몽일 뿐이라고, 금방 깨어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카르멘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안나가 카르멘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저는 다른 이의 몸에 빙의했어요. 그래서 당신과는 달리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걸 면할 수 있었고요.”

    “…설마… 당신.”

    “…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던 것입니까?”

    카르멘이 놀라 눈동자의 크기를 키우는 안나의 어깨를 잡아채며 닦달했다.

    “말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던 거야? 그,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고?”

    “뭐 하는 짓이야!”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를 거칠게 흔드는 카르멘을 밀어냈다. 필리프에게 밀려 바닥에 널브러진 카르멘이 빠르게 몸을 일으켜 세워 안나에게로 다가섰다. 그녀의 손이 안나에게 닿기 전, 필리프가 카르멘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장 물러서, 다시 온몸이 묶여 재갈로 입을 틀어막고 싶지 않다면.”

    필리프의 눈빛과 몸짓이 지금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한참을 부들부들 몸을 떨던 카르멘이 간신히 마음을 진정하며 의자에 앉았다. 다시 그 끔찍한 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끄, 끔찍한 곳에 갇혀 있는 동안 하루 한 번 음식을 가져다주었던 병사 이외에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 그토록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꿈에 나온 소년 때문이었어요.”

    “…소년?”

    “부, 분명 얼굴은 소년의 얼굴인데 목소리는 하, 할아버지의 목소리였어요. 그 사람이 내게 말했죠. 시간의 문을 넘나든 사람을 만나게 되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될 거라고.”

    소년의 얼굴을 한 할아버지. 안나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니… 대답해 줘요… 저, 정말입니까? 저, 정말 그곳에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온 게 맞습니까?”

    간절함이 가득한 카르멘의 얼굴을 바라보며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안나가 결심한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할 방법은 알지 못해요.”

    “하지만 분명히!”

    “그래도 기회를 얻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요.”

    벌렸던 입을 그대로 다문 카르멘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먼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내가 묻는 말에 모두 진실로 대답해 줄 수 있겠어요?”

    카르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럼 나도 당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 줄게요.”

    * * *

    영주들과의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필리프가 수행원에게 두툼한 서류 더미를 넘기며 집무실을 나섰다.

    “서류는 모두 침실로 옮겨 놔.”

    “예, 폐하.”

    “내일 일정은?”

    “오전에 예정된 재정 회의 외에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 다만,”

    한시라도 빨리 안나의 얼굴을 보려 보폭을 넓혀 걷던 필리프가 걸음을 멈추며 수행원을 돌아보았다.

    “다만?”

    “모레가 파이만 제국 왕위 계승식이 있는 날입니다. 물론 폐하께서 일찍부터 불참 의사를 내비치셨지만, 짧은 축전이라도 보내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참모들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왕위 계승식이라. 황후의 감투를 얻게 된 베르나가 이제 곧 숨기고 있던 더러운 발톱을 드러내겠군.

    “그래. 축전. 내일 아침까지 준비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폐하.”

    어차피 허울뿐인 축하의 말이 되겠지만, 부러 베르나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이어지는 수행원의 보고를 들은 필리프가 침실 방문을 열었다.

    안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잠이 든 상태였다. 그녀의 고개가 불안하게 꺾인 것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필리프가, 그녀의 뒤통수에 손바닥을 얹어 자연스럽게 고개를 넘겨주었다.

    “…으음…….”

    선잠이 든 것이었는지, 안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폐하.”

    “불편하게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은 필리프가 안나의 몸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안나를 침대로 옮긴 그가 그녀의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었지만,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의원의 보고를 받았어. 다행히 걱정할 시기는 지난 것 같다고 하더군.”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걱정할 시기가 지난 것뿐이지, 아직 건강해졌다는 말은 아니야.”

    핀잔주듯 안나의 코를 톡 건드린 필리프가 안나의 배로 시선을 돌렸다. 며칠 사이 그녀의 배가 제법 많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살짝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한번… 만져보시겠어요?”

    안나가 조심스럽게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필리프가 다시 자신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믿을 수 없이 기뻤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피하는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 내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있어서. 좀 나중에.”

    안나의 눈빛을 피한 필리프가 침대 가장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진하게 피어오르는 아쉬움을 꾹 눌러 삼킨 안나가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오늘은 아침부터 몸이 가벼웠어요. 오랜만에 정신이 맑아서, 지난번에 그렸던 그림에 설명을 좀 추가해 보았어요.”

    안나가 침실 우측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에는 수십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는데, 그림으로 그려진 군사 전술 아래로 자세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이걸, 오늘 다 했다고?”

    “네. 며칠 몸이 안 좋아서 폐하와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리고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의원이 하는 얘기 못 들었어?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는 말. 이번에 또 쓰러지면, 그때는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했잖아!”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필리프가 화를 내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안나가 스르르 상체를 세우며 고개를 떨궜다.

    “아,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안나의 오후 진료를 마친 카일은, 그녀의 몸이 조금 회복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분간은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었다. 그녀가 다시 쓰러지고,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상상조차도 끔찍한 일이었다.

    “안나.”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안나에게로 다가간 필리프가 미안한 마음을 전하려 입을 여는데, 그녀가 조금 먼저 말을 뱉었다.

    “무리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것도 안락의자에 앉아서 편하게 적은 글이에요.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도리어 사과의 말을 뱉었다.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더라도 어쨌건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곁을 떠났던 그녀를 원망했고, 어쩌면 그녀가 내내 마음의 빚을 지고 살기를 원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죄인처럼 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네가 미안해 할 일이 아니지.”

    “아뇨. 걱정하시는 마음 잘 알아요.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

    자신의 앞에 서면 늘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긴장해서 부들부들 떨다가도, 때로는 맹랑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늘 자신을 웃음 짓게 하는 여자였다.

    “아직, 화나셨어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질문에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너도나도, 조금씩은 마음을 숨기고 있겠지. 이번에 관계를 망치게 되면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알기에.

    “네가 이야기한 전술 중 두 번째 작전을 준비하고 있어.”

    “두 번째요?”

    필리프가 빠르게 말을 돌렸다. 어렵사리 맞이한 찰나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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