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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4)화 (94/139)
  • 94화

    벌써 사흘째, 안나의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필리프는 공식 업무를 볼 때를 제외하고는 늘 안나의 곁을 지켰다.

    그녀의 잠옷을 바꿔 입히는 것도, 잠시 의식을 차린 그녀의 입에 죽과 수프를 넣어주는 것도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 되어 버렸다. 시종들의 만류에도 필리프는 꿋꿋이 스스로 안나를 돌보기를 자처했다.

    “폐하. 지방 영주들이 이제 막 수도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음. 도착하면 바로 연회실로 데려가도록.”

    “함께 식사하지 않으십니까?”

    “어차피 황제와의 식사 자리를 편히 생각할 영주는 없어. 식사가 끝나면 바로 회의실로 이동하는 것으로 해.”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을 바라보지 않고 답한 필리프가 미지근한 물이 들어 있는 대야에 마른 수건을 넣었다.

    “폐하. 간단한 것이라도 식사가 될 만한 것을 드시는 것이.”

    “필요하면 부르지. 이만 나가봐.”

    “…예, 폐하.”

    방문을 닫는 소리에 안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고 곧 이마에 따뜻한 손이 내려앉았다.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지만, 몸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폐하.”

    안나의 목소리가 잔뜩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괜히 말을 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잠시라도 정신이 들었을 때 음식을 먹여야 했다. 필리프가 종 줄을 잡아당겨 시종을 호출했다.

    “그래. 정신이 좀 들어?”

    “…네.”

    “바로 죽을 준비하라 할 테니, 잠시만 몸을 일으켜 봐.”

    죽은커녕 물 한 모금도 입에 넣고 싶지 않았지만, 걱정스러운 필리프의 눈빛을 마주하니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나가 필리프의 팔에 의지하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시종이 가져온 커다란 접시를 받아든 필리프가 간이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뜨끈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수프에는 잘게 찢은 고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기력이 회복되려면 고기를 먹어야 해.”

    생각보다 많은 고기의 양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고개를 저으려 얼굴을 들었다가, 필리프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끝이 날카로운 눈매가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제가 먹겠습니다.”

    여러 번 불어 식힌 수프 숟가락이 안나의 입술 앞에 들이밀어졌다. 민망함에 붉게 달아오른 뺨을 숙였지만, 내민 수저는 거두어지지 않았다.

    “고집 부려봤자, 네 손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가 처음 음식을 제 입에 넣어주었을 때가 떠올랐다. 고집스럽게 포크를 거두지 않던 그의 눈가에 스며 있던 미소, 그의 눈가에 그때와 똑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빨리 기력을 차리는 게 먼저잖아?”

    숟가락을 들 힘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고집을 꺾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술 틈을 벌렸다.

    “그대로 삼키면 안 되지. 누워있느라 소화시키기 힘드니까 잘 씹어서 삼켜.”

    식사 교육을 받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몸이 아플 때 누군가 자신을 챙겨 준 기억이 없어, 필리프가 과하게 자신을 돌보는 것이 기분이 좋으면서도 어쩐지 조금 쑥스러웠다.

    “…이제 충분히 먹었어요.”

    수프 접시 절반 정도를 비워낸 안나가 입술 앞으로 들이밀어 진 숟가락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쉬운 표정으로 접시를 치운 필리프가 안나의 허리를 잡고 침대에 몸을 눕게 했다.

    “이제 좀 쉬어.”

    “저는 이제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편히 공무를 보세요.”

    “아직 완전히 열이 떨어지지 않았어. 의식이 돌아오는 것도 순간순간이고. 당분간은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아.”

    “몸이 불편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이것을 잡아당길게요.”

    안나가 황제가 시종을 호출할 때 사용하는 종 줄을 가리켰다.

    “폐하께서도 말씀하셨던 의원도 가까이 있으니,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잠결에 희미하게 필리프와 시종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안나가 말을 이었다.

    “오늘도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천천히 일 보시고 오세요. 저는 또 잠이 와서요.”

    필리프가 느리게 끔뻑거리는 안나의 속눈썹을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영주들이 식사를 마치고 모두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안나가 어서 나가보라는 듯 필리프에게 눈짓해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잠기운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의식을 차린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누르며, 필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시종에게 바로 이야기해.”

    “예. 어서 나가보세요.”

    안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은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는 발걸음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곧바로 카일을 불러 방 앞에 대기시켜. 그리고 몸단장 시종 두 명을 불러 그녀의 상태를 살피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새로 안나의 진료를 맞게 된 카일은 먼저 황궁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절대 함구할 것을 약속한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이후 필리프의 침실에서 가까운 방에 머무르며 하루에 세 번 안나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자네는 이곳에 남아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는지 철저히 감시하도록. 누구든 수상한 행동을 하면 그 즉시 나에게 알리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호위대장을 침실에 남겨 둔 필리프가 걸음을 재촉했다. 여전히 안나를 혼자 있게 하는 것에 불안감을 안은 채 회의실 문을 열었다.

    수십 개의 촛불이 빛을 발하는 커다란 샹들리에 아래에는 서른 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각 지방 영주들이 황제에게 바친 특산품으로 조리한 성대한 식사를 마친 영주들이 자리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줄지어 자리하고 있던 영주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수그렸다. 회의장의 인원 모두가 황제가 상석에 자리할 때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다.

    “모두 고개를 들어.”

    “예, 폐하.”

    영주 한 명 한 명에게 빠르게 눈인사를 건넨 필리프가 자리에 앉아 서류를 펼치며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회의를 시작하지. 먼저 각 지방에 파견된 군인을 수도로 차출하는 것을 이야기해 보겠네.”

    침입에 대비한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시기였다. 중심을 잡지 않으면 제국 전체를 위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었다. 사랑하는 제국과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내야 한다는 다짐을 굳게 새긴 필리프가 눈가에 힘을 주었다.

    회의는 장시간 이어졌다. 손익 계산을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영주들은 군사 차출에 난색을 보였고, 회의는 교착 상태를 이어갔다. 더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판단한 필리프가 회의의 끝을 알렸다. 회의가 길어질 것을 예상해 이미 이틀간의 일정을 짜 놓은 후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지. 모두 편히 여독을 풀도록.”

    “감사합니다, 폐하.”

    “샤이크 영주, 따로 이야기할 것이 있네.”

    “예? 아, 예, 폐하.”

    지방 영주 중 가장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샤이크 하이드만 영주는 권력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자였다. 허울뿐일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미끼를 던져주면, 그 미끼를 물기 위해 침을 뚝뚝 흘려댈 테지.

    황제와 샤이크가 집무실로 향하는 것을 목격한 영주들이 목소리를 낮춰 숙덕거렸다.

    “설마, 샤이크 영주가 먼저 백기를 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궁에 오기 전부터 우리끼리 입을 맞춘 사항이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쓸 만한 병사 구하기가 쉽지 않은 시기인데, 황궁에 병사 절반을 차출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음.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가장 많은 군사를 보유한 샤이크 영주가 군사 차출에 동의한다면, 동의하지 않은 것에 대한 피해는 오롯이 나머지 영주들에게로 돌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단 기다려봅시다. 설마 그리 쉽게 넘어갈 리가 있겠습니까.”

    영주들이 회의실을 떠나지 못하고 불안감을 내비치는 사이, 필리프와 샤이크가 집무실에 도착했다. 황제의 집무실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샤이크가 집무실 구석구석을 살피듯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시종이 내온 찻잔을 테이블 끝으로 밀어놓은 필리프가 빠르게 본론을 꺼내 놓았다.

    “내가… 자네에게 특별한 제안을 하려 해.”

    “…네? 아, 예. 무, 무엇을.”

    “자네가 소유한 영지에서뿐 아니라, 카마르 제국 수도에서도 자네의 세력을 떨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떨 것 같은가.”

    욕심이 득실거리는 늙은 여우의 눈동자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 * *

    “자네들은 여기서 대기하도록.”

    “신호를 주시면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폐하.”

    “마상 시합에서 사용하던 신호를 주지.”

    끼이익. 철문이 마찰하는 끔찍한 소리가 울리고, 감옥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들이 필리프가 지나갈 길을 열어주었다.

    여전히 지하 감옥을 향하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가파른 계단도 횃불을 비춰도 잘 확보되지 않는 시야도 성가셨지만, 무언가 썩어들어가는 고약한 냄새가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마르크의 안내를 되새기며 지하 감옥 최 하단에 도착한 필리프가 오랜 시간 갇혀 있는 여인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입에 걸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흥분해 끊임없이 중얼거림을 뱉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여자는 차분한 눈동자로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너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

    필리프가 다시는 걸음하고 싶지 않았던 지하 감옥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는 하나였다.

    ‘분명, 그녀도 이곳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시간 여행.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리라 생각했던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사실을 깨달았고, 안나는 그런 필리프에게 아량을 베풀 것을 청했다.

    “…흐으… 나 같은 사람을… 발견한 건가.”

    한동안 입을 열지 않던 여자가 간신히 침을 모아 삼킨 후 목소리를 쥐어짰다. 필리프가 여자의 등 뒤로 향해 그녀의 손을 묶은 사슬을 풀어 준 뒤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떤 곳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내 말에 토를 다는 일이 다신 없어야 할 거야.”

    장시간 묶여 있던 손발이 풀어졌음에도 여자는 쉽게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바르르 몸을 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필리프가 휘파람을 불어 감옥 밖에 서 있던 호위병을 호출했다. 황제의 눈빛을 받은 호위병 두 명이 여전히 몸을 떨고 있는 여자의 팔을 한쪽씩 단단히 잡아 고정했다.

    “네가 죽기 전 다시 땅을 밟을 수 있게 해 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예의를 갖추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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